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설마 독초예요?2022.02.03.
평소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인데 지금은 누가 보아도 딱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무척 난감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데? 뭐지? 화났나? 왜?’
엘리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왜 들고 계시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왜 그러시느냐 물으려는데 데몬이 먼저 물어 봐주니 엘리제는 어서 답을 했다.
“아, 이 풀이요? 마음에 들어 했더니 자이드 왕태자님께서 뽑아주셨어요.”
“뽑아주셨다고요?”
그의 미간에 한 줄 더 주름이 더해졌다.
‘자이드가 줬다고? 그것도 직접 뽑아서?’
자이드가 다시 찾아왔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직접 뽑아주었다니 함께 산책이라도 다녀왔다는 말이 아닌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데몬의 안에서 또다시 끓어올랐다.
“아! 조금 전에 같이 황궁 안내를 받았거든요. 둘 다 황궁을 잘 몰라서.”
상황을 이해한 데몬이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자이드도 혹시 무슨 풀인지 몰랐을까?
‘그럴 리가.’
무슨 풀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군과 병사를 통솔하며 산과 들을 야영하다 보면 생존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기에 웬만한 풀과 나무, 약초들에 대해 적지 않은 지식을 쌓게 되니까.
“누가 오해하기 전에 치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요? 설마 독초예요?”
‘얼굴만 잘생긴 왕태자가 알고 보니 첩자였나?’
데몬이 다가와서 풀을 들더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역시.
“비수리라고도 불리는 이 풀의 이름은 야관문입니다.”
‘야관문?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그런데 옆에 있던 마가렛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몰랐습니다. 어서 치워드릴게요.”
쌩하니 바람처럼 나간 마가렛이 서둘러 풀을 버리고 돌아왔다. 뭔데? 무슨 풀이길래 그래?
“약재로도 쓰여 이름은 유명한 풀이나,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통 잘 모를 것입니다.”
“약재요? 그럼 그냥 버리기 아깝잖아요.”
“……저, 엘리제 님.”
마가렛이 엘리제를 말리려는데 데몬이 풀꽃의 정체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을 이었다.
“야관문은 천연 정력제로 유명합니다.”
“!”
엘리제는 그만 얼어버렸다. 얼굴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다!
‘아, 이런.’
풀을 들고 있는 엘리제를 보고 자이드가 깔깔대며 웃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웃은 거였어? 온실 속 그 많은 풀과 꽃 중에 내가 정력제를 골라내서?’
기가 막히네. 날 놀렸겠다?
‘역시! 말과 눈빛이 다른 사람이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한 방 당했잖아!’
풀의 정체를 아는 이들에게 엘리제가 얼마나 주책맞아 보였을까?
‘기억해 두겠다…… 왕태자.’
좀 전에 붉게 변했던 얼굴이 하얗게 바뀌더니 엘리제의 두 눈이 살벌하게 변했다. 그때 갑자기 데몬이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엘리제는 그만 숨을 멈추었다. 감싸 안을 듯이 그녀의 뒷머리로 손을 뻗은 그가 머리카락 사이에 걸려 있던 나뭇잎을 떼어 주었다.
‘키, 키스하려는 줄 알았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정직한 뇌는 바라는 일을 머릿속에 그려버리고 말았다. 머리에 붙은 이파리를 떼는 단순한 동작도 요망하게 해석해버리면서. 하얗게 변했던 얼굴이 다시 순식간에 빨개졌다. 사람의 얼굴색이 이렇게 자주 바뀔 수도 있구나 싶게. 동시에 심장이 눈치도 없이 미친 듯이 뛰었다.
‘끙, 주인 닮아 내 얼굴도, 심장도 주책맞구나.’
*** 시에델의 왕태자 자이드와 보좌관 바튼은 황궁의 귀빈실 중 가장 큰 방에서 묵고 있었다. 바튼은 위험한 황국에서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조르고 있었지만, 그가 모시는 왕태자는 며칠만 더 있자며 버티고 있었다.
‘엘리제 님께 반하신 것이 분명하지만, 황제의 애첩을 무슨 수로.’
헛물만 켜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어서 단념시키고 왕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재미있는 곳을 왜 떠나자 하는 게냐?”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 건데요.
“그래서 낮에 알아보라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자기가 물어놓고 바튼의 대답은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자이드는 황궁 안내를 받기 전에 바튼에게 맡겼던 일에 대해 물었다.
“엘리제 님이 기억을 잃으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사실이었다고? 어쩌다.”
“얼마 전에 갑자기 쓰러진 후로 그리되었다고 합니다. 황궁의 시녀들이 쉬쉬하고는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된 듯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
“예. 그리고 아마 그 때문인지 기억을 잃은 후로는 황제 폐하와의 잠자리도 거부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
“바튼, 그런 이야기를 주워듣다니 능력이 대단하구나!”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어쩐지 자이드가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억지로 엘리제 님을 침실에 데려가는 걸 보았던 이들이 제법 많았던 모양입니다.”
흠, 어쨌든 엘리제가 그렇단 말이지.
“내게 유리하게 일이 돌아가는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의 바튼은 아랑곳없이, 입을 다문 자이드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 온실에서 자신의 한쪽 팔에 순식간에 들어오던 가녀린 품이 떠올라서. 장미 향을 실은 바람이 그에게로 불어 순간 정신이 더욱 아찔했었다. 저도 모르게 엘리제를 잡아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놓치고 싶지 않다.’
강렬한 욕망이 순식간에 자신의 온몸에 퍼져나갔다. 그녀는 너무나 부드럽고 향긋했으며 심지어 달콤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편안함까지 있었다.
‘대체 이 여인은 뭐지?’
이 아름다운 여인은 그동안 자신이 시에델에서 보아온 왕가의 여인들과는 성격도, 생각도 완전히 달랐으며 그것이 무척이나 자이드를 즐겁게 했다. 게다가 특별한 향기와 무엇이 느껴져 더 흥미를 끌었다.
“재밌어.”
빈틈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비수리를 품 안 가득 안고 방으로 돌아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자이드는 다시금 깔깔대며 웃었다. 그 넓은 온실에서 하필 눈에 들어온 풀이 비수리라니. 그것도 능력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그 모습을 보고 바튼이 물었다.
“아아. 역시 욕심이 나는데 말이야.”
“엘리제 님이요?”
바튼도 알고 있다. 온실 입구에서 자이드가 엘리제를 잡아주며 어떤 표정이었는지 다 보았으니까.
“일부러 그러신 거죠? 야관문 말입니다.”
조금 전 바튼의 보고를 들으니 자이드는 온실에서의 상황이 더욱 우습게 느껴졌다.
“너무 재밌지 않느냐? 황제가 그 풀을 보면 뭐라 생각할까?”
“!”
바튼도 자이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날 놀리나? 하시겠죠.”
“그렇겠지! 동침은 거부하면서 방에 천연 정력제를 꽂아놓는 애첩이라니.”
깔깔깔. 자이드는 이제 배를 잡고 웃었다.
“전하, 그러다 엘리제 님께서 전하께서 주신 풀이라고 고하여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나시면 어쩌시려고요.”
“손해 볼 것이 없으니 괜찮다.”
믿는 구석도 있고. 자이드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그나저나 정말 욕심나는구나.”
“못 오르실 나무입니다, 전하.”
바튼의 말에 자이드가 진지해졌다.
“그렇긴 하지.”
그녀는 이미 황제의 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꼭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나무에 오르는 것 말고도 나무를 갖는 방법은 많다. 자이드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지며 휘었다. ***
“황후 폐하, 찾으셨습니까?”
어제 밤샘 회의로 프시케는 점심때가 되어서야 맑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곧바로 자신의 시녀를 불렀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자였다.
“크레미언 대공께 이 서신을 전해라.”
간단히 몇 자를 적은 종이를 접어 시녀에게 전하고, 프시케는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오후에 함께 차 한잔 가능할까요? 황후궁 귀빈실에 있겠습니다.」 프시케는 데몬에게 두 번째 만남을 요청하고 있었다. 물론 만나서 차만 마실 것은 아니었다. 데몬에게 흑마법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고, 로안을 지킬 방법을 함께 상의하자 제안할 생각이었다.
‘데몬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수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침 황궁에 있기도 했고.황제가 황궁이 안전을 되찾을 때까지 그에게 당분간 머물러 달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는 오후가 어서 오길 프시케는 바랐다. *** 황제 로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집무실에 다시 앉았다. 조금 전 데몬이 그의 방에 들러서 신성국의 사제 중 한 명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황궁으로 오고 있다고 보고를 하였다. 아무래도 사제의 도움을 받으면 더 빠르게 흑마법의 흔적을 찾고 황실이 안정을 취할 수 있을 것이었다. 대공의 발 빠른 처사 덕분에 로안은 한시름을 놓았다. 어제의 폭발과 밤샘 회의는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오전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오자 다시 마음이 복잡했다. 조금 전 데몬을 보니 더욱.
‘어제 황후는 어찌하여 대공과 입장한 것인가.’
흑마법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 때문에 어제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던 감정에 대해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자신만의 여인이라 생각한 황후가 다른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으로 입장한 순간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설마, 데몬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해. 하지만 초조해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장 프시케가 곁에 없으니 더욱 불안이 커지고 있었다. 로안이 곁을 지키는 시종장에게 물었다.
“황후는 아직 쉬는 중인가?”
시종장은 잠시 난처한 듯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응접실에서 손님과 차를 마시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손님?”
이런 시국에 황후를 방문할 손님이 누굴까? 그런데 전에도 시종장이 이렇게 뜸을 들이며 대답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어쩐지 나쁜 예감이 들어 로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손님이 누구인가.”
“……크레미언 대공입니다.”
뭐라고? 로안의 푸른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황궁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머물러 달라 한 것이지, 황후와 밀회를 하라고 있어 달라 한 것이 아니었다. 로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그곳으로 가겠다!”
*** 황후의 예상대로 데몬은 그녀의 제안에 응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로안의 근심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지 함께 논의 중이었다. 흑마법을 사용하여 황궁을 위태롭게 하는 자를 도대체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제 어릴 적 친우 중에 신성국의 사제가 있어 도움을 청해놓았습니다. 황제 폐하께도 말씀을 드렸고 지금 이리로 오는 중입니다.”
“!”
프시케는 데몬의 일 처리에 놀랐다. 신성력 쪽으로는 전혀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고민을 터놓을 필요도 없이 이미 그는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역시 데몬은 꼭 필요한 사람이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흑마법을 배타한다. 그러니 어쩌면 자신들의 힘과 정반대에 있는 흑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미 그렇게 해주다니 정말 감사해요, 대공.”
황후가 고마움을 전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더니 화가 난 얼굴의 로안이 들어왔다.
“폐하?”
프시케가 당황하여 일어났다. 로안은 복잡한 제 마음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왜 불안하고 화가 나는 지도. 자신도 왜 그런지 잘 몰랐었는데, 프시케와 데몬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 알 것 같았다. 질투. 명백한 질투였다. 자신의 아내이자 황후인 프시케를 저기 저 악마 같은 대공에게 빼앗기기 싫었다. 게다가 그는 피도 눈물도 없어서, 자신의 엘리제에게 입맞춤하고도 그녀에게 강력한 마력을 사용하여 지독한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자였다.
‘엘리제를 향한 호감이 있다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소중한 엘리제에게 상처 하나 입히기 싫은데 데몬은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데몬이 엘리제에게 마음이 없어 보이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지금 눈앞에서 이번엔 자신의 황후를 꾀어내려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이 상황에 두 사람이 한가하게 차를 나눌 사이요?”
로안이 으르렁댔다.
“폐하. 제가 대공께 흑마법과 관련된 조언을 구하던 중이었습니다. 황국에 흑마법에 대해 깊이 아는 자가 많지 않아서요.”
프시케가 솔직하게 답했지만 로안의 귀에 그 말이 곧이들릴 리 없었다.
“그 말은 황후가 먼저 만남을 청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로안의 얼굴이 더욱 사색이 되었다. 벽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프시케가 데몬에게 흥미가 있는 거였나?
‘안 돼! 프시케에게서 데몬을 떼어놓아야겠다!’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막고 싶었다. 자신의 감정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데몬과 프시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짜증과 화가 솟구쳐 올랐다.
‘엘리제도, 황후도 모두 내 여인이다! 내 것이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제의 자괴감까지 더해져서 로안의 감정이 폭발할 듯 휘몰아쳤다. 바로 그때, 로안의 폭풍을 잠재울 음성이 들렸다.
“폐하, 신성국의 사제께서 곧 황궁에 도착하실 거라는 기별이 왔습니다.”
“신성국의 사제께서?”
그 말에 로안이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사제가 곧 도착한다. 그를 흑마법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줄 신의 제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