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연회가 시작되었다2022.01.20.
엘리제는 욕실에서 나와, 이제 몸단장을 위해 화장대 앞에 앉았다.
“밤 화장은 이따 따로 해드리겠습니다.”
시종의 말에 엘리제는 다시 한번 기겁했다.
“밤 화장은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야만 한다. 오늘도 무슨 수가 있어도 피해야 해. 안 되면 도망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에도 없는 첫날밤은 사양이었다. 물론 진짜 엘리제에게 첫날밤은 이미 예전에 지났겠지만.
‘나에게는 로안과의 밤이 아직이라고!’
엘리제의 단호한 대답을 뒤로한 채 몸단장을 돕던 시종들이 엘리제에게 식사할 시간을 주기 위해 밖으로 물러갔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몇 시간째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녀가 도달한 결론은 정공법이었다.
‘못한다고 직접 말을 해야겠어.’
로안이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을 어쩌겠는가. 왜 하필 황제의 첩에 빙의해서 이 고생인 걸까. 어차피 후회하거나 고민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면승부를 보는 수밖에. 사실 그녀가 지난 이틀 동안, 책들 속에서 찾아낸 방법이 이것이기도 했다. 로안에게서 벗어나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소설 속 많은 여주인공처럼 운명에 맞서 당당해지기로 했다. 게다가 어제 데몬을 만나고 왔더니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오늘 밤에 로안이 찾아온다면 앞으로 신체적 접촉도, 잠자리도 절대 강요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겠어!’
“그리고 지키지 못하시겠다면, 폐하와 헤어지겠어!”
엘리제가 소리를 내 외치는 바람에 곁에 있었던 마가렛이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황제와 헤어지고 싶다고 말하는 애첩이라니 황국 역사상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폐하께 내 의사를 존중해달라 말씀드리려고.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그게 그렇게 뜻처럼 될까. 역사 속 수많은 황제의 처, 첩, 비들이 좋기만 하여 황제 곁에 평생 있었을까. 도망갈 수 없었기에 죽음도 황궁에서 맞이했던 그들이었다. 엘리제는 황명으로 그의 첩이 되었다. 그러니 그녀가 로안과 헤어지겠다고 말하는 것은 황명을 거스르겠다는 뜻이 된다. 황명을 거스르는 것은 죽음으로 다스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죽음을 각오할 만큼 지금 엘리제는 진지했다.
“아 참! 마가렛, 오늘 연회 전에 황후 폐하를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
프시케에게 지난번에 도움을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계속 기회가 없었다. 프시케가 로안을 꼭 잡아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황후 폐하께 가서 조심히 여쭙고 오겠습니다. 오늘은 연회 당일이니 아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도 각자의 방에서 준비 중이실 듯싶어요.”
“응, 부탁해.”
그때 로안의 시종이 엘리제의 방문을 두드리고 말을 전했다.
“엘리제 님, 황제 폐하께서 오늘 파티의 에스코트와 첫 춤을 청하시며 의중을 여쭙고 오라 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춤이 걱정이었는데 로안이 먼저 물어봐 주어서 다행이었다.
“에스코트는 감사히 받고, 첫 춤은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전해드리게.”
이렇게 하면 완곡한 거절로 받아들일 것이다. 에스코트까지 거절하면 분명 토라지겠지? 하지만 먼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어디인가!
‘그나저나 언제 기회가 되면 춤부터 제대로 배워놔야겠다.’
현실 세계에서 온 그녀는 사실 전혀 춤을 출 줄 몰랐다! 하루 속성으로 배웠지만 역부족이었다. 로안이 먼저 의견을 물어서 다행이지, 연회장에서 크게 망신당할 뻔했다.
“엘리제 님, 황후 폐하께 잠시 뵐 수 있는지 여쭙고 오겠습니다.”
마가렛이 엘리제를 두고 방을 나갔다. 혼자 앉은 엘리제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빙의한 이후 자신의 모습을 여유 있게 바라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 역시 정말 아름다웠다.
‘어휴, 이뻐도 너무 이쁘구나.’
빛나는 은빛 머릿결에 금색 눈동자, 하얀 얼굴이라니. 게다가 부드럽고 풍만한 여인의 몸이 만드는 굴곡이 제가 보아도 환상적이었다. 이 비현실적인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에 로안이 제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이해되기도 했다. 후우. 깊게 숨을 몰아쉬며 엘리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곧 연회 때 데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만났던 어제의 순간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다시 떠올려보아도 너무나 그립고 멋진 그였다. 게다가 자신의 마음이 어쩐지 점점 애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내 마음이 닿을 수 있길…….’
감은 두 눈 속에서 엘리제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 연회를 위해 황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마차들이 줄지어 황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차들은 하나같이 크고 호화로웠으며, 그 중 크레미언 대공가의 검고 화려한 마차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어딘가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는 흰색 마차도. 자이드와 바튼도 그 속에 있었다. 미로니카 황국의 황금색이나 흰색 마차들과는 다르게 자이드가 탄 시에델의 마차는 푸른색이었다.
“바튼, 저 마차는 좀 치장이 어울리지 않게 과하지 않나?”
푸른 마차에 탄 자이드가 창밖으로 보이는 마차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마차의 뒷부분이 유난히 크고 화려한 마차였다.
“별걸 다 관심을 가지십니다, 전하.”
“그런가?”
“저 마차의 주인은 마차 뒤를 화려하게 꾸미는 걸 좋아하나 보지요.”
하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아름답지 않은 것은 자꾸 눈에 거슬리는구나.”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본인께서 너무 아름다우신걸요. 아름다운 것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자이드의 마차가 어느덧 연회장이 있는 건물 입구로 다가가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로안은 엘리제의 방문 앞에서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오래지 않아 방문이 열리고 눈부시게 하얀빛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 엘리제는 금사로 수놓은 미색 긴 드레스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빛나는 백금의 장신구들과 온갖 보석, 진주로 치장하여 마치 새하얀 달의 여신과도 같았다. 굵게 땋아 내린 은백색 긴 머리에 하얀빛의 보석들이 촘촘하게 박혀서 그녀를 더욱 현실 이상의 존재로 보이게 했다. 로안은 처음 그녀를 보고 반했던 그날처럼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가, 자신의 여인이었다.
“어서 가자.”
엘리제의 손을 자신의 팔 위에 얹고 연회장으로 향하는 로안의 가슴이 뻐근하게 만족감으로 차올랐다. 그녀를 곁에 둔 것뿐인데,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황제 폐하와 엘리제 님 입장하십니다!”
시종이 큰소리로 외치고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크고 넓은 홀에 모인 많은 귀빈과 귀족들의 이목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어머! 세상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엘리제의 아름다움에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놀랄 뿐이었다. 감탄을 부르는 미모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녀는 진정 독보적으로 아름다웠고, 그것에 이의를 달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맙소사.”
자이드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나보다 아름다운 이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있었다! 그런 이가. 자이드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담긴 황제 옆 여인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주위의 애써 치장하고, 공들여 준비한 사람들을 모두 평균 이하로 만들어버리는 잔인한 아름다움이었다. 그의 옆에 있는 보좌관 바튼 역시 엘리제의 아름다움에 무척 놀랐다. 그는 보자마자 자이드가 한눈에 엘리제에게 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분은 본래 아름다운 것을 무척 사랑하는 왕태자였다. 모두가 엘리제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시종의 두 번째 외침이 들렸다.
“황후 폐하와 크레미언 대공 입장하십니다!”
“뭐라고?”
황후가 누구와 입장한다고?? 로안의 벽안이 충격과 놀람으로 최대로 열렸다. 연회장 입구가 다시 한번 열리고, 드디어 황후 프시케와 데몬이 입장하고 있었다.
*** 황국의 우아하고 지혜로운 황후 프시케는 그녀의 에메랄드 색 눈빛과 같은 색의 우아한 드레스를 입었다. 싱그러운 녹색 보석 빛에, 붉은 머리카락이 어울려 마치 숲을 지키는 여왕처럼 보였다. 전혀 무해한 빛으로 숲의 만물을 굽어살피고 그 위에 군림하는 여왕. 그 옆에 반대로 치명적이고 위협적인 눈빛의 데몬이 서 있었다. 검은색 윤기나는 머리를 빗어 넘겨 그의 잘생기고 반듯한 이마와 콧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검은 제복에는 연회와 어울리게 금색 실로 화려한 무늬들이 수 놓여 있었고, 대대로 대공가에서 받은 훈장들이 장신구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순간, 두 사람의 존재감이 연회장 전체를 압도했다. 두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의 고결하고 고상한 기품이 느껴지는 듯했다.
“세상에 두 분 모두 너무 멋지시네요.”
“하지만 어떻게 황후께서 다른 사람과 입장하실 수가…….”
프시케와 데몬의 등장으로 연회장이 술렁였다. 평소 황제가 그의 애첩과 입장하더라도 황후는 혼자 입장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충격에 휩싸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로안이었다. 그의 눈은 경악과 충격과 배신으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황후가 이럴 수가!’
프시케가 다른 남자의 곁에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애첩을 두었듯이, 황후 역시 첩을 둘 수 있다. 하지만 프시케의 성정상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로안은 확신해왔다. 그녀는 지혜롭고 현명한 미로니카의 황후이니까. 프시케 스스로가 황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으며, 로안은 그녀가 황후로서 흠이 될만한 일을 할 거라 의심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성에 관심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로안은 지나치게 안일했던 것이다. 황후가 잠시 다른 사람에게 한눈판다 한들 별일 있을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게다가 하필이면 왜 데몬 크레미언인가!’
자신이 이 황국에서 유일하게 질투하고 미워하는 자, 소중한 그의 엘리제에게 입맞춤을 한 자가, 이제는 그의 황후와 나란히 선 채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로안은 그 장면을 본 순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황후가 날 버릴 수도 있다!’
이혼을 요구하면 어쩌지? 젊고 현명한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데몬을 선택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생소한 감정이 그의 마음에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어쩌면 그렇게 많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고 섞여 자신을 흔들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동요하고 계시는구나.’
프시케는 로안의 눈빛과 표정을 보고 자신의 쇼가 이미 반은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로안을 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그녀는 보기만 해도 그의 생각이 읽히는 듯했다. 로안과 엘리제 곁으로 다가온 프시케가 축하의 말을 전했다.
“폐하, 엘리제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엘리제 오늘 더욱 아름답구나.”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모두 두 분 폐하의 덕분입니다.”
엘리제와 프시케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 엘리제는 마가렛의 도움으로 프시케를 잠시 만나 고마움을 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미소가 가식 없이 따뜻했다. 데몬은 프시케의 옆에서 말없이 고개 숙여 인사할 뿐이었다.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도 다른 사람 곁에 있는 데몬이라니, 엘리제의 마음 한편이 아리고 저렸다.
“크레미언 대공.”
어쩐지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로안이 데몬을 불렀다.
“나의 엘리제의 회복에 큰 도움을 주어 고맙소.”
로안은 속내와는 다른 인사를 뱉었다. 그녀를 데려가 입맞춤으로 주술을 풀게 한 그가 무척이나 미웠다. 그래서 일부러 ‘나의 엘리제’라 힘주어 말했다.
‘감히 네가 내 것에 손을 대었겠다.’
주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대외적으로도 대공가로 치료하러 다녀온 엘리제가 건강을 되찾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황제로서 대공을 치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감정 없는 형식적인 말투로 데몬이 답했다. 그 모습에 로안의 속이 더 부글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하는 모습이 더 꼴 보기 싫었다.
“연회를 시작하라.”
어쩐지 프시케와 데몬을 노려보는 듯한 눈으로 로안이 연회의 시작을 명했다. 그 말을 기점으로 연회장 한쪽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였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춤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두 로안을 바라볼 뿐, 아무도 춤을 추지 못했다. 황제가 먼저 춤을 추기 시작해야 다른 이들도 춤을 출 수 있다는 황궁의 법도 때문이었다. 엘리제는 로안의 첫 춤을 완곡히 거절한 상태였다. 하지만 질투로 화가 난 로안이 프시케와 데몬 쪽을 슬쩍 보더니 엘리제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엘리제, 첫 춤의 영광을 내게 주겠느냐?”
“네??”
아까 분명히 거절의 메시지를 보낸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제안에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괜찮으시겠어요? 저 춤 기억 안 나요.”
“기억을 잃기 전에도 썩 춤을 잘 추는 편은 아니었다만…….”
“뭐라고요?”
“그러니, 괜찮다는 의미이다.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니.”
‘그거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욕인 거 같은데요.’
엘리제는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분명 제 춤에 자신이 없음을 미리 말씀드렸어요, 폐하.”
“그래, 알았다.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겨라.”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서라도 빨리 황제의 춤 신청을 받아야 할 분위기였지만, 엘리제는 또 다른 이유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황제 폐하, 신발은 단단한 것으로 신고 오셨지요?’
후후후. 엘리제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질문을 떠올리며 로안의 손을 잡았다.
‘오늘 발이 아파서라도 내 방엔 얼씬도 못 하게 해드릴게요.’
깜찍한 계획을 세운 엘리제의 마음은 모르는 채로 로안이 엘리제를 연회장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그가 엘리제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순간, 연회의 음악이 바뀌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밀착되는 춤곡으로.
“앗! 잠, 잠깐요!”
자신의 허리에 감긴 단단한 팔에 엘리제가 당황해하는 사이, 로안이 엘리제를 자신의 품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데몬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 붉은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물들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나의 엘리제. 춤은 내가 리드하면 되니.”
로안이 고개를 내려 바짝 끌어당긴 엘리제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