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2022.01.03.
“폐하, 제가 황비라니요! 그러지 말아 주세요.”
“왜 그러는 것이냐, 엘리제.”
엘리제는 로안에게 애원하는 중이었다. 데몬이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자신은 죽을 운명의 조연 엘리제였다. 황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첩의 자리도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나더러 황비가 되라니.’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 황국의 존귀한 여인은 오직 황후 한 명이다. 하지만 후(后) 다음으로 비(妃), 아래로 빈(嬪)을 둘 수 있었다. 절륜하고 강한 황제일수록 많은 부인과 자식을 두어 그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단계를 두어 그들 사이의 위계를 통해 황권을 공고히 했다. 더 많은 부인을 두기 위해 품계를 마련했지만 황후나, 황비나 결국 모두 ‘부인’이었다. 그러니, 엘리제를 황비로 들이겠다는 것은, 그녀를 단순한 애첩에 그치지 않고 귀족들보다 귀하고 오직 존귀한 황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였다.
“제발 뜻을 거두어 주세요.”
엘리제는 계속해서 로안에게 부탁하였다.
“왜 그러는 것이냐, 도대체 무엇이 싫은 게야.”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널 지킬 수 없는 내가 참을 수 없이 저주스러웠어!
“이제라도 널 지키기 위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네게 더 강한 권력을 주려는 내 마음을 왜 모르는 것이냐.”
“하지만, 저는 권력이 필요 없고, 제게는 그럴만한 가치도 없어요. 제발…….”
“그만! 너는 내 여인이다. 네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아, 어떻게 해…….’
로안이 엘리제의 사정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황비가 되어 황궁에 더 깊이 발목 잡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엘리제는 다른 사람이 이미 마음에 꽉 들어차 있어서 로안의 호의도, 애정도, 바람과 기대, 그 무엇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다. 데몬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벅찼다. 하루하루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눈앞에는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구애하며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주려 하고 있었다. 그게 그녀에게는 권력과 힘이 아니라, 자신을 옭아매는 목줄로 느껴졌다. 황비로의 승격은 로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그녀를 구속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폐하, 제발 명을 거두어…….”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났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달려가지도, 마음을 고백해 보지도 못하는 제 신세가 갑자기 너무나 처량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데, 그들은 삶을 도대체 어떻게 이어간 것일까. 엘리제가 눈물을 흘리자, 로안의 눈이 놀람과 서운함으로 물들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짐의 비가 되기 싫다는 것이냐.”
‘내 너를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고, 또 기다리고 있는데! 네가 감히!’
나를 밀어내려 하는 것이냐. 로안의 벽안이 분노로 어둡게 내려앉았다. 오기가 생겼다. 싫다니, 더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고, 두 번 다시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선포했다.
“그날, 너를 나의 비로 봉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녀에게 잠시 미움을 받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라 말을 뱉고 로안은 차갑게 돌아서서 엘리제의 방을 나가버렸다.
“엘리제 님…….”
마가렛이 다가왔다.
“흐윽, 흐어엉.”
엘리제는 그녀의 품에서 참았던 울음을 쏟아냈다.
*** 황후궁 프시케의 방. 그녀는 엘리제를 위해 열리는 파티에 필요한 사항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목록을 훑어본 프시케가 황궁의 시종장에게 서류를 전하며 당부하였다.
“폐하께서 성대하게 준비하라 하셨으니, 만전을 기해야 하네. 본국을 방문 중에 있는 이웃나라 귀빈들도 참석할 예정이니 더욱 신경 써주게.”
“예, 폐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시종장이 허리를 굽히며 나가자, 이번엔 황후궁의 시녀가 와서 서신을 전하였다.
“황후 폐하, 크레미언 대공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프시케가 기다리던 답변이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서신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였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예상대로 데몬은 승낙의 답을 보내왔다. 세 가지 조건과 함께.
‘조건?’
하나, 만남을 가질 뿐 그 외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 것. 둘, 원하는 때에 그만 둘 수 있을 것. 셋, 매점매석의 정보를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는지 설명해 줄 것. 만나줄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의 어떤 요구에도 응하지 않겠다니, 실제로 만나는 사이처럼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언제든 대공이 원할 때 이 연극을 그만 둘 수 있는 입장에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황후에게 휘둘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차차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약속한 그 정보도 넘겨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데몬은 황후의 제안을 수락하되, 하나도 손해 보지 않을 심산이었다.
‘훗, 역시 데몬 크레미언. 그답군.’
프시케는 그의 답변이 흡족하였다. 이유가 없는 호의는 받지도 않겠고, 황제를 두고 하는 암투에 끼어들 마음도 없다는 그의 뜻이 오히려 그녀를 기껍게 만들었다.
‘여전히 참 확실한 성격이야.’
프시케는 바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기꺼이요. 보내주신 세 가지 조건 모두 받아들이죠. 그럼 바로 첫 번째 만남을 원합니다. 엘리제를 위해 열리는 이번 파티 때…….」 프시케는 잠시 멈추었다가 뒤에 이어질 말을 마저 적었다. 「제 파트너로 참석해주세요.」
“지금 바로 대공에게 전하라.”
그녀의 서신을 받은 자가 지체 없이 대공저로 향했다. 프시케의 쇼 타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엘리제는 정신없이 울고 나서 마가렛이 타준 차를 홀짝였다. 따뜻하고 향긋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 몸을 데우니 점점 마음이 진정되었다. 카우치에 앉아 엘리제는 나름 마음을 단단히 다지는 중이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셔요?”
“응. 훨씬 나아. 고마워 마가렛.”
하도 울어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마가렛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어쩜 엘리제 님께서는 이렇게 우시는 모습까지 아름다우셔요?”
“으응?”
“이러시니,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성을 내시면서까지 황비로 맞이하고 싶어 하시죠.”
마가렛이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하듯 말했다.
“그건 그래.”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엘리제였다.
“네?”
“아니, 진짜 너무 예뻐서 문제야.”
너무 예뻐서 죽게 생겼잖아. 로안에게서 벗어나야 하는데 오히려 더 발목 잡혔어.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하하, 엘리제 님?”
갑자기 씩씩해진 그녀의 모습에 마가렛은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녀가 기운을 내는 모습이 다행이다 싶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엘리제 님께서 대공가에 계실 때 황궁이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요. 황제 폐하께서 잠도 안 주무시고, 닥치는 대로 부수시고, 살아 있는 것들을 마구 사냥하셨거든요.”
“진짜? 그 정도셨어?”
‘아! 그래서 프시케가 내게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거였구나!’
그 인사가 진심이었던 이유가 있었다. 엘리제가 잠시 곁에 없다고 폭군으로 돌변한 로안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강한 집착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엘리제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 찾아야 해! 내 생존 루트! 그리고…….’
데몬에게 고백이라도 해보자. 엘리제는 속으로 혼자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마가렛이 그 모습에 또 미소 지었다.
“기분 전환으로 산책이라도 하시겠어요?”
“응, 좋아. 오늘은 나와 함께 황실 도서관에 좀 가보자.”
“도서관이요?”
“찾아볼 것이 있어서.”
엘리제는 본격적으로 황궁을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황후 프시케>의 줄거리를 최대한 떠올려서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정보들이 필요해!’
최대한 황궁으로부터 멀리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이 세계에 대한 정보들이 필요했다.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군을 만드는 일도 차근차근 해나가야 했다. 아, 나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앞길이 막막했다. *** 로안은 자신의 집무실을 거쳐 방으로 돌아왔다.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엘리제가 울면서 황비 자리를 물러 달라 요청했던 것이 서운하다 못해 괘씸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이 기억을 잃고 나서부터야.’
로안은 엘리제가 쓰러진 날을 회상했다. 처음에야 토끼처럼 놀라며 자신을 밀어내는 그 모습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기껏해야 자신의 품을 두 손으로 밀어냈을 뿐이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완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술이 풀렸어도 엘리제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주술을 풀고 돌아온 이후로 더욱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기억이 없고 심약한 상태라 한들, 자신을 자꾸 밀어내는 것이 얄밉고 야속했다. 엘리제가 그럴수록 자신의 마음에 부채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밀어낼수록 자꾸만 억지로라도 끌어당기고 싶었다. 게다가 지금의 엘리제는 자신을 밀어내는 것 이상으로, 마음으로부터 거부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인가…….”
그녀를 품에 안은 지가 한참 전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항상 함께였고 밤마다 품에 엘리제를 안아왔으니, 그걸 못하는 지금 그녀를 더 원하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눈빛.
‘눈빛으로도 나를 원하지 않아.’
로안은 그녀의 눈빛이 그리웠다. 예전 그녀의 눈을 바라볼 때는 그녀가 자신을 원하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었다. 주변의 시선도, 황후의 근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갈망하였으며, 더 많은 사랑을 요구하며 유혹해왔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자신을 거부하고 있었다. 배신감마저 들었다.
“기억을 찾게 해서 엘리제를 되돌려야 해.”
그러면 자신을 예전처럼 원하고, 욕심낼 것이다. 자신이 준비한 황비의 자리에 거부가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겠지. 그럼 예전처럼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뜨거운 입술로 삼켜버리면 그만이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빠듯하게 충족되어 왔다.
‘그래, 황궁의가 말한 방법으로 그녀를 되찾아야겠다.’
“당장, 엘리제의 방으로 가겠다.”
“모시겠습니다.”
다녀온 지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로안이 다시 엘리제의 방을 향해 나섰다. 시종들이 뒤를 따랐다.
“엘리제 님께서 시녀와 서재로 향하셨습니다.”
“서재라고?”
엘리제의 방 앞을 지키고 선 이가 말했다.
‘그녀가 서책을 좋아했던가?’
의아했지만, 로안은 발걸음을 도서관 쪽으로 돌렸다. 황궁 도서관 근처에 이르자 입구를 통해 들어가려는 엘리제와 시녀가 보였다.
“엘리제!”
“폐, 폐하?”
“여기서 무얼 하느냐?”
엘리제는 크게 당황했다. 로안에게서 도망칠 궁리를 하러 도서관을 찾았는데, 그가 자신을 만나러 도서관으로 오다니 도둑질을 하려다 현장에서 잡힌 기분이었다.
“마음이 울적하여 책이라도 볼까 했어요.”
“나와 함께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예? 지금요?”
“그래. 지금 당장.”
로안의 벽안이 무시무시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엘리제 네 기억을 되찾아주고 싶구나.”
“저,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기억을 찾기 위해서는 익숙했던 일과 장소, 사람을 자주 접해야 한다고 했다. 주술도 풀렸으니 이제 기억을 되찾을 차례다.”
아니, 정말 기억을 잃기 전 엘리제는 황제와 항상 침대에서 꽁냥꽁냥만 했단 말인가? 원작 속 진짜 엘리제만이 알 일이었다.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로안이 하는 말에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폐, 폐하. 그래도 잠시만요!”
엘리제의 외침에도 로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두 손이 잡힌 채 거의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지켜보던 마가렛도 함께 사색이 되었다.
‘으악!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 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