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입맞춤할 자격2021.12.16.
‘어떻게든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버텨보려 했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데몬은 마력을 개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제의 정신을 장악한 그자를 쫓아내려면. 자신의 팔 아래 가둔 그녀의 빛나는 긴 머리가 침대 위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상체는 일정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린 듯 고운 눈썹과 곧게 솟은 코, 달고 향기가 나는 붉은 입술도, 한 손에 들어오는 허리와, 단정하게 뻗은 길고 가는 팔다리도 모두 자신이 아는 그대로였다. 검은색 두 눈만 제외하고. 하지만 그런 그녀가 곧 몸부림치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이 가진 상당한 양의 마력을 사용해야 할 테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능하면 엘리제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흑마법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겠지.’
그럼에도 결국, 데몬은 강한 마력을 개방해야만 했다. 엘리제의 손으로, 자신의 바로 아래에 깔린 그녀의 앞섶을 풀어헤치려는 그자를 그 이상 가만히 지켜만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끄아악! 그, 그만!”
흑마법사가 그녀의 입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힘들었다. 저토록 고통스러운 것이 엘리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그녀 대신 제가 아팠으면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발 버텨달라고 입 속으로 엘리제를 부르며 마력을 개방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바로 그때,
“데몬…….”
그녀의 눈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극한의 고통에 놓이자 엘리제를 장악한 그자가 마지막 발악처럼 엘리제를 제 방패로 내민 것이다.
“입……맞춤을.”
하마터면 그녀의 눈을 본 순간 잡았던 두 손을 놓고, 당장에 그녀를 감싸 안아 입 맞출 뻔했다. 자신에게 살려달라는 말 대신 입 맞춰 달라 애원했던 것은 진짜 엘리제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데몬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토록 잔인하게 영악한 자를 당장 엘리제의 몸 밖으로 밀어내야만 했다. 그자를 잡는 것은 그 후의 문제였다.
”꺄아아아아아악!”
마지막 마력 개방으로 엘리제의 안에서 마침내 그자가 사라지고, 데몬 아래에 그녀가 흐트러지며 늘어졌다. 그 즉시 데몬은 그녀를 와락 안았다. ***
“데……몬.”
꺼져가는 목소리의 엘리제가 감은 두 눈으로 그를 찾고 있었다.
“……아, 파요.”
“……엘리제 님…….”
그 모습을 고통스러운 눈으로 바라만 보는 데몬이 그녀의 바로 곁에 있었다. 눈빛에는 엘리제를 위한 걱정과, 그녀를 향한 애정, 갈망, 미안함이 온통 뒤섞여 있었다. 지난 이틀이 데몬에게는 살면서 가장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지금은 엘리제의 몸에서 흑마법사를 밀어낸 지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동안 엘리제는 죽은 듯 잠에 빠져 있었다. 자신에게 그 이틀이 얼마나 가혹하게 끔찍한 시간이었는지, 데몬은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겪은 모든 이를 존경할 지경이었다. 이틀 전, 그녀가 혼절한 그 즉시 데몬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의사와 치료사를 불렀었다. 강한 마력이 온몸에 흐르면서 그녀의 곳곳이 찢어져 상처투성이였다. 제국에서 가장 어여쁘다는 얼굴과 어깨, 팔, 다리에 무수히 칼로 베인 듯한 흔적이 생겼다. 아름답게 휘어지던 붉고 촉촉한 입술도 터지고 찢어져 있었다. 의사와 치료사가 물리적인 치료를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 큰 치유의 힘이 필요했다. 사실 엘리제에게 걸린 주술이 흑마법인 것을 알았을 때, 데몬은 미리 도움을 청해놓은 상태였다. 흑마법사를 엘리제의 몸에서 내보내기 위해 마력을 개방하게 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이 대륙 최고의 사제에게 대공가로 와달라 부탁을 해놓았었다. 신을 모시는 사제들에게는 치유의 힘을 가진 신성력이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신을 모시는 자들의 나라, 신성국은 대공가에서 무척 멀었다. 사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엘리제가 견딜 수 있게 시간을 벌어놓아야 했다. 지난번처럼 입맞춤으로 약한 치유의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입맞춤할 자격이나 있을까…….’
그 생각이 그를 미칠 듯 괴롭혔다. 마지막으로 마력을 개방할 때, 엘리제의 눈빛도 돌아왔었다. 그것은 그녀의 의식도, 흑마법사와 함께 그곳에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그 고통과 상황을 엘리제는 고스란히 지켜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데몬은 공격을 가했다.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준 내게 과연 그녀를 보듬고 입맞출 자격이 있는가.’
그가 고뇌하는 사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마치고 의사와 치료사, 시종들이 모두 귀빈실 밖으로 퇴장하였다. 그 때였다.
“입…… 맞춰 주세요……, 데몬.”
다시 한 번 더 그 간절한 말이 들려왔다. 그녀가 눈도 뜨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제가…… 허락할 테니.”
자신이 몰아넣은 고통 속에서, 그녀가 저를 찾고 있었다.
“이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입맞춤해 줘요. 그 말에 데몬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윽…….”
그녀의 몸은 데몬의 입술을 받아들이기조차 힘들 만큼 아리고 아파 절로 신음이 흘렀다. 데몬이 흠칫 놀라 곧바로 입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이번엔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그녀의 입술에 난 상처 위를 부드럽게 입술로 어루만지는 중에도 그녀의 몸이 쓰라림에 움찔거렸다. 입술에 이어 그녀의 얼굴에 난 날카로운 상처들에도 입을 맞추어갔다. 그녀의 감겨 있는 눈 옆에, 하얗고 부드러운 볼 위, 동그란 이마를 거쳐, 입술 아래 봉긋한 턱까지. 쪽, 초옥, 촉. 붉은 눈을 뜬 채, 그녀의 표정을 통해 고통의 정도를 가늠해 가며 최대한 부드럽고 세심하게 데몬은 그녀에게 키스 중이었다. 데몬의 입술과 상처 난 피부의 자잘한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엘리제는 고통과 동시에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미세하게 편안해지며 야릇해지고 있었다. 몸이 약간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뿐인데도 참을 수 없이 다시 잠이 쏟아졌다. 아까보다는 편안해진 숨소리에 데몬은 그녀가 잠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리제…….”
잠에 빠진 엘리제는 대답이 없었다. 데몬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그녀의 용서를 바라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게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될까 두려웠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제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데몬은 그녀의 상처에 하던 입맞춤을 멈추고 서둘러 귀빈실 문을 열었다.
“어서 와, 미카일!”
문 앞에 밝은 갈색 머리의 하얀 사제복을 입은 키 큰 미남자가 서 있었다. 안경을 쓴 모습이 지적이면서도 사제답게 무척 순결하고 정직해 보였다. 반가움에 데몬이 한 걸음에 어릴 적 친우를 품에 안았다.
“먼 길 와주어 정말 고맙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우리의 회포는 잠시 미루고, 어서 이리로 와줘.”
데몬은 미카일을 엘리제에게로 이끌었다. 침상 위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전쟁이라도 겪은 듯 상처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반복적이지만 거친 숨과 창백한 안색이 한눈에 보아도 생명이 꺼져가는 듯했다.
“위독하니 치유부터 시작할게.”
미카일은 왜 친구가 그토록 절박하게 자신을 찾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앞의 미인은 데몬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임과 동시에 생명을 잃기 직전으로 보였다. 두 손을 그녀 앞으로 밀어 정신을 집중하자, 밝은 빛이 그의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왔다. 엘리제의 몸에 난 상처들이 하나하나 마법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
‘아…….’
따뜻하고 편안해지는 감각에 고통으로 굳었던 엘리제의 몸이 조금씩 풀려 갔다.
‘누구……지?’
데몬? 당신인가요? 사경을 헤매면서도 오직 데몬만을 찾게 되는 자신이 엘리제는 놀라웠다. 저도 이토록 데몬이 보고 싶고, 간절하게 그리울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감은 두 눈을 뜰 수조차 없어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는 내내 강렬한 그의 붉은 눈, 따뜻한 품과 음성, 넓은 가슴과 단단한 팔 그 모든 것이 미칠 듯이 생각났다. 조금이라도 그와 닿는다면 이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자신은 그를 꽉 안고 그 품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흑마법사가 몸과 정신을 지배했던 그 끔찍했던 순간에도, 엘리제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느낄 수 있었다. 데몬이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미안해하는지, 또 얼마나 자신을 원하는지도.
‘마치 나를…… 바라는 것 같았어. 혹시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건 아닐까? 이틀 동안 고통 속에 사경을 헤매고 죽어가고 있으면서 우습게도 자신은 데몬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강했다. 죽더라도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빙의한 후 함께한 그 짧은 날들이었지만 혹시 날 좋아하느냐고. 묻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이만큼이나 당신을…… 좋아한다고. 그리고 내가. 사실은 엘리제가 아니어도 괜찮냐고. *** 로안은 이틀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프시케가 아니었더라면 벌써 몇 번이고 대공가로 향했을 것이다. 엘리제는 다행히 살아 있었다. 그녀 몸속 주술의 힘도 데몬이 거의 다 밀어내서, 이제 주술의 대가만 치른다면 엘리제를 완전히 주술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명이 위태롭다니…….’
그 과정에서 그녀의 몸이 마력을 버티지 못해 망가져버렸다. 데몬이 부른 최고의 사제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오고 있다는 것이 가장 최근의 보고 내용이었다.
‘만약, 그럴 일은 절대 없어야겠지만. 만에 하나 나의 엘리제가 목숨을 잃게 된다면…….’
“죽일 것이다.”
그녀를 잃게 된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이용하여 데몬을 없앨 것이다. 제 품에서 그녀를 데려가고, 직접 두 손으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이 될 테니까.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로안은 살면서 가장 큰 분노와 엄청난 절망을 경험하며 이틀간 광기에 사로잡힌 행동을 했다. 밤에도 잠을 자지 못했고, 무언가를 부수거나 생명을 앗아야 했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 프시케를 불렀다. 덕분에 황궁은 이틀 내내 깨어 있어야 했고, 평소보다 더 많은 종류의 고기 요리가 나왔으며, 프시케는 아예 로안의 방에 상주하게 되었다.
“하아…….”
프시케도 함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는 중이었다.
“아직 대공가에서 소식이 없느냐?”
곁에 있는 시녀에게 물었다. 하루빨리 엘리제가 회복되고 완전히 주술에서 풀렸다는 소식을 들어야 황궁도 이 지옥 아닌 지옥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래도 로안이 이 미친 불안과 분노 속에서 이만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프시케 덕분이었다. 그녀가 엘리제에게 주술을 먹인 첩자가 누구인지를 이야기한 뒤로 로안은 프시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프시케 덕분에 로안은 데몬에게 엘리제에게 주술을 먹인 첩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려줄 수 있었고, 데몬에게 이제 그 첩자를 고문하여 주술을 풀기 위한 대가를 알아내라고 명할 수 있었다. 그 뒤로부터 로안은 불안하고 화가 날 때마다 프시케를 찾아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엘리제가 지금 쓰러진 것은 무엇 때문이오?”
“흑마법은 정확히 어떻게 해야 풀리는 것이야!”
“왜, 아직 엘리제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지?!”
“황후, 황후가 가서 엘리제를 도와주시오…….”
그동안 로안이 한 언행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프시케는 없는 기운이 더 빠지는 기분이었다.
‘불안하고 미칠 것 같으시겠지. 그나마 날 찾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야.’
로안의 질문에 자세히 답을 하며 프시케는 최대한 그가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제국의 황제인 그가 감정에 휩싸여 이성을 잃는다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황후…….”
프시케는 로안이 이틀간 했던 무수히 많은 질문 중 가장 곤란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 모든 것을, 황후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요?”
로안의 푸른 눈빛에 광기가 어려 푸른 바다의 심연과 같이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자신을 집어삼킬 듯 위태로운 푸른 물.
“……폐하.”
로안이 말없이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는 평생을 황후가 되기 위해 교육받고, 익히고,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제가 황국과 폐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답을 독서를 통해 얻었습니다.”
“……지금 황후가 이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 모두 책 덕분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요?”
로안은 믿지 않는다는 눈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황궁 서가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었으니까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프시케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 책 때문이라는 것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로안에게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하! 황후가 짐을 놀리는군. 그게 아니라 사실을 말해줄 수 없는 거겠지.”
순간, 프시케가 움찔했다. 그녀가 애증하는 눈앞의 황제는 가끔 믿을 수 없을 만큼 감이 좋았다. 물론, 그게 너무 가끔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요즘 황후와 대화하며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갑자기 감이 좋아진 로안 때문에 프시케가 마음을 졸이며 그의 입에서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일지 귀 기울였다.
“나를 향한 황후의 마음이 따뜻하다는 것이요.”
어쩐 일이지? 로안이 정답을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 나의 엘리제를 해치지 말아주시오.”
어휴! 그럼 그렇지. 프시케는 역시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