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반갑지 않은 손님2022.01.31.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시에델의 왕태자 자이드였다. 그가 자신의 보좌관 바튼과 함께 정중히 인사하며 엘리제의 방으로 들어왔다.
“밤새 별일 없으셨습니까?”
황국에 손님으로 온 사람이 되레 주인처럼 엘리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또 오셨어요?”
데몬인 줄 알고 기대했는데. 퉁명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자이드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어제는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시에델에서 온 왕태자 자이드입니다.”
그가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좀 특이하다 싶었는데 타국에서 온 사람이었다.
“엘리제예요.”
형식적인 인사로 답했다. 자이드가 굽혔던 허리를 펴더니 다정하게 물었다.
“엘리제 님,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연고는 그가 준 것이었지?’
연고를 발라준 사람이 너무 치명적이어서 연고를 빌려줬던 이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다.
“덕분에 상처가 잘 아물고 있어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했던 대답이 들리자, 자이드가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았다.
“도움이 되셨다면 오늘은 제가 엘리제 님의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요.”
그가 엘리제를 바라보며 주특기인 눈웃음을 흘렸다. 엘리제가 동그랗게 토끼 눈을 떴다.
“제 도움이요?”
‘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데? 그리고 황제의 첩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일반적인가?’
갸우뚱하고 있는 사이 자이드가 엘리제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황궁 구경을 시켜주십시오”
‘갑자기 뭐야! 게다가 너무 가까워!’
“제가요?”
엘리제는 슬쩍 몸을 뒤로 빼며 곤란한 듯 물었다.
“두 분 폐하 모두 너무 바쁘셔서요. 미로니카에 당분간 더 머물 생각인데 딱히 아는 사람이 없어서 부탁드립니다.”
그가 얼굴을 들이밀며 능글맞게 웃었다.
‘큽, 잘생겼으니 내가 봐준다.’
당황스러웠지만 그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렇게 잘생긴 왕태자 이야기가 어째서 원작에서는 쏙 빠졌지?’
그녀가 모르는 외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원작의 내용대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어쨌든 눈앞의 미남자가 눈부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황제의 첩인데 이래도 되나 싶어 어쩐지 찝찝했다.
“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조심하라는 황명이 있었어요.”
“본국에 돌아가지 않고 미로니카에 남은 이유는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 말에 자이드 뒤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바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아니라 엘리제 님에게 관심이 있어서겠지요. 티 다 납니다, 전하.’
자이드가 굉장히 무게를 잡고 말했으나 바튼은 속이 훤히 보이는 왕태자의 말에 속으로 혀를 찼다. 황제의 첩 역시 자이드의 속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허락할 리가 없다. 그런데.
“좋아요.”
엥? 당황한 바튼의 눈이 커졌다.
“사실 저도 황궁을 잘 모르거든요. 얼마 전 사고로 기억을 잃어서.”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고?’
자이드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옆의 바튼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왕태자의 뜻을 알아챈 바튼이 잠시 실례하겠다며 자리를 비켰다. 그 사이 엘리제는 몸을 옮겨 자이드에게서 더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그러니 저희 둘 다 다른 이에게 부탁하면 어떨까요?”
엘리제의 의중을 파악한 마가렛이 공손하게 방을 나서며 말했다.
“제가 황궁 시종장께 여쭙고 오겠습니다.”
마가렛과 바튼이 차례로 방을 나서자 엘리제가 자이드에게 차를 권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차라도 하시겠어요?”
그래도 손님인데 계속 세워놓는 것이 예의가 아니다 싶었는데, 좋다고 답한 자이드가 엘리제 맞은편이 아니라 그녀 근처로 다가와 기웃거렸다.
“왜, 왜 그러세요?”
그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스윽 다가왔다. 그의 숨소리가 빠르게 엘리제의 귀를 스쳤다.
‘힉!’
‘어제는 분명히 향기가 났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군.’
“왜 그러시죠??”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진 엘리제가 다시 한번 물었다. 내게 뭐라도 묻었나?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 보았습니다.”
향기 대신 이번엔 하얗고 긴 그녀의 목이 그를 사로잡았다.
‘저 하얀 피부에 자국이 남는다면 어떤 색깔일까?’
문뜩 궁금해지려 할 때 마가렛이 심부름에서 돌아왔다.
“시종장 님이 황후 폐하께 대신 허락을 받아주셨습니다. 황후궁의 시종이 두 분께 황궁을 안내해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래? 역시 너그러우신 황후 폐하!”
엘리제는 황궁 구경을 할 생각에 신이 났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날들의 연속이라 황궁을 제대로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로안을 피하느라 방과 도서관 외엔 가보지도 못했고, 정원 산책도 고작 한 번이 다였다.
‘도망가고 싶은 황궁이지만, 도망을 위해서 황궁의 지리도 잘 알고 있어야 좋지 않을까?’
따로 속내가 있는 엘리제가 기뻐하는 사이에, 역시나 속내가 따로 있는 자이드도 엘리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의 아름다운 눈이 이번에는 야살스럽게 휘었다. ***
“이쪽입니다. 왕태자 전하, 엘리제 님.”
황후궁에서 온 시종은 단정한 차림의 여인이었다. 반듯한 태도와 말투가 예의 바르고 분명했다. 엘리제와 자이드가 나란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자이드 뒤에 바튼이, 엘리제 뒤에는 황제가 붙여준 호위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르고 있었다. 시종은 황궁의 도서관과 집무실 등 황궁의 곳곳을 보여 주며 이제 실외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황궁 건물 끝 쪽에 연결된 온실 차례였다.
‘온실이 있었어?’
엘리제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돔 모양의 온실을 보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정말 예쁘다!”
“훌륭하군요. 저희 시에델에도 이와 같은 온실과 건물이 많습니다.”
마치 한번 와보라는 말투로 자이드가 은근히 자랑했다.
“그래요? 시에델도 참 멋지겠네요.”
시에델에도 가보고 싶다는 대답을 바라고 한 말 같아서 엘리제는 형식적인 말로 답해주었다. 우아한 무늬로 꾸며진 온실 건물을 보며,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사실이 오랜만에 상기되었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흔히 볼 수 없으니까. 투명한 유리 건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총천연색으로 온실이 반짝여 아찔하기까지 했다. 눈이 부셔서 엘리제가 한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려는 찰나였다.
“앗!”
“조심하십시오!”
치렁치렁한 치마와 높은 구두가 온실 입구의 돌들 사이에 끼어서 엘리제의 몸이 휘청했다. 휙! 그녀의 상체가 뒤로 꺾이는 순간, 바로 옆에 있던 자이드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마치 탱고 춤을 추다 동작을 멈춘 것처럼 그녀의 허리부터 다리까지가 자이드와 심히 밀착되었다. 어서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이미 상체가 너무 젖혀져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
‘끙!’
엘리제는 난감했다. 건물에 반사된 빛 때문에 그녀가 발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로안이 붙여준 호위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어서 휘청인 그녀를 잡은 사람이 왕태자가 되었다.
“고, 고마워요. 왕태자님.”
‘이제 좀 세워주시지?’
자이드는 괜찮냐고 물었으나 그녀를 다시 세워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지금 자세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엘리제를 내려다볼 뿐.
‘뭐야, 이 사람?’
방금 날 구해준 것이 아닌가?
“저기 저 힘든데요?”
호위들이 지척으로 다가오자 왕태자는 아쉽다는 듯이 그녀를 당겨서 바로 세워주었다.
“발밑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엘리제 님.”
입으로는 걱정하며 주의하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한 번 더 바라는 듯 기대하는 눈빛과 표정이었다.
‘이 사람 조심해야겠구나.’
말과 눈빛이 다른 사람이다. 엘리제의 본능이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
“어머! 엘리제 님, 이게 다 뭐예요?”
황궁 안내를 받으러 나갔던 엘리제가 품 한가득 꽃이 달린 풀을 안고 돌아오자, 마가렛이 얼른 받아들며 그녀를 마중했다.
“아! 이거?”
마가렛에게 풀 한가득을 전달한 엘리제가 휴우 한숨을 돌렸다.
“자이드 왕태자님이랑 황궁 구경 다니는데 발견했어. 왕태자님이 비수리? 그런 풀이라던데?”
“비수리요?”
개나리처럼 가지에 잎이 달린 풀이었다. 하얀 꽃에 보라색 무늬가 앙증맞게 들어 있어서 퍽 귀엽고 예뻐 보였다. 엘리제가 마음에 들어 했더니 온실 관리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뽑아가도 된다고 했다.
“응. 근데 내가 꽃이 아니라 풀을 좋아해서 웃은 건가?”
“무슨 말씀이세요?”
다발을 뽑아서 들면 마치 빗자루 모양이라 엘리제가 신기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자이드가 재미있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었다.
“내가 꽃이 귀엽고 풀 모양이 신기하다 했더니 왕태자님이 막 웃더라고.”
깔깔대고 웃었던 자이드가 의아했지만, 엘리제는 그가 가득 뽑아준 풀을 받아서 얼떨결에 방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빗자루처럼 생겨서 비수리래. 병에 꽂아놓으면 싱그럽고 좋을 것 같지 않아?”
“이미 처소가 화려하신데요.”
“그러니까. 너무 화려하니 이런 풀이 있으면 오히려 좋을 것 같아.”
마가렛이 들고 있는 비수리 중 일부를 받아서 직접 꽃병에 꽂으려고 손질하였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데몬의 진중한 저음이 들려왔다.
“엘리제 님, 데몬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왓, 오셨어! 보고 싶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들어오시라 대답을 하고 방문 쪽으로 몸을 그대로 돌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검은 제복을 입은 근사한 데몬이 문을 열고 들어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어제부터 기다렸던 사람을 보니 엘리제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설레고 기뻤다.
‘심장이 왜 이러지? 평소에는 도토리만큼 작아서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갑자기 왕밤빵만큼 크게 느껴지잖아?’
이러다 속마음 다 들키겠다 싶어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온 데몬의 잘생긴 미간이 엘리제가 들고 있던 풀을 보고는 확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