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왜 이렇게 화가 나지?2022.01.27.
미로니카 황국에 비상 회의가 열렸다. 황제와 황후, 대공과 대신들이 급히 소집되었다. 대부분이 연회에 참석 중이었으므로 회의는 빠르게 시작되었다. 다행히 그들 중 큰 부상인 사람은 없었고, 연회장에 폭탄을 설치한 자들은 곧 밝혀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일을 자행한 이유도, 배후도 알 수가 없었다. 모두 폭탄을 터트림과 동시에 함께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이토록 잔인하게 황궁을 위험에 빠트리려 하는 것일까. 로안은 잡히지 않는 두려움과 분노로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되는 기분이었다. 황후가 곁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이 정도 규모의 폭탄을 소지할 수 있는 자를 조사해 보겠습니다. 또한, 이 정도의 원한을 가질만한 자도요.”
많은 귀족이 다쳤고, 귀빈들도 경상을 입고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절체절명의 상황이라 모두를 지키라 명할 겨를조차 없었다. 로안은 다시금 절망적인 좌절감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충격으로 부서뜨리려는 게 분명했다.
“황궁으로 들어오는 마차 중에 수상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데몬이 입을 열었다. 지나치게 화려해 보였던 마차들. 그것이 폭탄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수상하여 데몬은 연회장 밖에서부터 주의를 기울였다. 황제 부부의 춤이 시작되는 순간에도 사실 연회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오늘 황궁으로 들어왔던 마차들을 수색해주십시오. 지나치게 화려한 마차 중에 범인들이 타고 왔던 것이 있을 것입니다.”
로안이 당장 황궁 밖에서 대기 중인 마차들을 수색하라 명하였다. 잠시 후, 마차들을 수색하고 온 자가 말했다.
“마차 세 대가 그 자리에 녹아내려 있었습니다.”
“뭐라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차가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 자리의 모든 이가 경악과 의아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데몬이 정적을 깨는 한마디를 던졌다.
“흑마법입니다.”
로안의 얼굴이 거대한 공포와 분노로 일그러졌다. *** 엘리제는 방 안에서 안정을 찾는 중이었다. 연회장에서의 폭발로 황궁이 발칵 뒤집혀 모두 비상이었다. 마가렛이 엘리제의 몸을 씻기고 최대한 따뜻하고 편안한 상태로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따끔.
“아야.”
조금 전까지는 몰랐었는데, 그녀의 발목 위로 미세하게 상처가 나 있었다. 씻을 때 물이 닿으면서 상처가 벌어진 것인지 어느새 송송 피가 솟아올랐다.
“어머나, 엘리제 님! 다치셨잖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
연회장에서는 데몬이 그녀를 보호했으니, 아마 돌아오는 중 어디에서 긁힌 듯했다. 그때 엘리제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데몬이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현장과 관련하여 여쭐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데몬은 황명을 받아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을 살피고 수상한 점을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었다. 엘리제의 발목을 본 그의 붉은 눈이 더욱 붉어졌다.
“다치셨습니까?”
이런, 자신이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나 보다. 수상한 마차를 발견한 후부터 그는 계속 모든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엘리제에게 지켜주겠다 약속한 대로 그녀부터 구해야 했기에, 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그녀 가까이에 있으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치다니.’
“아녜요, 이건 돌아오는 길에 긁혀서…….”
엘리제의 발목 근처로 데몬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잠시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가 따뜻하고 큰 손으로 엘리제의 발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엘리제의 방문을 열고 엷은 금발의 유쾌한 미남자가 들어왔다.
“혹시, 상처 치료 필요한 분 계십니까?”
시에델의 왕태자 자이드였다.
“저희 왕국의 연고가 치유 효과가 매우 높거든요. 황제 폐하께 허락도 받았습니다.”
푸른 약통을 들고,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자이드가 엘리제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엘리제를 만나고 싶어서 약을 들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데몬이 몸을 일으켜 그를 마주 보았다. 자이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데몬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이 자이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응? 어디서 달콤한 장미 향이 나는데요?”
그 순간, 자이드를 향한 데몬의 눈빛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
“어디서 달콤한 장미 향이 나지 않아요?”
연고를 들고 갑자기 나타난 자이드가 생뚱맞게 향기 타령을 하고 있었다.
“장미 향이요? 저는 향수를 사용하지 않는데…….”
엘리제가 당황하여 말을 이었다. 데몬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더니 왕태자의 얼굴에 가서 꽂혔다.
“제가 아는 향기와 매우 흡사해서요. 이건 마치…….”
자이드는 뒷말을 아꼈다.
‘이건 우리 왕국의 비밀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여기서 이 향기가 나지?’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했다. 자이드는 저도 모르게 엘리제의 발목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엇! 피가 나고 있네요?”
그가 성큼 다가서며 상처에 연고를 바르려 하자, 자이드보다 키가 큰 데몬이 그의 앞을 재빠르게 가로막았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엘리제 님을 살피던 중이었습니다. 실례지만 연고는 제게 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발목에 둔 그의 시선조차 거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황제가 엘리제에게 닿는 걸 보아도 신경이 쓰였는데, 지금 보니 자신은 다른 남성이 엘리제에게 시선을 두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저 왕태자가 탐탁지 않아서겠지.’
데몬은 그가 이웃 나라 시에델에서 온 왕태자임을 알고 있었다. 시에델은 본래 주변국과 왕래가 드문 편이었으며 나라만의 마법과 같은 강력한 힘이 그들을 보호하고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의 정체를 아무도 몰랐다. 베일에 싸여 있는 나라에서 온 왕태자는 호기심이 많고 유쾌한 성격으로 보였다. 그런 그가 엘리제에게 관심을 보인다. 사실,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이드가 엘리제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데몬의 심장이 위기감으로 조여들었다.
‘아직 엘리제 님이 가진 정령의 힘이 알려지면 안 된다.’
자이드가 그녀의 향기를 어떻게 맡을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보다, 그녀의 힘을 눈치채는 것을 막는 게 먼저였다. 그녀에게 이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연고를 빼앗아 엘리제의 앞에 데몬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럽게 엘리제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데몬의 모습을 자이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흠, 이름이 엘리제였군. 그리고 역시 내 예상이 맞는 거 같네.’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눈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자, 그럼 상처 치료가 필요하신 분을 찾아 저는 가보겠습니다. 또 뵙지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넉살 좋게 웃으며 자이드가 방을 나갔다.
‘또 뵙자고요?’
누군데요? 누군데 황제의 첩을 또 만나겠다는 거지?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자이드가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갔다. 그 덕에 엘리제만 얼떨결에 데몬의 치료를 받고 긴장과 설렘 속에 놓여 있게 되었다.
‘그가 나를 치료해주다니…….’
방금 그가 자신의 발을 들어 그의 무릎 위에 놓고, 파란색 연고 통을 열어 그 부드럽고 미끄러운 약을 자신의 발목 상처 위에 발랐었다. 천천히 손가락이 닿는 부위마다 뜨겁고 미끄러운 기운이 일어나는 듯했다. 이렇게 그의 보호와 치료를 받고 있자니 다시 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지켜줘도 되느냐고 허락을 받더니, 다음 날 바로 구해주고!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건가?’
데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여전히 나쁜 남자 맞네. 야속하게도 내 심장에.’
엘리제 혼자 속으로 번뇌하는 동안, 데몬은 엘리제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자신이 멀리서는 느끼지 못한 그녀의 향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키스 등의 접촉을 통해 느꼈듯이, 아마 혈액을 통해서도 향기가 느껴지나 보군.’
상처 가까이에 오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피에서도 향기가 나고 있었다. 달콤한 장미 향이. 이것이 자신과 자이드만 느낄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해 봐야 했다.
“방 안에 장미 향이 느껴지십니까?”
야속하신 분이 엘리제에게 물었다.
“장미 향이요? 아까 그분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엘리제가 대답하며 마가렛을 돌아보았다.
“저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데몬이 한편으로는 안심하였다. 아직 다른 사람은 느낄 수 없다. 그렇다면 시에델의 왕태자는 어떻게 그 향기를 맡은 것일까?
‘어쩌면…… 시에델 왕가의 힘과 관계된 것일지도 모르겠군.’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안정을 취하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마가렛을 통해 전해주십시오.”
데몬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서려 했다.
“아…… 네.”
그가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잡을 핑계가 없는 엘리제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히잉…….’
그 모습에 데몬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외출하려는 주인을 보내기 싫어하는 강아지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오겠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언뜻 보인 미소에도 엘리제의 금안이 기쁨으로 커졌다. 진짜요? 언제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물음을 삼키며 엘리제는 속으로 탄성을 지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로안은 데몬의 말을 들은 이후로 패닉 상태였다. 엘리제를 위험에 빠트렸던 그 흑마법이 다시 자신과 황국을 위협하고 있다니! 게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그의 목을 조이는 기분이었다.
“이 정도의 흑마법을 구사하는 자는 제국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데몬의 말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 말은,
“지난번 엘리제 님의 몸을 흑마법으로 지배했던 그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번,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에 실패했었다. 첩자였던 레이나가 자결했고, 엘리제의 흑마법을 데몬이 풀어내면서 흑마법사에 대한 그 어떤 흔적이나 단서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잔인하고 위협적인 자가 이번엔 더욱 공격적인 방법으로 로안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었다.
“어찌하는 게 좋겠나?”
로안이 데몬에게 물었다.
“지금으로는 방도가 없습니다.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우선 엘리제 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혹시 흑마법의 기운이 있는지 제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알았다. 어서 그리해다오.”
로안의 명에 데몬이 황궁에 있는 자들을 살피러 회의장을 나갔다. 그 후 데몬이 엘리제의 방을 제일 먼저 방문했던 것이었다.
“폐하.”
프시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로안에게 다가왔다.
“안색이 너무 좋지 않으십니다.”
“황국이 위험에 처했는데,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니 너무 화가 나오.”
프시케가 안타까워하며 로안의 손을 잡았다.
“흑마법이 맞는지 확인하고, 누구일지 가려내면 됩니다. 공격이 올 때를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맞서 싸우면 될 것입니다.”
로안에게 최대한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할 일을 전했다. 프시케의 말 덕분에 로안은 조금씩 불안에서 벗어나 현실감을 되찾고 있었다.
‘그자가 노리는 것이, 설마 황제 폐하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인가?’
프시케는 생각했다. 실체가 없는 적. 이유를 모르는 공격. 이러한 폭력을 반복적으로 겪으면 누구라도 극한의 공포와 무기력,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가장 강력한 힘.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그 힘이 로안을 저절로 삼키게끔 만드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미 로안은 엘리제가 쓰러진 이후로 비슷한 기분을 계속해서 느껴왔고, 그것을 프시케는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다. 그녀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로안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폐하 곁에서 제가 돕겠습니다.”
로안을 혼자 있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의 짐을 최대한 덜어줘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안을 또 잃어서는 안 돼. 이번엔…….’
프시케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 정신없이 혼란스러웠던 연회 날이 지나고, 어김없이 미로니카 황국에 아침 해가 떠올랐다. 다음 날이 되자 황궁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여전히 황국은 비상이었으나, 연회 날의 그 폭발 이후로는 어떤 움직임이나 변화도 없었고 사람들은 점차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있었다.
‘밤사이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침에 안전히 눈을 떴다는 사실에 엘리제는 안도했다. 다치지 않은 귀족과 귀빈들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고, 황궁에는 급한 일을 처리하기 위한 대신 몇 명과 대공, 그리고 시에델에서 온 왕태자 일행만이 남았다. 엘리제는 어제 놀란 가슴을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달래며 잠들었었다. 다시 오겠다던 데몬은 일이 아직 남았는지 오지 못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데몬 대신 황제가 찾아올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불안과 설렘, 초조함이 뒤섞인 밤을 보낸 엘리제였다.
‘로안이 밤에 찾아오면 어제 결심한 대로 단호하게 의견을 전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는데 말이야.’
황제는 밤샘 회의로 꼼짝을 못 한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로안이 그의 계획대로 어제 연회장에서 엘리제를 황비로 맞이하겠다 선언했다면, 그날 밤 자신을 찾아온 황제를 밀어내기가 사실 가능했을까?
‘휴, 아무래도 진짜 어려웠을 것 같네.’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엘리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제 폭발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대신 그녀가 지난밤 사고를 당할 뻔했으니까.
‘다행이라 하기엔 너무 놀라고 무서웠지만.’
아직도 폭탄이 터지던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커다란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만으로도 혼비백산할 만큼 끔찍했다. 그리고 그때 괜찮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데몬 덕분이었다. 다시 그를 생각하니 심장 근처가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황궁이 안전하지 않으니 최대한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조심해달라는 황명이 있었습니다.”
마가렛이 아침 식사를 준비해서 들어오며 말했다.
“마가렛도 잘 잤어? 그럼 우리는 지난번 황궁 도서관에서 가져왔던 책을 마저 읽으며 방에 있자.”
“알겠습니다, 엘리제 님.”
식사를 마치고 엘리제는 간단하게 치장을 했다. 테이블로 이동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려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혹시 대공 각하신가?? 반가운 마음에 두 눈을 반짝이며 엘리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