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검은 두 눈의 엘리제2021.12.09.
식사를 마친 엘리제가 씻고 단장하는 동안 데몬도 잠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하임이 이때다 싶어서 그의 뒤를 냉큼 쫓았다. 계속 데몬이 엘리제 곁에만 머물고 있으니 하임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다 대공가의 중대한 일들은 언제 다 처리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 문제는 각하, 어떻게 할까요……. 제 생각에는…….”
그래서 아까부터 데몬 옆에서 계속해서 업무를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가 무언가를 닦달하고 있는데, 데몬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원하고 달콤한 장미 향과 조금 전 꽃을 받아 들고 활짝 웃던 엘리제가 자꾸 떠올랐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고 깜짝 놀랐다.
“하아…….”
데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하임이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각하. 이번 일은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아마 데몬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풀리지 않는 매점매석 문제 때문에 고민 중이라 생각한 듯했다. 그러자 데몬이 갑자기 평소의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하임에게 명했다.
“프리즐리 백작이 범인이니, 그의 주변을 조사해. 결정적인 단서가 그의 농장에 있을 것이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임이 놀라든 말든 데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사실 자신도 며칠 전 황궁에서 황후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황후에게 말을 들은 직후 사람을 시켜 몇 가지를 확인해 보니 프시케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프리즐리 백작가의 농장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던 것이다.
‘황후가……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을까?’
엘리제의 주술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날, 크레미언 대공가의 데몬을 늦은 시각 황궁으로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황후 프시케였다. *** 며칠 전, 늦은 시각 황후가 직접 부른다는 말에 데몬은 급히 말을 타고 황후궁으로 향했었다. 평소 황후와 개인적인 교류가 없었던 탓에 뭔가 황궁에 문제가 생긴 건가 싶었다. 그런데 정말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곧 대공가 영지 내의 매점매석 문제로 골머리를 좀 앓게 되실 거예요.”
프시케가 특유의 우아한 표정과 말투로 데몬에게 말을 꺼냈다.
‘황후가 이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는 거지?’
데몬 자신조차 모르는 크레미언 영지 내의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왜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는 걸까?
“그 문제가 앞으로 대공가를 몇 년이나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드릴 수가 있어요. 그러니, 저와 거래를 하시는 게 어때요?”
미래까지 단언하며,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황후는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해왔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우선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내용을 들어보고 선택하겠습니다.”
황후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데몬을 바라보고 웃었다.
“물론이지요.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거래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제가 원하는 날짜와 방식으로 몇 번 저와 시간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자신과 바람피우는 흉내를 내달라는 말인가? 황후 프시케가?’
데몬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녀의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황후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경계하실 것 없어요, 대공. 말씀대로 이건 생각해보고 선택하셔도 되거든요. 제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순간, 데몬의 붉은 눈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무슨 술수를 쓰고 있는 거지?’
독심술이라도 쓰고 있는 건가 싶을 만큼 정확하게 데몬의 속마음을 읽고 있는 황후가 어딘가 낯설었다. 제국 최고의 여인이자 현명한 황후로 알려진 프시케였다. 그녀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단 말인가? 데몬은 미처 몰랐던 사실에 속으로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차차 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꼭 오늘 말씀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늦은 시각 실례임을 알면서도 모시게 되었어요.”
“꼭 오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요?”
“예. 그렇습니다. 오늘이 바로 매점매석의 범인들이 회동을 갖는 날이거든요.”
‘범인들?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서 도둑질을 하고 있다? 그것도 내 영지에서?’
확인하는 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모두를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기도 어려울 것이고요. 주동자가 따로 있으니 대공께서는 그자만 잡아내시면 됩니다.”
‘그러니 지금 내게 주동자를 알려줄 테니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는 것인가?’
“이렇게 하셔서 황후께서 얻게 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예상외로 프시케가 흔쾌히 대답했다. 여전히 우아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이 일로 저는 대공의 믿음을 얻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건 뻔한 말치레일 뿐이었다. 뒤에 이어질 말이 진짜다.
“아주 약간의 황제 폐하의 질투?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황후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모습이 아름답지만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자, 그럼 어서 오늘이 그들의 회동 날이 맞는지 확인해 보시지요. 오늘을 놓치면 제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더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래서 지금 불렀다고? 자신의 말이 맞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주동자가 누구인지는 이 안에 써 놓았으니 필요하실 때 열어보세요.”
프시케가 걸쇠로 잠긴 작은 상자를 데몬 앞에 내밀었다.
“…….”
누구인지도 미리 알려준다? 이건 데몬이 황후와의 거래를 반드시 수락할 수밖에 없을 거라 단정하는 행동 아닌가.
“답변은 추후에 드리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그러세요. 밤길 조심히…….”
그리고 황후궁을 나오려던 바로 그때 로안의 명으로 자신을 애타게 찾는 황궁의 시종장과 시종들을 만났었다. 급히 황제의 처소로 향하며 그녀가 주었던 작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프리즐리 백작가의 밀 농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을 시켜 그곳을 살피라 전하고 자신은 서둘러 로안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대공가에 도착하여 시작한 회의의 두 번째 안건이 놀랍게도 황후가 말했던 매점매석 문제였다. 자신의 귀로 들으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사람을 시켜 알아본 내용 역시도 황후가 말한 대로였다. 황후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날짜와 장소까지 정확하게.
‘혹시, 황후가…….’
엘리제가 쓰러지게 될 것도 알고 있었을까? 기억을 잃고, 주술에 걸리고, 대공가로 오게 되는 것도?
“하임, 황후궁에 세작을 심을 수 있겠는가?”
데몬의 말에 옆에 있던 하임이 잠시 당황하더니 물었다.
“대공가의 사람들이 궁 안 곳곳에 있긴 합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매점매석의 범인, 황후께서 알려주신 거다.”
“예? 황후께서 그걸 어떻게요?”
그게 나도 궁금하구나. 데몬은 어쩌면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황후 프시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엘리제는 씻고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레이나가 그녀의 달빛 같은 머리를 말려주었다. 거울에 비친 창문을 바라보니, 열려 있는 창문 옆 그녀가 받은 장미가 꽃병 가득 꽂혀있었다. 장미를 바라보며 엘리제가 흐뭇하게 웃었다. 눈을 감아도 장미 향이 방 안 가득 느껴져 무척이나 행복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코랄색의 장미 꽃잎들이 송이송이 윤기가 흘렀다. 어쩜 그리 싱그러운지, 꽃잎과 이파리에 달린 물방울들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가득히 향기를 맡으며 가슴을 부풀렸다. 행복과 설렘으로 어딘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흐응~.”
절로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예쁘다.”
그런데 기분이 좋다 못해 조금 어지러웠다.
‘잠은 충분히 잤는데……. 아, 어제 연무장에서 너무 놀라서 그런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구해줬던 데몬의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눈앞에 잠시 없다고 금세 또 그를 생각하고 있잖아!’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응? 근데 볼이 뜨끈하네?’
어쩐지 갑자기 으슬으슬한 것이 몸살이라도 날 것만 같다.
‘하긴, 빙의한 이후 하루하루가 정말 폭풍처럼 휘몰아쳤지.’
생각해 보니 책 속에 들어온 후로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컸다. 원작 속 엘리제가 죽을 운명의 인물이어서 공포에 질렸었고, 이후로는 주술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으며, 이제는 데몬의 매력이 치명적이어서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넓은 어깨, 단단한 팔과 다리, 긴 기럭지,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 황국 최고의 마력에 뛰어난 일처리까지. 완벽해서 치명적이었다.
‘엄마, 나 어쩜 좋아. 엄마 딸 아무래도 오래 살긴 틀린 것 같아.’
울고 싶은 심정이다. 실제로도 눈이 따끔따끔하며 열이 나는 기분이다. 어쩐지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지는 것 같다.
“엘리제, 너 괜찮아?”
낌새가 이상했는지 레이나가 걱정스레 다가와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엘리제! 네 몸이 불덩이 같아!”
“뭐, 뭐라고?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엘리제가 바라보는 사위가 갑자기 빙빙 돌더니 이내 불이 꺼지듯 눈앞이 암전되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곧바로 레이나는 귀빈실 문을 열고 제레미와 의원을 찾았다. 소식을 들은 데몬도 쏜살같이 달려왔다. *** 반나절이 지났다. 엘리제의 바로 곁에 데몬과 의원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밤이 되면 흑마법은 더욱 강해진다. 엘리제의 주술이 밤마다 발동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엘, 엘리제…….”
레이나가 걱정하며 울기 시작하자 제레미가 레이나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엘리제를 진찰하던 의원이 말했다.
“몸살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체온이 높으십니다. 역시 이건…….”
“주술의 단계를 올리려는 것이겠지.”
알고 있었다. 곧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간악한 주술의 주인이 엘리제의 몸에 걸린 주술을 격상시키고 있었다. 어차피 흑마법사인 것을 들켰다면 굳이 힘을 숨기고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문제는 엘리제의 정신이 얼마나 견뎌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통 속의 그녀를 과연 자신이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 주술은 강력하다 해도 엘리제의 몸만 장악할 뿐, 그녀의 의식을 조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흑마법은 정신을 지배한다. 그녀의 의식이 흑마법에 잠식되는 순간 엘리제는 껍데기만 엘리제인,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었다.
“모두 방 밖에서 대기하도록.”
데몬은 주위의 모두를 물렸다. 엘리제의 정신이 주인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면 어떤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될지 몰랐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봤자 방해만 될 뿐이다. 여차하면 자신의 마력을 개방해야 할지도 몰랐다. 데몬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엘리제…….”
데몬이 손을 들어 그녀의 동그란 이마 위에 올렸다.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하아…….”
그녀는 병마와 싸우듯 소리를 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참 뒤 창밖이 붉게 물들고 곧 어둠이 내려앉았다. 데몬은 서서히 자신의 손바닥 아래 이마가 식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제의 열이 내리고 있었다.
‘왔구나!’
엘리제의 커다란 두 눈이 스윽 들어 올려졌다. 그녀가 깨어났다. 그런데 엘리제의 눈이 금색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흑마법의 기운이 가득 담긴 검은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