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첫날밤2022.01.17.
미로니카 황궁의 정원. 숲과 같이 나무가 우거진 곳에 석양이 지고 있었다. 엘리제는 붉게 타오르는 석양보다 더 붉은빛을 내는 데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지켜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공가로 데리고 오겠다고까지.
“미카일에게 들었습니다. 대공가에서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고요.”
“맞아요.”
자신을 대공가로 데리고 가준다면, 그래서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다면 너무나 좋을 것이지만, 그게 가능할까?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서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엘리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데몬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저를 지켜주신다는 것은, 황제 폐하로부터 받으신 임무인가요?”
“아닙니다. 온전한 제 뜻입니다.”
‘데몬의 뜻이라고?’
그는 아무런 사심 없이 한 말일 텐데도 자꾸만 기대되었다.
“그저, 필요하실 때 경호해드리는 거로 생각해주십시오.”
“저를…… 대공께서 왜요?”
“…….”
데몬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짧은 순간이 엘리제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콩닥콩닥 뛰고 울리는 몸의 진동이 자신의 귀까지 들리는 듯했다.
‘황궁에 있는 나를 어떻게, 왜 경호한다는 것일까?’
“당신이 걱정됩니다.”
“제가 걱정된다고요??”
조금 전 자신이 가졌던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까지 바라는 건 아니더라도, 걱정과 관심은 간절했던 참이었다.
“대공가에서 흑마법사로부터 온전히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해주십시오.”
“아…….”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엘리제는 혹여나 데몬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기대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자신은 로안의 곁으로 돌아온 황제의 애첩이었고, 데몬은 그 황제의 명을 받드는 대공이었다. 그러니 잠시간 그의 마음이 동했다 한들 타인의 여인을, 그것도 모시는 황제의 여인을 원하기가 어떻게 쉽겠는가.
‘내가 너무 욕심이 지나쳤구나.’
그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엘리제의 감정 변화가 데몬의 붉은 눈에 고스란히 다 담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지가 모두 들여다보였다. 그녀는 지금 너무나 무방비했다. 데몬 자신이 어떤 생각인지도 모르는 채, 혼자서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뻐하고 이제 단념하여 순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가렛에게 잠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 명해야겠군.’
이렇게 속내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그녀이니 어떤 자들은 이 점을 이용할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또다시 마음이 조여왔다. 얼마 전에도 황궁으로 보낸 그녀가 너무 걱정되어 마음이 먼저 앞섰었다. 그래서 엘리제에게 상의도 없이 마가렛을 그녀에게 보냈다. 황후가 마침 엘리제에게 전담 시녀를 고르게 하는 중이어서 황후궁에 미리 심어 놓았던 세작을 통해 의심받지 않고 그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만약 할 수 있었다면 엘리제에게 먼저 말을 꺼내어 허락을 받고 마가렛을 보냈을 것이었다.
“필요하실 때 제게 도움을 청해주시겠습니까?”
‘지켜주고 싶다. 그래, 내 마음의 정체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그녀를 지켜주고 다시 대공가로 되찾아오고 싶은 마음.
“물론이에요.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그녀의 입에서 기쁨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데몬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데, 하얗고 고운 그녀의 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주 잡으면 자신의 손에 모두 들어오던 손. 자신의 품 안에서 몸부림치며 그를 밀어내기도 하고, 따듯한 요리를 내밀기도 했던 그 손이었다. 그는 엘리제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 대공?”
엘리제가 당황해하며 그를 불렀다.
“부탁을 받아주신 의미로 손등 위 입맞춤 역시 허락받고 싶습니다.”
그가 손을 뻗어 엘리제의 손을 잡았다. 움찔.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엘리제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이 크고 따뜻하고 다정한 손을 얼마나 찾고, 그리워하고 떠올렸는지…… 그는 모르겠지.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리고, 그의 뜨겁고 말캉한 입술이 손등 위를 가볍게 눌렀다. 그녀의 손등에서 달콤한 장미 향이 느껴졌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등 위 입맞춤도, 당신을 지켜도 된다는 것도. 데몬이 엘리제의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석양을 담아 더 붉게 물들었던 두 눈이 이제 완연한 어둠 속에서 강렬한 빛을 내었다.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운 밤이 되었으니 곧 엘리제의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그녀를 찾으러 올 것이었다.
“더 늦기 전에 황궁 내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엘리제가 손을 빼내었다.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나, 혹 필요하실 때는 마가렛을 통해 말씀하십시오.”
데몬이 말을 마치자마자 마가렛이 어두워진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제 님, 이제 가시지요.”
“아, 그래. 그럼 살펴 가세요.”
아직 그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에 촉감이 생생했다. 아쉽지만 엘리제는 마가렛이 이끄는 대로 발길을 돌려 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있어!’
그것이 엘리제에게 힘이 되었다. 돌아가는 두 여인을 데몬이 어두워진 밤의 숲에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같은 시각. 미로니카 황국의 번화가는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중에 귀남자 하나와 시종으로 보이는 자가 상점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후드를 쓰고 있어도 연한 금발에 검은색 눈, 큰 키가 눈에 띄었고 한눈에 보아도 무척 눈부신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사르르 녹일 듯 부드러운 눈빛이 매혹적이었다. 그의 미소를 본 이는 남녀를 막론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남성이지만 크고 시원한 눈이 이국적으로 느껴졌고 빛나는 금발 덕에, 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다 싶을 정도였다.
“어머, 저 남자 진짜 잘생겼다!”
주변 사람들이 정신없이 수군거렸다. 곁에서 남자를 따르던 어두운 복장에 망토를 쓴 남성이 귓속말을 전했다.
“전하, 이목이 너무 집중되었습니다. 장소를 옮기시지요.”
“이런 이런, 한 곳에 잠시도 오래 머물 수가 없구나.”
“잠행이니까요. 그게 싫으시면 당당하게 정체를 밝히시면 됩니다.”
“큼.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네가 날 놀리는구나.”
사이좋은 형제처럼 티격태격하며 두 남자가 사라졌다. 잠시 후 그들은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가 방을 두 개 잡았다. 오늘은 이곳에 머물 작정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남자의 뒤를 따르던 이가 뒤집어썼던 망토를 벗어던졌다.
“전하, 그냥 미로니카 황국에 요청하셔서 황궁에서 지내시면 될 것을요!”
왜 사서 고생이세요? 덩달아 저까지 고생이잖아요? 뒤에 이어질 말이 안 들어도 들리는 듯했다. 투정 부리는 자신의 보좌관 바튼을 돌아보며 자이드가 빙긋 미소 지었다. 미소는 그가 불리하면 사용하는 필살기였다. 물론 자신의 보좌관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지만.
“재밌잖느냐!”
재미없는데요.
“왕국의 태자께서 이웃 나라 번화가의 이런 허름한 여관방에서 묵는다니, 왕후 마마께서 아신다면 노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몰래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냐. 어마마마께서 걱정하시면 아니 되니까.”
미로니카는 최고 통치권자가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시에델은 최고 통치권자를 왕으로 칭했다는 것이 다를 뿐 두 나라는 대등한 독립국이고 군주의 나라였다. 시에델의 왕태자 자이드는 외교적 차원에서 미로니카 황국을 방문하였지만 따분한 궁 생활보다 번화가 나들이를 좋아했다. 미로니카에 또 언제 오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온 김에 마음껏 구경하고 싶었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중심지답게 곳곳이 사람으로 북적였다.
“바튼, 미로니카 황국은 원래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사람들이 활동을 하나?”
“내일 있을 황궁의 연회 때문일 것입니다. 매우 성대하게 열린다고 하니까요.”
“우리처럼 그 연회에 참석하려는 자가 많은가 보군.”
“황제 로안의 애첩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하니 그녀를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 보겠다고 이번에 수도로 올라온 귀족들이 많다고 합니다.”
“흥 아름다워 봤자, 나보다 아름다운 이가 있을 리가.”
자이드의 자화자찬에 옆에서 듣고 있던 바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리 잘나셨어도, 제 입으로 저렇게 자기 자랑하기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자신이 모시는 주군은 입을 여실 때마다 자기애가 넘치는, 평범하지 않은 의미로 대단하신 분이었다.
‘뭐, 틀린 말씀도 아니지.’
자이드도 바튼도, 태어나서 왕태자 자이드보다 아름다운 이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하지만, 곧 그들의 생각을 크게 바꿀 일이 황궁에서 벌어질 것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내일 전하께서도 연회에 참석하셔야 하니, 어서 쉬시지요.”
“그러자.”
내일 연회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생각으로 가득한, 각자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 마침내 연회의 날. 프시케의 기지 덕분에 연회 전 이틀 동안 엘리제는 로안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프시케는 연회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착실히 로안을 불러 계속해서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사이 엘리제 역시 연회 준비로 바빴다. 드레스를 골라 입어보고, 연회에서 필요한 예법과 춤을 간단히 다시 배웠다. 기억을 잃은 그녀를 위한 황제와 황후의 배려였다. 당일 꼭두새벽부터 연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저기 마가렛, 연회는 오늘 밤 아니었어?”
엘리제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준비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마가렛은 봐주지 않고 엘리제를 깨우자마자 욕탕으로 끌고 들어갔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엘리제였지만, 오늘 연회는 그녀를 위해 황제가 열어주는 것이니 엘리제에게 조금도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너무 피곤해. 그냥 세수만 하면 안 될까?”
“안 돼욧!”
야무지게 엘리제를 모두 벗긴 마가렛이 큰 욕조에 그녀를 퐁당 빠트렸다. 그 위로 피부에 좋다는 각종 재료와 향수가 쏟아졌다.
“흐억!”
엘리제는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쏟아지는 꽃잎들과 함께 물속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탕에 몸을 담그니 그래도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곧이어 마가렛과 시종들의 안마가 시작되었다.
“엘리제 님의 피부는 정말 아름다워요! 같은 여인이 보아도 반할 정도네요.”
세 명의 여인이 동시에 그녀의 우윳빛 몸을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어찌나 안마하는 손놀림이 훌륭한지 그녀는 이제 노곤하다 못해 몸이 흐물흐물 녹는 기분이었다.
“역시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으실 만해요.”
“맞아요,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엘리제 님의 방에서 보내시겠지요?”
시종들의 말에 엘리제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악, 안 돼!”
“꺄악!”
엘리제가 갑자기 탕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녀를 안마하던 여인들이 깜짝 놀랐다.
“왜, 왜 그러셔요, 엘리제 님?”
그대로 물이 튀어 홀딱 젖은 마가렛이 물었다. 엘리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탕 속이 너무 안락하고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연회는 그녀를 위해 황제가 준비해준 것이 맞다.
‘게다가 로안이 연회 날에 나를 황비의 자리에 올리겠다고 했었어!’
그러니, 시종들의 말대로 오늘 밤 황제는 엘리제를 찾아올 명분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사랑하는 애첩이 건강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연회 날, 황제가 그 애첩을 황비의 자리에 올렸으니 더 아끼고 보듬어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
‘안 돼!’
여러 번의 위험을 어찌어찌 넘겨왔다. 그러나 오늘도 그것이 가능할까? 첫날밤을 다시 치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엘리제를 하얗게 질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