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원하는 것을 더 보여줄 테니2021.12.13.
엘리제의 정신을 차지한 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는 데몬이 알고 있는 엘리제의 모습이었으나 두 눈의 색이 달랐다. 검은 눈의 그녀 역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금안이었을 때보다 어쩐지 눈빛이 더 야릇해 보였다. 순수했던 그녀의 표정이 아니라 가볍게 눈웃음을 치며 매혹적으로 웃는 얼굴이 치명적이었다. 주술의 주인은 무척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촉촉하게 빛나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감히 엘리제의 입으로 주술의 주인이 말을 하려 하고 있었다. 데몬은 이를 꽉 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아! 역시 이 몸 정말 아름답네.”
엘리제의 눈으로 그녀의 몸을 훑고, 엘리제의 손으로 그녀의 굴곡진 몸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멈춰. 감히 누구를 만지는 거지?”
데몬이 화가 난 맹수처럼 그르렁댔다.
“왜? 내 손으로 내 몸 만지겠다는데?”
엘리제의 얼굴과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외모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그녀가 아니었다.
“아하! 설마 너……. 이 손으로 나 말고 널 만져주길 기대한 거야?”
아하하하. 그녀가 고개를 젖히며 시원하게 웃었다. 하얗고 긴 목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 남자라면 이 몸을 거부할 수가 없겠지.”
그 정도로 엘리제는 아름다우니까.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데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시선이 데몬의 가슴팍 즈음에 고정되었다. 그녀가 눈을 들어 데몬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켜.”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
“그래?”
그녀가 길고 가는 손가락을 들어 데몬의 상의 단추를 매만졌다.
“그럼 널 쓰러트리고 가야겠군.”
엘리제의 음성으로 그녀의 것이 아닌 말이 흘렀다. 곧이어 엘리제의 손이 데몬의 상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데몬의 눈썹이 꿈틀댔다.
“후회할 행동하지 마라.”
“후회? 천만에.”
정신을 장악당한 그녀가 데몬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하얀 손이 데몬의 옷깃을 젖히고 들어와 단단하게 굴곡진 어깨와 가슴팍을 더듬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작고 하얀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넓은 가슴을 지나, 이제 단단하게 나뉜 배를 손바닥으로 쓸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확! 엘리제의 두 손을 잡아챈 데몬이 그녀의 몸을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나는 분명, 경고하였다.”
데몬이 그녀의 눈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자에게 말했다. 엘리제의 검은 두 눈이 요염하게 휘었다. *** 로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공가로 보내놓은 수하에게서 온 전갈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대공가로 달려가야 했다.
“폐하? 지금, 어디 가시려는 참이십니까?”
때마침 다과를 준비해 로안의 집무실로 들어오던 프시케와 마주쳤다.
“대공저로 가야겠소.”
“이 시간에요? 도착하시면 늦은 밤이 될 것이…….”
황후의 말을 끊으며 로안이 말했다.
“상관없소. 지금 당장 가야 하오. 비키시오.”
거대한 분노로 로안의 얼굴이 상기되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프시케가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신데 이토록 감정적이십니까? 우선 진정을 하세요.”
“엘리제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황후는 날 막지 마시오.”
“…….”
로안이 프시케를 지나쳐 그대로 방문으로 향하려 하였다.
“폐하, 가시면 안 됩니다.”
프시케가 다급히 로안의 팔을 잡았다.
“놓으시오!”
“폐하, 엘리제가 혹 흑마법의 술수 아래 있습니까?”
그 말이 로안을 멈추게 했다. 황후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데몬과 나밖에 모를 텐데!’
“황후가 그걸 어찌 알았지?”
로안의 벽안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프시케를 노려보았다.
“폐하께서 가시면 방해만 될 것입니다.”
흑마법은 피주술자의 정신을 장악하는 술수. 만약 이미 정신까지 지배당한 상황이라면, 육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어야만 주술자를 몸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데몬이라면 엘리제에게 마력을 사용하여 주술을 깨든, 흑마법사를 튕겨내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유약한 당신이 엘리제의 고통을 지켜볼 수나 있을까?’
절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데몬이 엘리제에게 가하는 고통에 경악하여 데몬을 말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로안이 엘리제를 어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프시케였다.
“엘리제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실 자신 있으십니까?”
“…….”
그녀의 예상대로 로안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대공가로 가선 안 된다. 프시케의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생각해도 남편인 로안을 보내기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애인에게 빼앗기기 싫은 한 여인이 아닌, 황후로서 말을 이었다.
“엘리제를 주술에서 꺼내고 싶으시다면, 지금은 참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녀다운 언행이었다.
“…….”
머리로는 프시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로안은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엘리제가 고통 속에 있게 되는 것도, 데몬과의 입맞춤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도. 어느 상황이든 모두 싫었다. 매일 엘리제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받을 때마다 로안은 가슴을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얼굴이 고통과 분노로 괴물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폐하, 엘리제가 쓰러졌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갑작스러운 프시케의 질문에 로안의 눈이 커지며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설마 지금 그게 황후의 짓이었다고 실토하려는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하아…… 너무하는군.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본래 지금 말씀드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폐하께서 너무 심려하시니 이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무슨 말이오? 자세히 말해보시오.”
“엘리제가 쓰러진 날 폐하께서 제게, 쓰러진 이유를 아느냐 물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다. 쓰러진 엘리제에게 한달음에 달려갔을 때, 자신을 찾으러 온 황후에게 이 일에 황후가 관련이 없느냐 물었었다.
“내 허락을 구하고 엘리제가 쓰러지게 된 경위를 황후가 직접 밝히고 싶다 했었지?”
“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설마, 지금 그걸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건가? 그날 엘리제가 쓰러진 이유를? 로안의 벽안이 당혹과 놀람으로 커졌다.
“무엇 때문인지, 아시오?”
황후가 황궁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인가?
“황궁의 첩자가 누구인지 압니다.”
“!”
첩자가 있다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나도 찾지 못한 첩자를 황후가 찾았다고? 로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누구요! 당장 말 하시오!”
로안의 타오르는 벽안을 바라보며 황후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자는 대공가에 있습니다.”
“……뭐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안은 자신이 제 손으로 엘리제와 함께 첩자도 대공가로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리제에게 주술을 먹이고 그녀를 해치려고 했던 자가 지금, 엘리제의 곁에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 사실이 내게 도움이 된다고? 로안은 기가 막혔다.
“크레미언 대공도 이미 눈치챈 것 같으니까요.”
“……!”
로안은 할 말을 잃었다. *** 데몬은 자신의 몸 아래 놓인 아름다운 엘리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두 눈을 한 그녀는 두 손 다 데몬에게 잡힌 채 여유롭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데몬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져내려 그의 붉은 두 눈을 가렸지만, 눈에서 나오는 붉은빛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고 검은 눈의 엘리제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흐응~ 굶주린 맹수의 눈빛이 따로 없네.”
원래의 데몬이라면 엘리제에게 사심이 없으니 얼마든지 마력을 사용하여 그녀의 주술을 풀 것이었다. 어차피 엘리제야 황제의 첩이니, 데몬은 엘리제의 주술만 풀면 될 뿐 그녀가 받을 상처나 고통 따위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니까. 하지만 데몬은 엘리제에게 다른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고, 엘리제의 두 눈을 통해 데몬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그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엘리제에게 주술을 건 흑마법사는 알고 있었다. 데몬이 엘리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그러니 데몬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가여운 데몬.”
검은 눈의 엘리제가 요망하게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지금 이 몸을 맘껏 취하고 날 보내주는 건 어때? 괜찮지 않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왜 데몬을 유혹하려 했는지 스스로 밝히고 있었다. 데몬은 엘리제를 원하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그녀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 데몬은 결국, 자신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원래대로라면 엘리제는 절대 네 여자가 될 수 없잖아?”
로안의 첩이니까. 그러니 나와 손을 잡고 너는 맘껏 이 여자를 탐해. 그러면 나는 그 후에 엘리제를 가질게. 말하지 않아도 그자의 속내가 들리는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군.”
데몬의 말투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 이 정도로는 아직 어림없다, 그건가?”
검은 눈의 엘리제가 한쪽 다리를 천천히 접어 올리며 말했다. 들리는 다리를 따라 그녀의 옷이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엘리제의 길고 하얀 다리가 위쪽까지 드러났다.
“원하잖아, 데몬 크레미언. 그냥 솔직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해.”
자, 참지 말고. 어서
“…….”
데몬이 아무 말이 없자, 검은 눈의 그녀가 이번엔 잡힌 두 손으로 엘리제의 앞섶을 풀려 하였다.
“이 손 좀 놔 봐. 원하는 것을 더 보여줄 테니.”
하, 어떻게든 버티려 했는데……. 데몬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은 못 봐주겠군. 경고는 이미 했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마력이 데몬의 잡은 두 손을 통해 엘리제의 육신에 흘렀다. 파지지직!
“끄아아아악!!”
번쩍이는 빛과,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엘리제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데몬은 자신의 마력을 더욱 강하게 개방하였다.
“네, 네가 어떻게! 꺄아악!!”
계속되는 공격에 엘리제가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끄아악! 그, 그만!”
마력을 계속해서 개방하는 데몬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너…… 이 몸을 마음에 들어 한 거 아니었어?”
꺄아악! 데몬의 붉은 두 눈이 더더욱 붉게 물들었다. 이 정도면 상당한 마력을 개방한 상태였다. 이 이상은 엘리제의 몸에 큰 타격이 남을지도 몰랐다.
‘제발! 버텨다오, 엘리제!’
그의 몸 아래에서 엘리제가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마다, 데몬의 미간이 거칠게 구겨졌다. 바로 그때,
“데, 데몬…….”
눈물로 얼룩진 엘리제의 두 눈이 순식간에 금색으로 돌아왔다.
“!”
데몬의 붉은 눈이 커졌다. 저 눈은 다름 아닌 엘리제의 것이다.
“입…… 맞춤을.”
지독하게 영악한 자였다. 타인의 가장 약한 부분을 치밀하게 파고들어 잔인하게 이용하는. 데몬은 무서운 눈빛으로 엘리제 눈 너머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력을 한 번 더 강하게 개방하였다.
“꺄아아아아아악!”
격렬한 고통에 엘리제의 허리가 활처럼 휘며 몸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털썩. 축 늘어진 엘리제가 데몬의 몸 아래에서 정신을 잃었다. 마침내 그녀의 몸에서 흑마법사가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