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녀가 무사하기를2022.01.10.
로안은 프시케를 걱정하며 황후궁으로 달려갔다.
‘제발, 무사해 주오. 황후!’
도착해 보니 다행히 불은 다 꺼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검게 그을린 황후의 방을 본 로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프시케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는 그녀를 불렀다.
“황후!”
옆방에서 프시케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 있습니다, 폐하.”
서둘러 로안이 발걸음을 옮긴 곳에 그녀가 있었다. 프시케는 긴 카우치에 앉아 황궁의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막 치료를 시작하려는 참인지 황궁의의 두 손에 긴 붕대와 프시케의 가느다란 팔목이 들려 있었다.
“다쳤소?”
“살짝 긁힌 것뿐입니다.”
단단한 무엇에 부딪혀 생긴 것처럼 그녀의 손등에 붉게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래도 프시케의 얼굴을 직접 확인한 로안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 무사해서 다행이오.”
그리고 이내 주위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황후의 방에 불이라니!”
황제의 호통에 주변 이들과 황후궁 시녀들이 덜덜 떨었다. 황족이 다치거나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그들을 모시는 시종들과 귀족들은 당연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제 실수였습니다, 폐하.”
프시케가 입을 열었다.
“황후가 실수하였다고?”
“예. 정말 죄송합니다.”
프시케는 어두운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늘 당당하고 현명한 모습을 보여 온 프시케여서, 어쩐지 그 모습이 로안의 마음을 어딘가 불편하게 했다.
“폐하께서 예전에 선물로 주신 촛대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꺼내 보았는데 제가 실수로 떨어뜨려 카펫에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당황하여 바로 끄지 못하고 제법 불길이 번져서 이렇게 소란스러워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로안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만하길 다행이오.”
평소 침착한 황후가 오늘은 어쩌다 그런 실수를 한 것일까. 게다가 자신이 선물로 준 촛대는 무척이나 예전에 전한 것이었다. 황가의 보석들을 가득 박아 화려하게 장식한 은촛대는, 프시케가 황후 방을 사용하게 된 기념으로 로안이 선물한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촛대를 꺼낸 것이오. 위험하게.”
프시케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로안은 엘리제와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못마땅했다. 게다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파투가 나지 않았는가.
‘그게 얼마 만의 기회였는데!’
로안은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가 없는 동안의 기다림과 열 판의 숨바꼭질이 가져온 자극으로 인해 그의 흥분은 최고로 고양된 상태였었다. 그가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키며 투정하자, 프시케의 얼굴이 이번에는 애처롭게 변하였다.
“아마 요 며칠간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어 계속 곁에 두시다 갑자기 혼자가 되니 제법 적적했던 것 같습니다.”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프시케의 말에 로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처하게도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엘리제가 대공가에 가 있는 동안에는 시도 때도 없이 프시케를 찾는 바람에 그녀는 아예 로안의 방에 상주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로안을 달래며 그의 곁을 지켰는데, 엘리제가 돌아오자마자 로안이 프시케를 내팽개친 형상이 되었다. 프시케가 느꼈을 적적함이 로안도 이해가 되었다.
“짐이 미안하오.”
애첩을 향한 욕망이 급해서 황후의 기분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황제가 된 것 같아 면이 서질 않았다.
“그러시다면 오늘은 저와 옛이야기를 좀 나누어주시지요.”
뜨끔. 로안이 그 자리에 화석처럼 굳었다. 프시케가 안녕한 것을 확인한 후에는 서둘러 엘리제에게 돌아가려 했건만. 마침, 프시케의 손목에 붕대 감는 것을 마친 궁의가 입을 열었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폐하. 그러나 오늘 황후 폐하께서 불길에 많이 놀라 심약해지신 상태이니 누군가의 간호가 필요합니다.”
‘안성맞춤이군!’
프시케는 적당한 시기에 결정적인 말을 해준 황궁의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길게 미소 지어주었다.
“다름 아닌 폐하께 오늘 간호를 받는다면 더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그 말에 로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안 된다고 뭐라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외면하여 외로움을 느낀 황후가 실수로 불을 내어 다쳤는데, 그녀를 두고 애첩에게 돌아간다면 황제의 무정함이 온 황궁에 파다하게 퍼질 것이 뻔하였다. 털썩. 로안이 프시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알겠소.”
그 말을 들은 궁의는 안심하며 물러갔다. 황궁의를 따라서 모든 시종이 그 방을 나왔다.
“그럼 두 분 폐하, 편히 쉬십시오.”
그들 모두가 황제와 황후가 이 방에서 밤을 함께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으로 오늘 프시케의 엘리제 구출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 사실 불이 나기 전, 프시케는 오랜만에 생긴 자유시간이 달콤하고 반가워서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고 나온 참이었다. 머리를 말리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데, 마가렛이 달려와 엘리제를 구해달라 애원을 했다. 사정이 딱했다. 기억을 잃은 데다가 흑마법의 주술로 고생을 겪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신까지 당한 상태이니 엘리제의 마음이 아직 추슬러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동안 로안이 얼마나 몸이 달아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프시케였다. 그러니 자신이 찾아가서 말린다고 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강하고 확실한 무엇이 필요했다. 고민하는 프시케의 눈에 구석에 놓인 은촛대가 들어왔다. 그녀는 마가렛을 제외한 모든 이를 물렸다.
“마가렛.”
“예, 황후 폐하.”
“나와 대화가 끝나면 너는 이 방에서 나가서 방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를 기다려라.”
연기라니, 불이라도 내겠다는 말씀인가?
“예? 하오나…….”
“내 걱정은 말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오늘 밤 황제 폐하를 내가 붙잡고 있어 보겠다.”
아마도 로안은 내가 걱정되어 달려오더라도 상황이 정리되면 엘리제에게 다시 돌아가려 하겠지.
“연기가 나기 시작하면 곧장 엘리제 방으로 달려가 기다려라. 황제 폐하가 나오시면 방 안에 혼자 남은 엘리제를 데리고 가능하면 폐하께서 찾지 않으실 곳으로 피해.”
이야기를 들은 마가렛은 깜짝 놀랐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황후의 명이 이어졌다.
“알겠느냐? 어서 나가 보거라. 한시가 급하다.”
“예, 폐하.”
마가렛을 내보낸 프시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았던 은촛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손등으로 촛대를 쳐서 바닥으로 넘어뜨려 버렸다. 보석으로 장식된 촛대가 쓰러지자, 빠른 속도로 바닥의 고급 카펫을 태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프시케가 예고한 대로 황후의 방 문틈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황후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 없느냐!”
“맙소사! 황후 폐하!”
문 앞을 지키던 시종들이 놀라 황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불을 끄기 위해 천을 펄럭이고 있는 프시케가 보였다. 마가렛은 프시케가 명한 대로 엘리제의 방을 향해 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허리에 두른 에이프런이라도 풀어 카펫의 불을 덮고 싶었으나 자신의 역할은 따로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엘리제 님을 구하기 위해 만드신 기회다.’
이를 악물고 마가렛이 엘리제의 방을 향해 달렸다. 곧이어 황후궁의 시종 역시 로안에게 불이 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빠른 속도로 같은 곳을 향해 달렸다. *** 자초지종을 마가렛에게 들은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어느 황후가 애첩의 사정을 봐주고 그녀를 구하겠다고 이런 위험까지 감수할까! 여주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엘리제와 마가렛의 생각에도 황후의 아량이 비범한 것 같았다.
“꼭 감사 인사드려야겠다.”
엘리제의 말에 마가렛도 동의했다.
“예. 저도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그나저나, 우린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 거지?”
엘리제와 마가렛이 황실 서고에 도착한 지도 한참이 지났다.
“아까 슬쩍 듣기로는 황제 폐하께서 오늘 밤새 황후 폐하를 간호하실 것 같았어요. 계시고 싶으신 만큼 계시다가 방으로 돌아가셔도 될 듯합니다.”
반가운 소식에 엘리제는 기운이 났다.
“그래? 그럼 마음 놓고 시작해볼까?”
소매를 걷어붙인 엘리제가 본격적으로 서고 탐방을 시작했다.
“찾았다!”
그녀는 이 세계의 지도와 역사서, 이웃 나라의 전설 등에 관한 책들을 찾는 중이었다.
‘도망가려면 황국을 벗어나는 것이 역시 가장 안전하겠지?’
데몬을 못 보게 되는 것은 싫지만, 아무래도 황제나 황후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생존확률을 높이는 방법일 거라 생각되었다. 이 책 저 책 고르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허리 높이까지 책들이 쌓였다. 그것을 바라보며 엘리제는 씨익 웃었다. 황궁 도서관에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책들이 많았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고대 전설, 이건 마법사와 성기사, 와! 드래곤 이야기도 있네?”
아이들이 읽을 법한 도서를 들고 엘리제가 웃고 있었다. 마가렛은 그녀가 찾는 책들이 모두 그녀의 나이보다 한참 전의 것들이라 안타까웠다.
‘어릴 적에 다 읽어보셨을 텐데…….’
기억이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탓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내가 좋아하는 요정 이야기!”
엘리제가 푸른색 표지에 날개 달린 정령이 그려진 동화책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중간중간 예쁘게 그림도 들어가 있는 게, 딱 마음에 들었다.
‘이거 완전 내 취향이네.’
신이 나서 그 뒤로도 어두운색 표지의 책을 몇 권 더 뽑았다. 쌓아놨던 지도와 책들을 모두 자신의 방으로 옮겨달라 사서에게 부탁하고 마가렛과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 마가렛이 그녀를 위해 달콤한 쿠키와 우유를 들고 왔다. 간식을 먹으며 좋아하는 책들을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도를 펼쳐서 도망갈 나라를 정하고, 살아서 나갈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잠시 기분전환을 하며 이곳이 황궁이라는 것을 잊고 싶었다. 즐거운 이야기들로 머리를 환기하고 나면 생존 설계도 더 잘되지 않을까?
“정령의 힘은 마력의 폭주를 막고……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정령의 이야기라길래 현실 세계의 팅커벨처럼 재미난 동화인 줄 알았는데, 내용이 전혀 기대와 달랐다.
“패스, 다음 책!”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다음 책을 집어 들어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잠 못 드는 밤, 도서관에 그 기사는 왜 갔나?”
엥? 엘리제와 마가렛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앗, 아니 이런 책이 왜 여기…… 하하하.”
“오호호…… 그러게 말이에요, 이상하네요.”
둘 다 당황하여 멋쩍게 웃었다. 엘리제가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백작 부인의 66가지 스킨십.”
“……!”
“밤마다 피어나는 신음의 꽃.”
“저…… 엘리제 님?”
아…… 이건 아무래도……. 연령층 낮은 책만 본다는 마가렛의 걱정은 기우(杞憂)였다. 너무 신이 난 그녀가 저도 모르게 뽑아온 ‘진짜’ 취향 도서는 몽땅 ‘19세 이상 관람 가’였다. *** 어느새 깊은 밤, 미로니카 황국의 황궁이 적막에 싸였다. 책 더미 사이에서 책을 읽다 잠든 엘리제가 있었다. 그녀의 뺨과 이마, 은색 머릿결이 달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어 반짝였다. 잠시 후, ‘달칵’하고 발코니로 향하는 창문이 밖에서부터 열렸다. 기척을 죽인 누군가가 엘리제가 잠든 방 안으로 창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황궁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도 기척도 없는 그가 엘리제에게 다가갔다. 데몬이었다. 그는 그녀가 오늘 겪은 일들을 이미 마가렛에게 전해 듣고 온 참이었다. 대공가에서 마가렛의 전보를 받자마자 이성을 잃고 말을 달려 황궁까지 왔다. 당장 그녀가 무사한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눈앞에 잠든 그녀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새어 나오는 숨을 참고 소리 없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 평화로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향해 저절로 시선이 이어졌다. 자신의 온몸이 눈앞에 잠든 그녀를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구해내라 외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어서 대공가로 데리고 가달라고. 그때, 잠이 가득한 음성이 들렸다.
“음…….”
잠결에 뒤척이며 엘리제가 누군가를 불렀다.
“데……몬…….”
“!”
지금 무얼 들은 것이지? 데몬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그의 붉은 눈이 크게 열려 흔들렸다. 잠든 그녀가 자신을 찾고 있다. 그 부름에 홀리기라도 한 듯 데몬은 천천히 엘리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
어둠 속에서도 강한 붉은빛으로 빛나는 두 눈을 한 그가, 엘리제의 지척에서 고개를 내려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달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그 모습에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향기와 편히 잠든 모습에 이끌려서 저도 모르게 어느새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으니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의 절벽. 그는 그 끝에 매달린 기분이었다. 그가 말없이 잠든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긴 은빛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그 끝에 입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