29. 황제의 추리2022.02.10.
황제 부부의 신성 의식이 시작되었다. 기도를 외는 미카일의 손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는 그 손을 한쪽씩 각각 황제, 황후와 나누어 잡았다. 로안은 미카일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기도 의식을 하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했던가?’
순간,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정신이 한곳으로 집중되는 느낌도 들었다. 의식 준비를 위해 황후와 방에 있던 때부터 마구잡이로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황후가…… 날 공격하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어릴 적부터 지켜봐 온 프시케를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해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겁주고 경고하고 싶을 수는 있었다.
‘생각을 정리해 보자.’
처음 엘리제의 주술이 발동되어 고통에 사로잡혔을 때 황후는 크레미언 대공과 만나는 중이었다. 둘은 그 시간에 왜 같이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군.’
엘리제는 대공의 저택으로 가서 주술을 풀고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열린 ‘엘리제를 위한 연회’에서 폭탄이 터졌다. 그게 자신과 엘리제가 춤을 추던 순간이 아니라, 황후와 춤을 추던 순간이었다. 만약 엘리제와 춤을 추던 순간에 폭탄이 터졌다면 자신은 엘리제를 감싸 안아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만약 그 주술과 연회의 폭탄이 노린 것이 엘리제의 목숨이라면?’
그리고 두 가지 사건 모두 황제에게 그녀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는 벌을 주기 위함이라면?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로안은 자신의 추리에 스스로 놀랐다. 흠칫. 기도를 위해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가 엘리제의 목숨을 계속해서 노리고 있다. 그는 흑마법을 사용하고 폭탄도 사용하였지만, 황제는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제의 주술을 푼 것도 연회에서 엘리제를 구한 것도 데몬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역시 황후인가?’
로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엘리제와 자신이 오랜만에 뜨거운 술래잡기 후 열정적인 밤을 보내려 했을 때, 황후 방에 불이 났던 것도 떠올랐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무래도 자신의 심증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황후가 엘리제를 죽이려 하고, 데몬은 황실을 향한 충성심에 매번 그것을 막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싫다는 데몬에게 엘리제의 주술을 풀라고 명한 것은 나였으니까.’
그래서 황후가 자신의 계획에 자꾸 방해가 되는 데몬을 유혹하여 꾀어내는 중이라면?
“!!”
로안은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프시케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감고 사제의 빛나는 손을 맞잡은 채, 그녀는 정성스레 기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보았더니 갑자기 황후가 대공과 연회장에 입장하고, 먼저 차를 같이 마시자 불렀던 사실도 떠올랐다.
‘맞아! 그러고 보니 황후는 엘리제에게 주술을 먹인 첩자의 정체도, 함께 대공가로 갔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맙소사.”
여인들의 투기와 궁중 암투가 무서운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갑자기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변한 로안이 음산하게 말했다.
“정말 무서운 여자로군, 황후.”
“예?”
기도 중에 갑자기 들려온 평가에 프시케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프시케의 눈이 토끼 똥처럼 동그래졌다.
‘뭐지? 기도 의식을 정성스레 했다고 지금 나더러 무서운 여자라는 건가??’
아까부터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흠칫대는 로안의 기척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고정된 자세로 기도 올리는 것이 본인은 힘든데, 황후는 잘하고 있으니 타박하는 듯이 느껴졌다. 로안의 속을 알 길이 없어 어리둥절한 그녀를 놔두고 로안 혼자 진지하게 다시 눈을 감았다.
***
“이럴 수가! 황후가 어찌 그럴 수가!”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이 누굴까? 우습게도 가장 자신이 싫어하고 질투했던 이가 떠올랐다. 크레미언 대공.
“대공을 모셔와라!”
황제의 부름에 잠시 후 데몬이 찾아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로안은 갑자기 그의 검은 제복과 넓은 어깨가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폭발이 있을 때 엘리제를 지켜냈으며, 폭발이 흑마법에 의한 것임을 알아냈고, 황궁의 안정을 위해 최고의 사제를 모셔왔다. 이보다 더 충직한 신하가 있을까.
“대공, 긴히 상의할 일이 있네.”
로안은 기도하는 동안 자신이 내린 추리의 결과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황후 폐하께서 모든 사건의 배후라 생각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로안이 대답 대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충격이었으니, 너의 충격도 이해한다는 듯이.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릅니다, 폐하.”
그는 신중하게 답했다.
“하지만 저도 폐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다른 이에게는 아직 말씀을 아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짐의 생각도 그러하오.”
“제가 확실한 증좌를 찾게 되거든 바로 말씀드릴 테니 조금 기다려주십시오.”
로안은 다행이다 싶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대공이 황후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가감 없이 파헤치고 그에게 곧 물증을 가져다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황후가 범인이라니 실망스럽지만, 자신을 공포로 몰아넣고 엘리제를 죽이려 한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으니 그냥 용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 고맙소, 대공. 그대를 믿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황후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되오.”
로안은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데몬은 로안의 방을 나왔다. 잠시 후. 복도를 걸으며 데몬은 로안에게 들었던 내용 중에 황제는 모르고 있는 사실들을 떠올렸다.
‘황후 폐하는 진범이 아닐 것이다.’
엘리제의 주술이 처음 발동되는 그날 프시케가 자신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 물론 그것이 로안의 관심을 끌고 질투를 유발하기 위함이었지만 프시케에게는 엘리제를 향한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데몬은 마가렛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황후의 방에 불을 지른 사람이 다름 아닌 황후 자신이라는 것과 그것이 엘리제를 로안의 품에서 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굳이 황제를 겁박하면서 엘리제를 죽이기 위해 주술이나 폭탄과 같은 잔인한 방법을 사용할 이유가 프시케에게는 없었다.
‘황후에게는 애첩을 황제에게서 멀리 떨어뜨릴 더 쉽고 효과적인 방법들이 많지.’
요새 지켜보며 그녀가 영리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굳이 이런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가 로안이나 엘리제를 생각하는 마음은 애정과 연민에 가깝지, 질투와 분노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로안의 입장에서는 황후가 의심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일까, 범인은…….”
데몬 역시 진범의 정체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했다. ***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연회의 사고로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첫날 의식을 마치고 돌아온 미카일이 엘리제에게도 들러 안부를 전했다.
“사제님! 이렇게 황궁에서 뵙게 되니 정말 반가워요. 오셔서 기쁩니다.”
엘리제는 옛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에게는 미카일이 데몬과 함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 고맙고 반가울 수밖에. 한참 미카일의 안부를 물은 엘리제가 마침 신성 의식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물었다.
“참, 두 분 폐하께서 정성 들여 기도하신다고 하니 저도 도움이 좀 되고 싶은데요. 좋은 것이 없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미카일이 차분한 음성으로 천천히 답했다.
“그럼 두 분의 기도 때 필요한 성화(聖華)를 준비해주심이 어떠실지요.”
“성화요?”
“기도 의식 때 사용하는 꽃을 신성국에서는 성화라 부릅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끼시는 신께 기도와 함께 드리는 정성이지요.”
“그럼 꽃다발을 준비하면 될까요? 저는 꽃꽂이를 할 줄 모르는데요.”
“배우시면 됩니다.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꽃꽂이도 하실 줄 아세요?”
“사제가 배우는 기본 수업에 포함됩니다.”
와! 이 세계의 사제들은 꽃꽂이를 하는구나! 미카일처럼 잘생긴 사제들이 아름다운 꽃을 들고 제단을 꾸미는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네. 제가 하고 싶어요. 가르쳐주세요.”
“그럼, 황제 폐하께 윤허를 받고 시간을 상의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엘리제가 웃으며 인사했다. 그녀의 밝아진 미소를 미카일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공가를 떠나실 때 눈물지으시는 모습을 뵈어 걱정하였는데 씩씩해지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아! 참 그랬었죠? 그때는 약한 모습 보여드려 죄송했어요.”
“당치않습니다. 힘든 일을 겪으신 직후였으니까요. 기운이 나신 모습이 좋아 보여 드린 말씀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엘리제의 기분과 상태에 그의 친우 데몬도 영향을 받을 것이었고,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황제도 좌지우지될 것이 분명하니까. 생각해보니 엘리제는 이미 미로니카 황국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였다.
“네. 지금은 주변에 계신 분들 덕분에 힘을 내고 있어요.”
그런 그녀가 이토록 밝아져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눈부신 미소가 문득 자신의 가습을 두드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가련한 분께서 계속 이런 미소를 지으시면 좋겠구나.’
그녀가 앞으로도 밝게 웃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미카일의 마음 한편에 그녀의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는 마음도 조용히 싹트고 있었다. 그는 모르게. ***
“엘리제 님께 꽃꽂이 수업을 해드리기로 했네.”
황제의 허락을 받은 미카일은 엘리제에게 내일부터 꽃꽂이 수업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고 데몬에게도 말해주었다. 그는 이 수업에 데몬을 불러 두 사람을 자주 보게 해줄 생각이었다.
“전해 들었어. 이틀에 한 번이라지?”
“맞아. 혹시 그 수업을 자네가 도와줄 수 있나?”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래 의식에 사용하는 꽃은 금방 시들어서 자주 갈아주는 것이 좋은데 그만한 꽃들을 엘리제 님께서 직접 고르고 운반하시려면 안목을 갖춘 힘센 사람이 필요해서.”
황궁에 널린 것이 힘센 시종들이다. 그들 중 안목을 갖춘 귀족들도 상당했다.
“미카일, 뭘 생각하는 거야?”
자신의 오래된 벗은 속내가 따로 있거나 뒤로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데몬을 위해 그가 무언가를 배려하고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네의 행복을 찾게 도와주는 일 정도라고 하지.”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데몬이 미카일을 쳐다보았다.
“데몬! 그런 표정을 짓는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어릴 적에 잠시를 제외하고는 늘 어른스럽고 진지했던 데몬이었다. 무표정이 아닌, 오랜만에 살아 있는 표정을 본 듯해서 미카일은 기분이 좋았다.
“도와줄 텐가?”
하. 데몬이 눈을 감으며 웃었다. 아직 미카일이 그에게 비밀로 하고 싶은 깜찍한 무언가가 있는가 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지금 말해주지 않는 것 역시 자신을 위한 것일 테지.
“물론이네.”
데몬의 대답에 미카일이 만족한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선한 갈색 눈이 곱게 접혔다. 이것으로 이틀에 한 번씩 세 사람이 함께 만나는 시간이 약속되었다. *** 다음날 오전 엘리제는 미카일, 데몬과 함께 황궁의 온실과 정원에서 기도 의식에 필요한 꽃들을 골라 옮겼다. 곧 점심시간이라 각자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미카일이 엘리제에게 꽃 손질하는 법을 알려줄 예정이었다. 엘리제는 성화 준비 시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맘껏 볼 수 있었고, 그보다 더 아름답고 멋있는 남자 둘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으 까.
‘아, 상상만 해도 코피 쏟을 거 같아.’
생각만으로도 치명적으로 멋진 데몬을 떠올리면 아찔해 머리가 빙빙 도는 기분이었고,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의 미카일을 생각하면 그냥 마냥 흐뭇하니 좋았다. 낮에 그녀는 미카일, 데몬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과 온실을 누볐다. 온화한 표정의 미카일에게 신성 의식에 어울리는 꽃들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들은 후, 그 설명대로 그녀가 고른 꽃들을 정원사나 시종들이 아닌 데몬이 직접 자르고 담아주었다. 옮기는 것은 시종들의 몫이었지만 곁에 있던 데몬의 도움을 받아 마음껏 꽃을 고를 수 있었다. 외투를 벗고 셔츠와 조끼만 입은 데몬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 누가 그랬는가. 일하는 남성의 구릿빛 피부와 섬세하게 짜인 근육은 그냥 하나의 작품이라고.
‘아. 빙의한 이후에 최고로 만족스러운 나날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
“안 돼! 아직 죽을 수 없어!”
“어마, 깜짝이야!”
침대에 누워서 안마를 받다가, 갑자기 외치며 벌떡 일어난 엘리제 때문에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던 마가렛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앗, 놀랐어? 미안해, 마가렛.”
“괜찮습니다. 그새 악몽이라도 꾸신 거예요?”
“나 안 잤는데?”
“죽을 수 없다며 벌떡 일어나셨잖아요.”
“아~ 그거? 혼잣말이었어.”
“혼잣말이요?”
제가 듣기에는 비명이었어요! 마가렛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좀 살만한데, 죽어도 여한이 없다니 당치도 않았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아직 안 돼.
“피곤하지 않으세요? 계속 온실과 정원을 오가며 꽃을 고르셨는데 오후 수업 전까지 잠시 눈 좀 붙이셔요.”
고단했을 엘리제의 팔다리를 마가렛이 정성 들여 주무르고 있었다.
“그럴까? 근데 기분이 좋아서 잠이 안 와.”
이렇게 행복한 건 빙의하고 처음이거든.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똑똑똑. 엘리제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