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첩자의 정체2021.12.20.
엘리제는 몸이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확실히 이전의 아팠던 몸이 아니라, 기운은 없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몸이었다. 눈이 떠지고 사물이 차차 선명하게 보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데몬의 음성이 들렸다. 보고 싶었던 얼굴도 곧 볼 수 있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 어떻게…….”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큰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옆에서 말하는 제레미와 하임도 눈물을 글썽이며 엘리제가 깨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데몬은 기쁜 듯 슬픈 표정이어서 엘리제는 그만, 그를 부를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게 나인 것은 아닐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죄어 왔다.
“여기 사제님께서 엘리제 님을 치유해주셨습니다.”
데몬이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선 안경을 쓴 밝은 미남자가 엘리제에게 인사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리제님. 사제 미카일이라고 합니다.”
누구라고? 미카일? 엘리제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소설 <황후 프시케> 속에서 가장 좋아했던 ‘최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 엘리제가 미카일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녀의 무수히 많은 상처가 치료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데몬은 자신의 친우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고마움을 느꼈다. 엘리제가 편하게 다시 잠든 것을 확인하고, 데몬과 미카일은 데몬의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서로가 지내온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에 아주 잠시 귀를 기울인 후, 엘리제에게 걸린 주술 이야기를 시작했다. 데몬이 걱정을 털어놓았다.
“지난번 서신으로 미리 이야기 했지만, 아직 흑마법사가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어.”
“조금 전 엘리제 님의 정신을 장악한 자가 그자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상처들을 통해 미카일은 데몬이 흑마법사의 정체를 알아낼 여유 없이 그녀의 몸에서 밀어내기 바빴음을 짐작했다. 특별한 감정이 있는 사람에게 공격을 가해야 했던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데몬은 여전히 그녀의 걱정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더 걱정스러운 것은 엘리제 님이 주술에 걸리도록 도운 첩자가 그녀와 너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야.”
“저런!”
“아무래도 그녀가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이 크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어찌하는 게 좋겠나?”
“그렇다고 알려주지 않을 수도 없잖아. 조심시키려면 말이야.”
“……혹시 그녀에게는 알리지 않고 흑마법사의 정체를 알아낼 방도가 없을까?”
주술을 건 범인인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첩자를 먼저 잡아, 진범을 실토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엘리제가 상처받지 않을 방법이 있을지 데몬은 미카일에게 묻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친우의 모습을 미카일의 투명한 갈색 눈이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는 생김새도, 눈빛도 있는 그대로 진실한 그런 사람이었다.
‘너…… 그녀를 사랑하고 있구나!’
“좋은 방법이 없겠나?”
“……어렵다는 거, 이미 너도 알고 있잖아.”
미카일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사실은 데몬 역시 알고 있었다. 첩자를 잡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술의 대가와 진범을 실토하게 한 후, 엘리제를 완전히 주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엘리제가 상처 입지 않을 수는 없을 거라는 것도. 겨우 자신이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엘리제의 두 눈과 귀를 가려서 사실을 알 수 없게 만드는 정도일 뿐이라고.
‘그녀 모르게 모든 일을 처리하면, 혹시라도 아무것도 모른 채 상처 입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헛된 바람임을 알고 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엘리제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데몬도 알면서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그녀에게 받은 고마움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미안함 때문인가?’
일종의 부채감이 생긴 것인가 싶었다. 대공가의 일원인데 지키지 못해서. 그녀에게 생긴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자신의 탓인 듯해서. 점점 대공가와 자신에게 의미를 달리해가는 그녀의 존재감이 내면에서 커지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사경을 헤맬 때는 걱정으로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받게 될 작은 상처 하나에도 고민하게 되다니.
‘설마, 내가…….’
답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 망설여지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릴 적부터 믿고, 가까이했던 미카일이 지금 이 순간 곁에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잠시간 이성적인 자신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엘리제의 일에 관해서는 판단이 힘들어. 내가 생각해도 나답지 않아.”
“…….”
미카일은 말없이 데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깊이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 정작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하다니.
“혹시, 엘리제 님이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거야?”
미카일의 물음에 데몬의 얼굴이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로안의 첩이야.”
“뭐?”
미카일의 갈색 눈이 동요했다. 하필, 다른 남자의 여인이었다니. 그래서 데몬이 애써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구나. 혹시 또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해줘.”
앞으로 마음이 힘들 데몬이 걱정되었다.
“그럴게. 오늘 진심으로 고마웠다. 반드시 보답할게. 많은 힘을 사용해서 지쳤을 텐데 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보군.”
이제 쉬라고 미카일을 위한 방으로 안내하려던 차에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아, 미안하지만 하나만 더. 혹시 들어본 적이 있나 해서.”
“뭔데?”
“한계점이 높아졌는데…….”
그 말에 미카일의 눈이 커졌다.
“설마, 네 마력 말이야?"
마력 폭주의 한계점이 높아진다니, 미카일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원인을 아는 거야?”
“짐작만 하고 있어. 그녀 때문이 아닌가 하고.”
갈색 눈이 놀라움으로 더욱 커졌다.
“어쩌다 그게 가능해진 것이지?”
설마 사랑의 힘인 건가? 미카일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신성한 신을 모시는 그에게 사랑의 힘은 막강한 것이었으니.
“그녀에게 정령의 힘이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어.”
“!”
사람에게 정령의 힘이 있다니 미카일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는 거지?”
“맞아.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거든. 그리고 그녀에게서 특별한 맛과 향기가 나.”
“맛과 향기가 난다고?”
맛이라니, 미카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쩐지 사제인 자신이 듣기에는 사람에게 맛이 난다는 표현이 어딘가 부끄럽고 민망스러웠다.
“아마도 맛과 향기는 나에게만 느껴지는 것 같더군.”
데몬은 확인차 다시금 두 눈을 붉게 물들이며 몸 안의 마력량을 가늠해보았다. 역시 지금도 몸 안에 평소보다 많은 양의 마력이 흘렀다. 엘리제를 만난 시점부터, 사흘 전 그녀의 몸에 마력을 주입하던 순간까지 틀림없이 자신은 분명 상당히 많은 양을 사용했다. 하지만 자신의 마력은 늘어나고, 오히려 강해졌으며, 심지어 아직 폭주도 없었다. 자신의 육체를 마력을 담는 하나의 그릇으로 본다면, 지금은 그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절대 용량 자체가 늘어나고, 또 계속 마력이 채워진다는 말이었다. 엘리제 덕분에.
“사람이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고, 맛과 향이 있다니…….”
미카일은 생소한 이야기에 절로 의아해졌다. 하지만 데몬의 성격상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는 거였다.
“너 역시 처음 듣는 모양이네.”
“응. 하지만 신성국으로 돌아가서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볼게.”
“그래, 부탁해.”
데몬이 고마움을 전했다.
“그런데 어쨌든 한계점이 높아진 것은 좋은 일 아닌가?”
미카일이 진심을 담아 데몬을 향해 미소 지었다.
“폭주가 네 유일한 약점이자, 아픈 상처였잖아. 어릴 적부터.”
마력의 상승으로 인한 폭주로 어머니도 잃었고 주변에 소중한 이를 만들 수도 없었다. 데몬이 외롭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카일이었다. 그리고 폭주 때문에 황궁에 묶여 있어야 했던 것도. 그런데 만약 엘리제가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면, 어쩌면 그녀 덕에 데몬은 폭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었다.
‘데몬 입장에서는 그녀가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겠구나…….’
속 깊은 미카일이 말없이 데몬을 바라보았다.
“좋은 일이라……. 글쎄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되려면, 이게 가능하게 된 이유를 확신할 수 있어야 했다. 그때, 데몬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각하, 일전에 말씀하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데몬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잡았느냐?”
“현장에서 체포하였습니다.”
“그리로 가겠다. 아직 엘리제 님은 모르셔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수하가 나가고 미카일이 데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혹시…….”
“그래. 상담했던 일의 결론을 볼 때가 생각보다 빨리 왔군.”
미카일은 금세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엘리제에게 주술을 먹인 첩자가 잡혔다. *** 같은 시각, 누군가 대공가 부엌에서 요리 중이었다. 그녀는 정성스레 다진 재료들에 특별히 준비한 가루를 넣어 음식을 만들며,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며칠 전 그녀는 와인이 담길 술병에 주술을 먼저 전부 흘려 넣었다. 작은 향수병 모양에 담긴 진한 붉은빛 액체가 주르륵 쏟아졌다. 그리고 그 위에 최고급 와인을 남김없이 부었다. 오늘 밤, 이 방에서 황제와 그의 애첩이 함께 마시게 될 와인이었다. 두 사람은 이 와인을 함께 나누고 뜨거운 밤을 보내겠지. 그리고 다음 날이면,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 황제뿐일 것이다. 여기 담긴 주술은 여인의 몸에만 치명적인 것이니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놀라 기절할 뻔했다. 주술은 완벽했었다. 모두 주술의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제물도, 저주도. 그런데 죽었어야 했던 애첩이 살아났다. 그리고 어딘가 많이 이상해졌다. 마치 알맹이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어디서 실수를 한 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모르는 척 지켜보기로 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직접 엘리제가 쓰러지게 된 경위를 조사하고 싶습니다.”
황후가 사건을 맡겠다 했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공명정대하고 영민한 황후라면, 혹시 자신의 죄와 뒷배인 주술자까지 밝혀낼지도 몰랐다.
“하! 그 핑계로 나의 엘리제를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행히도 어리석은 황제 덕에 무사히 위기가 지나갔다. 저 어리석은 미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훔친 이였다. 원망해 본들 소용없었다. 아름다운 엘리제 대신, 저 높으신 분의 사랑을 받는 게 저였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던가. 황제의 애첩 엘리제는 물론 무척 아름다웠다. 함께 대공가에서 일할 때도, 엘리제 덕에 잠시 황궁에 들어오게 된 이후로도 엘리제만큼 예쁜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끝없는 시샘과 질투를 가져올 줄은 자신도 몰랐다. 함께 고생했던 동료였는데, 어느 순간 엘리제만이 다 가진 황제의 첩이 되어 있었다. 평민으로 태어나 야무지게 일하는 솜씨에, 나름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 없이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엘리제 옆에서는 자신이 못난 사람처럼 느껴져 스스로가 불쌍했다. 자신을 향한 잘못된 동정은 곧 질투가 되고, 황제를 향한 마음까지 더해져 적의가 되었다. 열등감. 그것이 자신을 소리 없이 집어삼킨 섬뜩한 감정의 이름이었다. 황궁에서도, 대공가에서도 엘리제에게 주술이 발동될 때는 어김없이 자신이 함께였다. 엘리제가 주술의 힘 아래 무너지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갈가리 찢겨 상처 입게 될 때마다 복수라도 한 듯 속이 시원했다. 엘리제가 고통 속에 혼절할 때,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제…… 이제 곧이었다.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났는지는 몰라도 강력한 흑마법의 주술에 걸렸으니, 아름다운 엘리제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죽게 될 것이었다. 엘리제를 갖고자 하는 흑마법사는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는 잔악무도한 자이니까. 그의 첩자가 된 이유는 그와 자신 모두 엘리제의 죽음을 원한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그럼, 애첩을 잃은 황제 폐하를 내가 대신 위로해드려야겠지?’
헛된 망상에 빠져 있는 그때.
“엘리제님께서 드실 식사 다 완성되었습니까?”
집사 제레미가 뒤에서 친절하게 묻는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럼요, 제가 직접 만들었는걸요.”
밝게 웃으며 맛있게 담긴 음식을 내미는 그녀는, 엘리제의 친구이자 시녀인 레이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