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주술의 대가2021.12.23.
대공가의 별채에는 비상시를 대비한 감옥들이 있었다. 레이나는 그중 하나에 갇혀 있었다. 데몬은 직접 그녀에게 자백을 받을 생각이었다. 엘리제와 관련된 일은 모두 제 손으로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리고 엘리제에게 죽음과도 같은 주술을 먹여놓고 태연하게 친구 행세를 한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친구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미카일이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다. 데몬이 승낙했다. 끼이익, 낡은 철문이 열리고 데몬이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레이나의 사지가 감옥 벽면에 고정된 수갑으로 채워져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결박되어 있었다.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는 그녀에게 데몬이 다가갔다.
“주술의 대가가 무엇인지 말해.”
이미 황궁에서부터 레이나가 첩자이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음식에 주술을 담아 엘리제에게 경계 없이 먹일 수 있는 자, 밤이든 낮이든 주술이 발동될 때마다 엘리제의 근처에 있던 자, 그리고 오늘 몸을 회복한 엘리제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넣은 요리를 준비한 자 모두 레이나였다. 로안이 보낸 전갈도 이틀 전 도착해 있었다. 엘리제의 시녀 레이나가 첩자이니 당장 체포하라고. 데몬은 확실한 증거를 기다렸다. 레이나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감시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나가 걸려들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엘리제의 주술을 완전히 풀 수 있는 열쇠, 주술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주술의 대가를 말하는 것이 좋을 거야.”
고문이라도 해서 알아낼 참이었다. 레이나를 고문이 가능한 이 감옥에 가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데몬과 미카일, 그리고 감옥 안의 모두를 놀라게 하는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영혼이요.”
‘이렇게 쉽게, 대가(代價)를 알려준다고?’
데몬의 붉은 눈이 더 붉은빛을 내며 가늘어졌고, 곁에 선 미카일의 두 눈은 경악으로 열렸다. 두 사람 다 같은 생각이었다.
‘주술을 풀 수 없을 거라 확신하는 거군.’
처음 주술의 형태를 알아챘을 때도 죽음을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단순한 주술이 아닌 흑마법의 힘까지 사용하면서 영혼도 대가로 필요해진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를 죽여 주술을 시작하였고, 다른 영혼도 하나 집어 삼켜 주술을 완성했다. 그러니 풀 때도 누군가 하나가 죽고, 또 다른 영혼 하나가 주술에 삼켜져야만 했다. 만드는 데도 두 명이, 풀 때도 두 명이 희생되는 셈이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당신은 절대 주술을 풀 수도, 그분을 찾을 수도 없을 겁니다.”
예상하던 답이 나왔다. 자백을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제 배후의 인물을 실토하도록 할 차례다. 그전에 레이나의 정신이 온전할 때 확인할 것이 하나 있었다.
“왜 엘리제 음식에 약을 탄 거지? 재워서 무슨 짓을 하려고?”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몸만 빼돌리려고 한 것일 거다. 그렇다면 주술의 주인인 흑마법사가 데몬이 가한 공격에 큰 내상을 입었음을 의미했다. 주술의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엘리제를 납치하기 위해 그녀를 깊은 잠에 빠트리려 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때 레이나가 큭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과 얼굴에 가엽게도 열등감에서 비롯한 광기가 가득했다.
‘이런!’
“멈춰!”
그 눈빛을 본 데몬이 외치며 레이나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이런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목표로 했던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이가, 종국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 끔찍한 좌절감을 되레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없애버리려는 눈빛. 레이나는 자결하려 하고 있었다.
“……늦었어.”
레이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거품이 일었다.
“엘리제는…… 반드시 죽게 될…… 거다.”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레이나의 몸이 쇠사슬 아래로 축 늘어졌다. 여전히 그녀의 입이 웃고 있었다.
*** 사제인 미카일이 레이나의 열린 동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성호를 그린 후 기도하며 말했다.
“그녀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네.”
그 말에 데몬의 두 눈이 늘어진 레이나의 주검을 바라보며 한층 더 붉어졌다. 흑마법에 손을 댄 대가로 레이나의 영혼이 곧바로 소멸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열등감에 치여 스스로를 죽음의 절벽으로 밀어버린 자의 최후였다.
“놀랍지만 레이나의 육신이 주술에게 선택되었군.”
주술의 주인인 흑마법사를 숨기기 위해, 레이나는 자신의 입을 영원히 막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그녀의 죽음이 엘리제의 주술을 푸는 대가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영혼. 여기, ‘하나의 죽음’이 충족되었다. 주술의 선택이었다. 이제 남은 조건인 또 다른 ‘하나의 영혼’이 있어야 엘리제의 주술을 완전히 풀 수 있었다.
‘주술이 누구의 영혼을 원할 것인가?’
주술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영혼이 누구의 것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아…… 이번엔 나 진짜 죽은 건가?’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기가 무서웠다. 온몸을 옥죄던 껍질을 벗은 듯 자유로운 기분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이대로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내가 이번엔 진짜 죽었을까 봐. 그래서 다시는 데몬을 보지 못할까 봐. 그런데 갑자기 정반대로 구토감이 몰려왔다. 몸이 이토록 가볍게 느껴지는데 마치 이것만이 이질적이게 담겨 있었다는 듯, 배 속에서부터 무엇인가가 빠르게 올라오며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체가 순식간에 일으켜지더니 내 입을 통해 무언가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울컥!
“웩!”
“엘, 엘리제님!”
바닥에 진한 붉은색 액체가 쏟아져 있었다. 내가 뱉어낸 것이었다.
“하…… 아…….”
“괜찮으십니까?”
잠들었던 내가 갑자기 토하며 일어나자 제레미와 하임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보이자 나는 진심으로 안도하였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
“아, 괜찮아요. 속이 갑자기 울렁거려서. 바닥이 더러워져서 어쩌죠……?”
그런 건 걱정 말라며 제레미가 나에게 손수건을 가져다주었다. 하임이 사용인을 시켜 바닥에 쏟아진 것을 치우게 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데몬과 미카일이 들어왔다. 나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무나 그리운 데몬이 방문을 넘어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눈만 감았다 뜨면 마치 한참을 못 본 것 마냥 보고 싶고, 그리웠다.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며칠 전만 해도 내 마음이 이렇게 애틋해질 거라 상상도 못 했는데…….
“일어나셨습니까? 더 주무시지 않고요.”
“방금 전에 깼어요.”
데몬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묻는 것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 남자의 관심과 걱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아, 나 티 다 날 텐데. 어쩌지? 내가 데몬 좋아하는 거 온 동네 소문 다 나겠네.
“엘리제님께서 속이 불편하셨는지 방금 구토와 함께 일어나셨습니다.”
제레미가 내게 따뜻한 물을 건네며 상황을 설명하였다.
“뭐라고?”
데몬이 놀라 내게 가까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앗!’
순간 입 밖으로 소리를 낼 뻔했다. 그저 이마에 손을 올려주는 것뿐인데도 따뜻하고 큰 손이 닿자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큰일이다, 나 중증인 거 같아.
“열은 없으신데…….”
“체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붉은색 액체만 제법 쏟아내셨습니다.”
“붉은색 액체라고?”
“예, 마치 와인 같은 색이었습니다.”
데몬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러나?”
미카일이 묻자 뒤에 있던 하임이 대신 대답했다.
“대공가에 오신 후로 엘리제님께서 드신 음료 중에 붉은색은 없을 텐데요. 와인은 더더욱.”
응? 나는 이 소설 속에 빙의한 이후 와인은 못 마셔봤는데?
“황궁에서도 와인을 마신 기억이 없는데요? 제가 기억을 잃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때는 빙의하기 전이니까. 내가 대답하자 데몬이 물었다.
“다른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네, 오히려 몸은 무척 가벼워요. 기분도 좋은 것 같고요.”
그 말에 미카일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다행입니다. 엘리제님께서는 신성력과의 상성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치유의 효과가 매우 빠르신 편입니다.”
아! 지금 몸이 이렇게 가볍고 홀가분한 것이 신성력의 힘 덕분이었나? 그때 데몬이 무언가 결심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긴장이 아니라 설렘이었다.
‘아, 이 표정 너무 좋아.’
그 와중에도 나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멋지고 잘생겨서 그만 넋을 놓게 되었다.
“엘리제님.”
“아, 네!”
“언젠가는 아시게 될 일이고, 지금 아셔야 하는 이유도 있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 무엇을요? 그의 말에 짐짓 두려움이 일었다.
“엘리제님께 주술을 먹인 첩자를 잡았습니다.”
“네? 정말요?”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반가운 소식에 두 손을 모았다.
“그럼, 저 이제 주술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그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다니, 생각만으로도 기뻐서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아! 잠, 잠깐. 안 돼! 주술이 풀리면…….’
나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그런데, 안타깝게도 주술을 푸는 대가를 하나밖에 충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주술이 풀리면 데몬과 떨어지게 되고, 주술에 걸려 있으면 죽음의 고통이 계속될 것이니 나에게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나는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데몬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레이나가 첩자였습니다.”
***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런 거야, 레이나……. 이곳에 와서 그래도 레이나를 믿고 의지했는데.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는 주술의 주인을 찾을 방도가 없습니다.”
아, 결국은 주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가? 레이나가 답을 말해주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니, 진범을 아는 이가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마법사는 계속해서 나를 지배할 것이었다.
‘이거구나. 이게 레이나가 바라던 일이었어!’
동시에 주술의 주인이 바라는 일이기도 할 테지. 영원히 그에게서 내가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갑자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머리가 아프고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죄송하지만 잠시 일어날게요. 속이 좀 불편해서…….”
머리가 빙글 돌고 토할 것 같았다. 내가 일어나자 데몬이 옆에서 부축했다.
“웁!”
울컥! 비틀거리며 무언가를 한차례 더 토해냈다. 데몬과 미카일이 얼른 나를 양쪽에서 잡아주었다. 붉은색 물이 바닥 위로 쏟아졌다. 그 물 위로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황과 경악으로 내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게 뭐야?”
그 순간, 내 몸이 아까보다도 더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바람이라도 불 듯 몸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내 몸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당황과 경악으로 내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뭐죠? 무슨 일이…….”
갑자기 내 손과 팔 등에서 빛이 나자 당황스러웠다. 방 안 모두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미카일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데몬이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주술이…… 풀렸습니다.”
“뭐……라구요?”
풀렸다니, 무슨 말이지? 아직 주술의 대가인 ‘하나의 영혼’이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
‘잠깐만.’
순식간에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 몸에서 나던 빛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주술의 대가는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영혼. 하나의 죽음은 레이나였다. 그럼 하나의 영혼은 누구일까?
“맙소사!”
내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온몸이 소름으로 뒤덮였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저릿저릿한 감각이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주술의 남은 대가 하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이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라진 영혼 하나’. 그랬다. 주술을 푸는 대가로 사용된 영혼 하나는, 소설 <황후 프시케> 속 조연 ‘엘리제’의 영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