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마른하늘에 날벼락2022.02.07.
죽을 뻔했던 엘리제를 살린 사제 미카일이 이번에는 황궁으로 와주었다. 데몬은 황제에게 미리 미카일의 방문에 대해 말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신성국의 사제인 그에게 흑마법과 관계된 이번 사건을 문의했고, 그가 이번 폭발 사건의 조사를 돕기 위해 황궁으로 오고 있다고. 당연히 로안도 미카일을 두 팔 벌려 환영하였다. 게다가 미카일은 지난번 주술에 걸린 엘리제를 신성력으로 치유해준 사제였으니 로안은 그때 일까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엘리제를 구해주었으니, 내게도 은인이시오. 황궁이 안정되면 제대로 큰 사례를 하겠소.”
미카일은 정중히 거절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폐하, 이번 일로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미카일은 침착하게 로안을 위로하였다. 그 덕에 그는 마음을 크게 열고 미카일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제께서 생각하시기에 이런 일의 범인이 누구인 것 같소?”
미카일이 찾아본 내용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모르겠습니다.”
대답마저 꾸밈없이 청빈했다.
“다만, 제 생각에는…….”
황궁 집무실에 있는 로안과 프시케, 데몬과, 시종장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의 전달자인 사제로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황제 폐하께서 당분간은 삿된 행동을 피하시고 신성 의식을 올려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지하고 사심 없는 미카일의 단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신성 의식이요?”
로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이냐는 듯이.
“그러니까, 사제께서 보시기에는 제가 불경하여 이런 변고가 일어나는 것 같다는 말씀이신지…….”
말끝을 흐리는 로안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사제가 그렇다고 하면 어쩌지? 황제로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황후를 놔두고 애첩만 예뻐해서 신께서 노하신 거라 하면 어쩌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미카일은 로안이 원했던 대답을 해주었다. 휴, 황제의 입에서 안도가 흘러나왔다.
“다만.”
다만? 미카일의 한 마디에 다시 로안이 쭈뼛 긴장했다.
“신성국에서는, 잘 풀리지 않는 일이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정신을 맑게 하여 좋은 방법을 찾습니다.”
황후는 미카일의 말에 동의했다.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맑은 몸과 마음에는 맑은 정신이 담길 터이니, 더 좋은 수를 찾을 수 있거나 통찰력이 생길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지금 흐린 상태의 로안을 정화하자는 말이었다. 신성한 기도로. 약해져 있는 로안의 심중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될 이야기여서 프시케는 반가웠다.
“더불어 의식을 통해 신의 가호와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신의 가호와 도움을 받는다는 말에는 로안도 솔깃했다. 그래서 의식을 하겠다고 말을 해야 하나 갈등하는 그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미카일이 말했다.
“저와 100일 기도에 들어가심이 어떠십니까.”
“배, 백 일이나요?”
강제 사제 체험이 당첨되자, 로안의 얼굴이 뭐 씹은 표정처럼 어두워졌다. ***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프시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소곳이 말했다. 그 모습이 진지하고 단정하여 벌써 보는 이의 마음이 정갈해지는 기분이었다.
“폐하와 황국을 위한 의식에 제 미약한 정성이라도 보태고 싶습니다. 무엇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황후! 저기 내 의견도 좀…….”
하지만 이미 로안의 의식 거행은 확정이었고, 황후가 함께하냐 마냐의 이야기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두 분 폐하의 정성이 모인다면 분명 신께서도 감응하실 것입니다.”
미카일이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며 말했다. 사제와 황후가 이렇게 나오는데, 황제가 안 할 수가 있나. 이제 단념하고 수긍한 로안도 옆에서 받아들이며 주의사항을 알려달라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목욕재계 후에 정해진 기도 시간에 저와 함께 기도를 올리시면 됩니다.”
다행히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황제로서 황국이 위기여도 할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고작 기도라니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단.”
멈칫. 미카일이 저 ‘단’이라는 말을 붙여서 뒷말이 좋았던 적이 없다.
“100일의 기간 동안 삿된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정성을 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역시. 로안이 슬쩍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쉽고 초라한 기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저, 삿된 행동이라 하심은…….”
“삿된 행동에는 술을 마시는 것이나,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사냥, 타인을 비방하는 말을 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을 갖는 것, 마지막으로…….”
이 정도로 끝나주었으면. 로안의 눈빛에 간절함이 담기는 순간.
“부부가 아닌 남녀 간의 음행이 포함됩니다.”
“!”
“!!”
모두가 놀랐다. 특히 로안이. 사냥과 음주는 그가 평소 자주 즐기는 것이었고, 타인을 비방하는 말과 질투하는 마음 역시 수시로 일어나고 있었으며, 엘리제와는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 로안은 이 와중에도 마지막이 가장 좌절스러웠다. 설마 사제가 황제의 뒷조사라도 한 것인가 싶을 만큼 정확하게 그의 부족함을 짚어냈다.
‘나에 대해 어찌 이리 잘……. 혹시 독심술을 할 수 있으신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 그가 평소에 즐기던 일들이 주로 유희였고, 신성국에서는 그게 맑은 정신을 흐리게 한다고 믿는 것일 뿐이었지만, 로안은 진정으로 당황스러웠고 속상하였다.
‘좋아하는 것들을 다 끊고 100일간을 견뎌야 한다니.’
‘고작 기도’라며 우습게 본 것이 후회스러웠다. 100일 후엔 정말로 신성해질 것만 같다.
***
“그게 사실이야?”
엘리제에게도 황제 부부가 100일간의 기도 의식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전달되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애첩이니 황제의 행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공유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앞으로 적어도 100일간은 폐하께서 날 만나러 못 오시겠네?”
반가운 소식에 엘리제가 벌떡 일어났다. 마가렛이 침착하게 대답해주었다.
“만나러 오실 수는 있지만, 그사이 엘리제 님과 동침하는 일은 없으실 것 같아요.”
‘야호! 세상에, 미카일 구세주구나!’
“사제께서 말씀하신 주의사항이 모두 황제 폐하께서 평소 좋아하시던 것들이라 앞으로 힘드시겠다고 걱정하는 소리들이 많았어요.”
그러게. 삿된 것을 신성국의 신께서는 어쩜 그렇게 쏙쏙 고르셨는지.
“그렇게 고생하시는 거니 꼭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
“네. 100일 정성이 사실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오죽하면 어느 동쪽 나라 전설에는 100일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은 정성으로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된 이야기가 있겠어요.”
“어?? 마가렛, 그 얘기 알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와! 현실의 신화를 책 속의 세계에서 들으니 느낌이 색다르네.
“맞아. 쉬운 일 아니지. 나도 같이 100일간 정숙해야겠다.”
단군신화처럼 100일간의 기도 의식이 끝나면 어쩌면 로안도 좀 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밝히는 ‘짐승’에서 철든 ‘사람’으로. *** 황제 부부가 내일부터 당장 시작되는 기도 의식을 준비하는 사이에 데몬과 미카일은 황궁의 또 다른 귀빈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이 당분간 미카일이 머물 방이었다.
“이번에도 흔쾌히 와주어서 고마워, 미카일.”
데몬이 아카데미에서 한달음에 황궁으로 와준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게다가 오자마자 그는 자신의 걱정거리 하나를 한 번에 날려주었다. 시원하게. 이것으로 당분간은 엘리제도 밤에 편히 잘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조사를 마치고 대공가로 출발하려던 차였어. 시간이 절묘했네.”
“그래서? 원하던 자료가 그곳에 있던가?”
아카데미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수재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드물지만 마법사도 있었기에 미카일은 동생의 친분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그곳으로 간 것이었다.
“흑마법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했네. 어쩌면 그건 신성국에 자료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정령의 힘에 대해서는 소득이 있었네.”
소득이 있었다는 말에 데몬의 얼굴이 환해졌다. 엘리제의 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일이었으니. 그런데 말을 이어가는 미카일의 얼굴은 반대로 어두워졌다.
‘데몬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데몬은 아직 엘리제를 향한 본인의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미카일이 조사한 내용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아서 데몬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몰랐다.
‘결국, 선택은 데몬 스스로 해야겠지.’
미카일은 데몬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드물기는 하지만 정령의 힘을 가진 사람에 대한 자료가 있다고 했어.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자가 있더군.”
데몬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엘리제 님이 정령의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역시 맞았군.”
“응. 정령의 힘을 갖게 되면서 기억을 잃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성격이 바뀐다고 하니 정확할 거야.”
엘리제와 상황까지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
“응. 문제가 있네. 이렇게 정령의 힘을 갖는 사람들이 치유나 마법 등 특별한 능력을 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있었지만?”
데몬은 어쩐지 자신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 같은 친우의 모습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끝이 좋지 않았나 보군.”
데몬의 말에 미카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이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
“!”
데몬이 생각한 것보다 더 안 좋은 ‘끝’이었다.
“그건…… 어째서이지?”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심장 부근이 아리고 아팠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 때문일까?
“아직 모르겠어. 왜 사람이 정령의 힘을 갖게 된 이후에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인지.”
“혹시 그게 허락되지 않은 힘이어서인가?”
대답이 없었다.
“어떤 경우에 갖게 되는지도 모르는가?”
미카일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네. 내가 얻은 것은 이것이 다였어.”
데몬은 미카일의 얼굴이 어두웠던 까닭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낯빛도 지금 그러할 것이었다. 정령의 힘을 가진 그녀를 곁에 둔다면 대공가에 엄청난 힘을 얻게 되는 일일 것이니, 그녀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곧 그 엄청난 힘을 영원히 잃게 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데몬에게는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오래지 않아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죽음을 막는 방법은 없는가?”
“막는 방법은 모르지만…….”
“!”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미카일은 ‘대부분’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표현했었다.
“……이 세계 어딘가에 정령의 힘을 가지고도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군.”
“맞아.”
살아남은 사람에게 물어봐야 알 내용이었다. 미카일의 대답을 확인한 데몬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 황제 부부가 신성 의식을 올릴 기도실로 선택된 곳은 황궁의 가장 북쪽에 볕이 잘 드는 넓은 방이었다. 그 옆방이 의식을 준비하는 곳으로 지정되었다.
“황후는 왜 고생을 자처하였소. 나 혼자 해도 되는 것을.”
황제 로안과 황후 프시케가 함께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시종들의 손길을 받아 의식에 맞게 단장 중이었다.
“무슨 서운한 말씀이십니까. 저 역시 의식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쁜 마음입니다. 게다가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긴, 황후는 평소 생활에서 크게 금해야 하는 것이 생기지 않아서 좋겠소.”
프시케는 사냥도, 음주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며 첩도 없으니 어려울 것이 정말 없겠다며 로안이 철없는 소리를 했다. 프시케는 대답 대신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역시 자기라도 마음을 다해 기도해야겠다.
“폭발을 일으킬만한 자들을 조사하는 것은 어찌 되었소?”
로안이 걱정스레 물었다. 큰 부상이나 인명피해가 없었으나 같은 폭발사고가 또 일어난다면 큰일이었다. 이번 연회에도 데몬이 없었더라면 분명 피해가 훨씬 컸을 것이었다.
‘데몬에게 황궁에 계속 머물라고 꼭 명해야겠군.’
“폭탄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이나 비용을 가진 자들부터가 거의 없었습니다.”
황궁의 귀족들은 주로 곡물이나 보석 등을 이용한 무역업을 하였고, 마력이 강한 크레미언가가 있어서 폭탄을 이용한 전투가 큰 의미가 없었다. 이번 연회에서 폭탄을 사용한 것 역시 그러했다.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 공포를 조성하고 위협하기 위함이었지 공격이 목적이었다면 폭탄만 준비했을 리가 없다.
‘도대체 누가!’
로안은 다시 한번 머리가 뜨거워지며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의 엘리제에게 주술을 먹이고 이번에는 그녀가 주인공인 연회에서 폭탄을 터뜨려 겁을 준 것일까. 마치 황제가 첩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경고라도 하듯이.
“!”
자연스레 흐른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로안의 온몸에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했다.
‘혹시 엘리제를 가까이하면 안 되나?’
그것이 아니면 엘리제를 가까이 두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인가? 로안이 섬뜩하여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프시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 무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후를. 누구보다도 가장 강력하게 엘리제를 만나지 말라 경고하고 싶을 사람의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