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황제의 첩인데 대공과 동거를 시작했다2021.11.22.
엘리제는 지끈거리는 양쪽 관자놀이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지금 대공가로 가는 마차 안에 있었다. 곁에 가장 친한 친구 레이나가 함께였다. 맞은편에는 검은 옷을 입은 미남자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마주 보고 앉아만 있으려니 어색해서 긴장감마저 돌았다. 언젠가는 키스해야 하는 대상이라 그런가?
‘빙의된 지 하루 만에 파란만장하네.’
로안이 자신의 목에 한 키스 외에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자신은 어찌 되었든 현재 황제의 애첩이었다. 그런데.
‘동거는 대공이랑 하게 생겼네?’
이 사실이 기이하게도 묘한 배덕감을 불러일으켰다. 꼭 자신이 바람이라도 피는 것처럼. 거기다 데이트도, 스킨십도 하게 생겼다. 난 황제의 첩인데?
‘어쩌면 키스도.’
어찌 보면 이 상황은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에게 걸린 주술을 풀려면 대공과 입맞춤을 해야 했고, 그 입맞춤이 여러 번이 될 수도 있으며, 장난 아닌 어른들의 빨간 맛일 거라는 말에 겁을 먼저 먹은 탓이었다.
‘그래서 손잡는 것부터 천천히 나아가려고 했건만…….’
그녀는 자신의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젊은 미남자를 바라보았다. 외모도 훌륭했지만 그는 황국 최고의 마력을 가진 자였다.
‘생각해보니, 황제만큼이나 외모도 능력도 최고인 대공이잖아?’
아니, 어찌 보면 황제 그 이상이었다. 지금의 미로니카 황국이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크레미언 대공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덕이었다. 게다가 그 가문의 힘이 데몬의 강력한 마력에서 오는 것이다. 황국의 힘이 대공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토록 강력한 대공가가 어쩌다 황가를 모시게 되었더라?’
소설 속에 뭔가 설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황궁을 벗어나니 좋다!’
주술 때문이든, 소설 속 역할 때문이든 황궁에 있었다면 꼼짝없이 죽게 생겼을 것이었다. 주술을 풀기 위해 자신을 대공가로 데려가 주겠다는 데몬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저도 모르게 엘리제가 데몬을 반짝이는 두 눈으로 바라보았다. 데몬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였다. 그는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로안과 함께 엘리제의 방에 있었다. 엘리제의 손을 잡고. 다행히도 미미하지만 손과 볼 등의 신체 접촉을 통해서도 데몬의 마력이 엘리제에게 흡수되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데몬에게도 그 결과는 다소 놀라운 것인지 그의 붉은 두 눈이 보기 드물게 잠시간 커졌었다. 입맞춤 대신 선택된 ‘손잡기’는 로안의 명이었다. 그것도 자기가 보는 앞에서 손만 잡으라고. 엘리제는 덕분에 한 손을 데몬에게 잡힌 채 잠을 자고 데몬은 침대맡에 앉아 로안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마치 작은 동물 같군.’
눈앞의 인형같이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누르는 것이 눈을 감아도 느껴졌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꼼지락대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느껴졌지만 대공가에 도착하면 할 일이 산더미일 테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둬야 했다.
“엘리제, 괜찮아?”
대공이 깰까 봐 레이나가 엘리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하는구나. 엘리제가 고마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가 한 번 더 귓속말을 들려주었다.
“너와 함께 다시 대공가로 돌아가는 날이 올 줄 몰랐어.”
어?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지? 순간 멍해졌다. 함께 다시 돌아간다고?
‘악! 맞다! 원래 엘리제는 크레미언 대공가의 하녀였지?!’
세상에!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소설을 읽을 때도 엘리제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황제의 애첩이라는 설정에만 빠져 있었다.
‘잠깐만! 그런데 나 어젯밤에…….’
엘리제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멈칫했다.
‘처음 뵙겠어요, 라고 인사했는데!!’
어젯밤 데몬을 처음 보았다고 생각하고 분명 인사를 그렇게 했었다. 자신이 소설 속 데몬을 실제 본 것은 처음이 맞으니까. 아악,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엘리제는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지난날의 자신을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엘리제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화답했던 데몬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래 엘리제? 역시 머리 아파?”
레이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아냐. 괜찮아. 뭐 좀 생각나서.”
“그래? 기억이 돌아오려나? 대공가에 가면 옛 기억도 좀 떠오르고 그러지 않을까?”
“그, 그렇겠지?”
반가워하는 레이나를 보자 엘리제는 조금 미안해졌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란다, 친구야. 안타깝지만 난 진짜 엘리제가 아니라서 돌아올 기억이 없거든.
‘뭐 어쨌든 잘 됐어! 이참에 로안에게 벗어나 제대로 된 생존 루트를 찾자!’
앞으로의 계획도 좀 세우고 소설 속 세상 구경도 해야겠다 싶었다. 아직 주술에 걸려 있기는 하지만, 본래 작품 속 엘리제는 황후에게 죽임을 당하는 거니까, 황궁에서 벗어날수록 생존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엘리제는 특유의 긍정 회로를 발동시켰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배덕감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어차피 진짜 엘리제도 아니고, 로안이나 데몬과 실제 연인 사이인 것도 아니었다.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언제 눈을 떴는지 대공이 물었다.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자상한 목소리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엘리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네, 덕분에요. 푹 잤어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어젯밤 눈앞의 남자 덕분에 고통 없이 잘 수 있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평소보다 더 숙면했던 거 같다.
“다행입니다. 이제 곧 도착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세심하게 챙겨주는 스타일인가? 저런 성격이 사랑에 빠지면 참 잘하지.’
그래서 <황후 프시케> 속 그의 매력에 빠졌던 독자들이 무척이나 많았던 거였다. 엘리제도 내심 그가 다정히 자신의 컨디션을 살펴주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주술도 풀어주겠고. 로안이 그렇게까지 무섭게 명했으니까.’
모든 걸 걸고 주술을 풀라니. 진짜 엘리제가 들었다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을 거다. 갑자기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것이 다시 한번 실감 났다. 로판 속이니 가능한 일들과, 비현실적인 자신의 외모가 이곳이 원래 있던 현실이 아님을 순간순간 일깨워주었다.
‘아!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일단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가 말한 대로 마차는 어느덧 대공가가 있는 영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 엘리제는 데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분홍빛이 도는 화사한 시폰 드레스를 입고 챙이 큰 하얀 모자를 쓴 모습이 마치 하늘하늘 춤을 추는 나비처럼 어여뻤다.
“어머, 여전히 아름답네!”
“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아.”
저택 내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수군댔다. 모자가 얼굴을 대부분 가렸지만 멀리서 보아도 그녀가 엘리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녀로 크레미언 대공가에 있던 시절에도 같은 복장을 한 수백 명의 하녀 중 눈에 띄게 아름다웠던 그녀였다. 그녀를 한 번이라도 본 이들은 모두 지금까지 자신이 본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당연한 듯 뱉곤 했다. 황궁으로 가서 로안의 첩이 된 후로 그녀는 더욱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햇살을 받아 더욱 찬연한 모습이 마치 사람이 아니라 여신이 강림한 것 같았다. 대공가의 모든 사람이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지난 늦은 밤 연락을 받고 대공가는 갑작스런 손님맞이를 해야 했다. 짧은 시간임에도 그들은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고 대공과 손님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처음에 손님의 정체를 전해 들었을 때는 다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치료를 목적으로 온다는 말에 모두 수긍하게 되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어서 오십시오, 엘리제 님.”
저택 입구에서 집사 제레미와 대공의 보좌관 하임이 인사하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엘리제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녀를 돌아보며 데몬이 바삐 말을 전했다.
“엘리제 님, 급한 용무가 있어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제레미는 엘리제 님을 귀빈실로 모시고, 하임은 바로 날 따라오도록.”
한시가 급한지 데몬이 금세 사라졌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정중하게 자신을 안내하는 노신사의 인상이 무척이나 인자해 보였다.
“고맙습니다.”
엘리제는 대공가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황궁만큼이나 크고 웅장한 건물이 여러 채로 이루어져 있었고, 내부가 단정하고 안락하게 꾸며져서 편안한 분위기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기억을 잃으셔서 치료차 오셨다 들었습니다. 계시는 동안 부디 편히 계셔주십시오.”
다들 알고 있구나! 미리 이야기해준 것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마웠다. 엘리제의 뒤를 레이나가 따르고 있었다.
“여깁니다.”
와아! 엘리제는 기분 좋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큰 창으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름다운 방이었다. 보기 좋게 잘 가꾸어진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황궁만큼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방 안 곳곳의 물건이 모두 우아하고 깔끔하여 마음에 쏙 들었다. 방 안 가득 향긋한 꽃내음이 났다. 마음이 정돈되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우와……. 진짜 너무 좋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녜요! 정말 좋아요!”
엘리제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의 죽음, 주술의 고통,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아, 빙의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지금 이 순간 너무 행복했다. 현실에서도 이 정도의 방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혹시 따로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실까요?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니에요. 레이나가 함께 있으니 충분해요.”
그 모습을 보며 집사 제레미가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편히 쉬고 있으라며 방을 나가 주었다.
“와, 레이나 정말 좋지 않아?”
이 순간에 심취하여 엘리제는 자신의 뒤에 선 레이나의 눈빛이 어딘가 평소와 다른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음성이 들려왔다.
[엘리제…….]
‘맙소사!!’
이렇게 빨리 다시 목소리가 들릴지 몰랐다. 행복을 만끽하던 순간에 아무런 대비 없이 맞이한 공포가 너무나 커서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고정된 채로 엘리제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 같이 깨질 듯한 고통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몸에 전류가 통하듯 저릿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음성에 엘리제는 그만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오늘 밤은, 반드시 내게로 오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밤이 되면 시작될 것을. 발작 같은 그 고통이. 엘리제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 데몬과 하임은 가신들을 모아 집무실에서 회의 중이었다.
“당분간은 그 일에 만전을 기해주게. 최대한 많은 양을 채굴해주면 좋겠군.”
“예, 대공 각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중요 안건을 먼저 매듭짓고 이제 영지 내에서 문제 되고 있는 매점매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각, 각하.”
제레미가 집무실을 열고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노련한 집사가 집무실의 문을 황급히 열고 들어오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엘리제 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이렇게 벌써? 불과 반나절 만에 주술을 다시 발동시켰다니, 엘리제에게 주술을 건 이가 생각보다 더 강한 마력을 가진 자임이 틀림없었다. 데몬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타 안건은 추후로 미룬다!”
서둘러 엘리제가 있는 귀빈실로 달려갔다. 제레미가 그를 뒤따랐다.
“의식을 잃으신 것은 아니나, 갑자기 쓰러져 덜덜 떨고 계셨습니다.”
“함께 온 시녀는?”
“레이나가 옆에 있었지만 엘리제 님께서 갑자기 그렇게 되셔서 시녀도 놀란 것 같았습니다.”
“…….”
황궁에서부터 짐작되는 바가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귀빈실로 달려가는 동안, 마차 안에서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대공가에 데려오면 황궁보다는 안전하리라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벌써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 조바심이 났다. 몸을 빠르게 달려 귀빈실에 다다랐다. 데몬이 귀빈실의 열린 방문으로 들어섰다.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엘리제의 모습을 발견하자 데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