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거친 숨소리의 진지한 놀이2022.01.06.
엘리제의 애원도 통하지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로안은 엘리제의 손을 잡은 채 그녀를 이끌고 방으로 향할 뿐이었다.
“아무도 들이지 마라.”
탁, 로안의 명이 떨어지고 방문이 닫혔다. 엘리제와 그 둘만이 남았다.
“폐, 폐하…….”
“나의 엘리제.”
욕정 가득한 눈으로 다가오는 로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엘리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저 무시무시한 미남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댔어!’
엘리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폐하, 제 기억이 돌아오게 도와주신다는 거지요?”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물론이지. 내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잘만 하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로안이 넘어와줄 것도 같았다.
“저, 그럼 기억을 되찾기 위해 제가 어릴 적에 좋아하던 놀이를 하고 싶어요.”
움찔. 다가오던 로안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놀이라고?”
순식간에 어두워진 표정과 푸른 눈빛에 엘리제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로안이 갑자기 짐승으로 변해 자신을 덮치면 도망칠 수 없을 것이었다. 완력의 차이가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잘 구슬려야 해.’
“네. 제가 무척 좋아하던 놀인데, 오랜만에 폐하와 해본다면 기억이 돌아올 것만 같아요!”
기억이 돌아올 것만 같다는 엘리제의 말에 로안은 순간 고민이 되었다. 사실 그가 원하는 엘리제의 기억은 어릴 적까지 거슬러 갈 만큼 오래전이 아니었다.
‘나와의 애틋했던 최근의 기억을 되찾고 싶은 것이지.’
하지만 어쨌든 애첩이 이전처럼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좋다. 무슨 놀이인지 말해 보거라.”
“숨바꼭질이에요.”
“숨바꼭질?”
‘허! 요 앙큼한 것 봐라?’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숨어 없어지겠다는 말 아닌가. 로안의 심기가 불편해지려는 차에 엘리제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숨어서 폐하가 절 찾으시길 기다리며 제가 콩닥콩닥 얼마나 설레겠어요. 게다가…….”
‘날 기다리며 두근두근할 거라고?’
콩닥콩닥 설렐 거라는 말에 로안의 벽안이 커지며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게다가?”
“게다가 폐하께서 절 찾으시면 제가 깜짝 놀랄 테니 충격요법도 되지 않겠어요?”
“충격요법이라. 그럴싸하군.”
엘리제의 감언이설에 그가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로안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엘리제는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
됐어! 엘리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궁이 얼마나 넓은데. 그리고 이미 어디로 숨을지 다 생각해 두었다. 바로 황후의 방. 분명히 로안은 프시케의 방이 꺼려질 것이다. 그리고 프시케는 숨겨달라면 얼마든지 숨겨줄 사람이고.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엘리제가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대신, 조건이 있다. 이 방에서는 나갈 수가 없어.”
“네에??”
엘리제의 원대한 도망 계획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 좁은 방에서 숨바꼭질이라니, 나 잡아잡숴 하며 맹수의 우리로 걸어들어온 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방은 너무 좁아서…….”
“그게 싫다면 놀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기억을 찾아주면 되니.”
‘으악! 당신이 생각하는 그 방법이 나쁘다고요!’
그러나 속으로 욕할 뿐. 눈앞의 황제에게 왜 머릿속에 든 것이 음란마귀밖에 없냐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엘리제는 결심했다. 이렇게 된 이상 놀이를 진지하게 할 수밖에.
“그럼, 저도 조건이 있어요!”
“들어보마.”
한껏 관대해진 로안이 대답했다. 한정된 방 안에서 엘리제 찾기쯤이야 어린아이들 장난 수준이니까.
“대신, 술래가 눈을 가리고 찾기로 해요. 그리고 무조건 열 판이요!”
로안이 지칠 때까지 엘리제는 목숨 걸고 숨을 작정이었다. *** 데몬은 황후궁에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엘리제를 위해 열리는 이번 파티 때 제 파트너로 참석해주세요.」 황후가 원하는 것은 명료했다. 황제가 엘리제와 함께 파티에 입장할 것이 분명하니, 황제 대신 데몬이 자신과 입장해 달라는 말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
황후로서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제와 애첩의 사이를 시샘하여 다른 젊은 남자를 찾는 황후로 비칠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프시케의 결정이 대담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녀에게 생각이 있어서 그러겠지만 이렇게 단번에 강수를 둘 줄은 몰랐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이겠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 정도로 자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로안의 마음을 되찾는 일이. 어느 쪽이든 프시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 황제를 그토록 원하는 황후라니. 엘리제를 위한 파티라면 이제 고작 사흘 후였다. 자신은 황후의 부탁으로 참석하여 그 연회장에서 엘리제를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로안의 파트너로, 자신은 황후의 파트너로.
“하아…….”
그저 그녀를 생각만 했을 뿐인데 또다시 심장 근처가 저릿하며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테일러 백작으로부터 정령석을 받은 이후로 더욱 그녀가 자주 생각났다. 그녀의 향기와 함께 목소리도, 손도, 한 품에 들어오던 몸도 자꾸만 가물가물 떠올랐다. 급기야 서류에 자기도 모르게 엘리제의 이름을 끄적이다, 펜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미쳤군.”
‘내가 왜 이러지? 이래서야 마치 누군가에게 푹 빠진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가.’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자리에 일어났다. 방 한구석에 백작이 구해온 푸른 정령석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정령석을 탐내는 자들이 나라 안과 밖에 득실했다. 그런데, 엘리제 그녀가 곧 살아 있는 정령석과 같은 존재인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큰일이군.’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대공가의 가주로써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게다가.
‘그녀도 자신의 힘을 아직 모르는 듯했어.’
아직 그녀조차 눈치채지 못한 그녀의 힘을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톡톡톡, 톡톡톡. 그때 전서구가 데몬의 방 창문을 두드렸다. 발목에 묶인 붉은 색을 보니, 마가렛으로부터 급히 전갈이 왔다.
‘엘리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붉은색 서신은 엘리제에게 좋지 않은 일이나 위급상황이 있을 때만 사용하라고 마가렛에게 명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서신을 열어본 데몬이 침음을 삼켰다.
“급히 황궁에 다녀오겠다.”
그는 곧바로 하임에게만 말을 전하고 대공저를 나서며 바람처럼 말을 달렸다. ***
“헉 헉.”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엘리제의 방을 가득 채웠다. 로안과 엘리제 모두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열 번째 숨바꼭질이 지금 이 순간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휴, 무슨 체력이 저리 좋아!’
눈 가리고 사람 찾기가 어디 쉬운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으면 로안이 자신을 잡기는커녕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을 것이라 여겨서 그녀는 호기롭게 열 판을 외쳤다. 한 판당 10분씩만 버티면 100분이었다. 그 정도면 로안도 지겹고 지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혹시 내가 모르는 남주의 능력이라도 있는 거 아냐? 눈 감아도 보인다든가!’
예상외로 재빠른 로안 덕에 두 사람은 벌써 두 시간 가까이 방 안을 빙빙 돌며 때아닌 운동 중이었다.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어쩜 그렇게 잘 쫓아오는지!
‘눈 가리는 옵션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엘리제는 두 시간 전의 자신을 칭찬했다. 그래도 로안은 점점 지쳐가는 모습이 역력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는 심산으로 엘리제는 처절하게 도망쳤다. 이제 마지막 열 판째였다.
‘그런데 열 판 다 끝나면 그 뒤엔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마지막 판이 끝나기 직전 줄행랑을 쳐야지 생각하던 그때. 덥석! 로안이 그녀의 양 팔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악, 폐하!”
외마디 비명처럼 놀란 엘리제가 로안을 불렀다. 그녀의 몸이 로안의 품 안에 사로 잡혔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로안이 눈가리개를 풀었다. 그런데 그의 푸른 눈빛이 놀이를 시작하기 전보다도 더 욕정으로 끓고 있었다.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로안과 눈이 마주친 엘리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로안을 지치게 만들려고 했던 놀이가 되레 그에게는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붉은 얼굴과 입술이 땀으로 반짝이며 평소보다 더 선정적으로 보였다. 땀에 젖은 자신의 머리를 로안이 쓸어 넘겼다. 그 모습에 거친 파도에 삼켜지고 부서지는 금빛 해변이 연상되었다. 그녀의 몸이 해변처럼 그의 눈빛에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하……. 내가 승리했구나.”
열 판의 숨바꼭질을 하자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가 들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에. 이기고 난 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맘껏 그녀를 품에 안아도 늦지 않을 것이니까.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눈을 가리고 엘리제를 찾는 일이 그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그녀가 내는 숨소리와 그녀의 향기를 따라 어둠 속을 쫓았다. 두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로안은 놀이를 충분히 즐겼다. 오랜만에 그녀를 향한 정복욕이 한껏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놀이의 승리자에게 이제 상을 내릴 시간이다, 엘리제.”
“상, 상이요?”
‘맙소사!’
예상치 못한 놀이의 결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로안은 그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흐트러져 그녀의 고운 얼굴과 부드러운 몸을 가리고 있었다.
“원하던 놀이도 하였으니 기억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면 좋겠구나.”
로안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안 돼!’
그의 품에 갇힌 채 얼굴까지 붙잡힌 탓에 엘리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만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다. 엘리제의 입술을 향해 로안이 자신의 입술을 내리누르려는 순간. 탕탕탕! 엘리제의 방문이 세게 두드려졌다. 로안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방해한 자가 누구든 간에 가만두지 않으리라.
“감히……. 내가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폐하, 큰일 났습니다!”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의 방에 불이 났습니다!”
“뭐라??”
로안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 조금 전, 황후와 데몬은 각각 마가렛으로부터 비슷한 내용을 전달받았다. 엘리제의 방 안에서 로안과 엘리제가 열 판의 숨바꼭질 중인 것을 알 리가 없는 마가렛 입장에서는 방 밖에서 그저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대공가로부터 받은 임무 중에는 엘리제의 안위를 챙기는 것과 더불어 엘리제가 로안을 거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있었다. 그런데 엘리제가 방금 로안에게 억지로 끌려 들어갔으며, 황제가 엘리제에게 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했다. 우려하는 일이 방 안에서 일어나면 어쩌나 마가렛은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다가 황후궁을 향해 달려갔다.
“황제 폐하께서 엘리제 님을 억지로 끌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엘리제 님께서는 아직 온전하게 안정을 찾지 못하신 상태입니다. 부디 저희 엘리제 님을 도와주세요!”
마가렛은 황후의 방 앞에 엎드려 사정하였다. 데몬에게도 연락을 보내긴 했으나, 대공가에서 황궁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그가 황제의 첩과 황제 사이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데몬에게는 구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보고 형식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황후라면 사정이 다르다. 황후는 황궁 안에 있으며 지금 로안에게서 엘리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마가렛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황후의 방 앞에 엎드렸다. 그 결과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방문을 벌컥 열고 로안이 황후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놀란 로안이 다급하게 황후궁으로 달려가면서, 그의 품에 억압되어 있었던 엘리제도 자유를 찾았다. 엘리제에게는 프시케가 은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불이 났다니 엘리제도 프시케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여주니까 별일이야 없겠지만……. 괜찮으셔야 할 텐데.’
걱정하는 엘리제 곁으로 마가렛이 서둘러 다가와서 그녀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해요. 황후 폐하께서 명하신 일이에요.”
“황후 폐하께서? 불이 났다는데, 괜찮으셔?”
“그럼요! 무사하십니다. 자, 일단 어서 황궁 도서관으로 함께 가셔요.”
“어, 그래! 알았어.”
본래 로안에게 붙잡히기 전에 도서관에 가려고 했었으니 엘리제에게도 자신의 방을 벗어나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래도 대피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프시케인 것 같아서 걱정이 앞서는데 마가렛이 엘리제에게 귓속말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했다.
“황후 폐하께서 직접 방에 불을 붙이셨어요.”
“뭐라고?!”
엘리제가 놀라서 멍한 표정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마가렛은 엘리제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도서관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