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오늘 밤도 너와 보내겠다 (2/126)

2. 오늘 밤도 너와 보내겠다20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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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90014053.jpg“……누가 좋다고?”

초점을 잃은 황제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놀라서 벌어진 로안의 입 사이로 더듬더듬 말이 이어졌다.

16549590014053.jpg“지금 네가, 짐보다 황후가 더 좋다는…….”

16549590014064.jpg“네! 저는 황후 폐하가 더 좋습니다.”

나는 쐐기를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16549590014069.jpg“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의 말에 황후도 말문이 막혔다. 로안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두 눈을 가렸다.

16549590014053.jpg“하! 황후가 나의 연적이 될 줄은 몰랐구나.”

로안은 비장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 황제님아 왜 그렇게 받아들이세요? 날 두고 황후와 싸우라는 게 아니잖아요??

16549590014069.jpg“폐하, 고정하세요.”

프시케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16549590014069.jpg“엘리제가 많은 기억을 잃은 모양입니다. 게다가 전혀 답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안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서 나가자며 프시케가 위태로워 보이는 로안을 부축하려 했다. 탁! 프시케의 손을 쳐내며 로안이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16549590014053.jpg“건강하던 나의 엘리제가 왜 갑자기 쓰러지게 된 거지? 황후는 아는 바가 없소?”

무시무시한 벽안(碧眼)이 프시케를 노려보았다.

16549590014069.jpg“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엘리제가 쓰러진 것이 제 탓이라는 말씀이십니까?”

16549590014053.jpg“엘리제가 쓰러져서 제일 기쁜 사람이 누구겠소!”

16549590014069.jpg“폐하!”

프시케도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로안을 향해 외쳤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겼네!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긴 프시케가 진짜 엘리제를 해치려고 했다면 화가 나지도 않겠지. 소설 속 프시케는 물론 엘리제를 미워했다. 하지만 그녀의 성정은 바르고 강직해서 프시케가 엘리제를 직접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엘리제가 프시케를 죽이려는 음모를 꾀하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프시케가 엘리제를 후궁으로 살려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후 프시케>에서 엘리제는 악역 조연이었고, 프시케는 악역을 처리하고 사이다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여주였다. 그러니, 엘리제로 빙의한 내가 살아남으려면 프시케와 적어도 반목하는 사이여서는 안 됐다. 나의 생존본능은 생각보다 강해서 나도 모르게 고백부터 튀어나왔지만 말이다.

16549590014064.jpg‘그래도 황제보다 황후가 좋다고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낯 뜨거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역시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 그 바람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16549590014069.jpg“하…… 억울합니다, 폐하.”

지혜로운 황후답게 프시케가 먼저 한발 물러섰다.

16549590014069.jpg“그리 생각하신다니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직접 엘리제가 쓰러지게 된 경위를 조사하고 싶습니다.”

16549590014053.jpg“하! 그 핑계로 나의 엘리제를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나 안 좋았다니. 소설로 읽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긴장과 공포가 방 안을 가득 메우는 것이 느껴졌다.

16549590014064.jpg“싸우지 마세요!”

보다 못한 내가 나섰다. 이래죽나 저래죽나 마찬가지라면 내 성격대로 나가는 수밖에.

16549590014064.jpg“저, 그만 쉬고 싶어요.”

당황한 로안이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와 침대 옆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16549590014053.jpg“그래, 엘리제. 네 말이 맞다. 황후는 이제 그만 나가보시오.”

16549590014064.jpg“아뇨, 황제 폐하도 나가세요.”

16549590014053.jpg“뭐??”

로안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황제의 눈물도, 절망도 여러 번 보네. 돌아보니 방 안의 모두가 놀란 것 같았다. 최고 권력자에게 축객령을 내렸으니 당연한가? 프시케도 두 눈을 크게 뜬 것이 보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에 다들 얼이 빠져 보였다.

16549590014064.jpg‘어차피, 내가 엘리제 성격이 될 순 없잖아.’

기억을 잃은 핑계로 내 성격대로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솔직히 소설 속 엘리제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소설은 여주인 프시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었으니까.

16549590014069.jpg“풉.”

갑자기 황후의 웃음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무너뜨렸다.

16549590014069.jpg“아! 죄송합니다, 폐하. 누군가 이렇게 격의 없이 폐하를 대하는 것을 너무 오랜만에 보아서요.”

프시케는 예의 바르게 사과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이 정말 즐거운 듯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더 웃고 싶은데 참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어느새 자세를 고치고 우아한 황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가 웃으며 방문을 나섰다.

16549590014069.jpg“그럼 저는 먼저 회의장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엘리제 자네도 푹 쉬고 안정을 찾길 바라네.”

16549590014064.jpg“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꾸벅 인사를 했다. 프시케가 나의 인사를 가벼운 목례로 받으며 웃었다. 역시 여주다. 어쩜 미소도 뒷모습도 아름답기도 하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이제 불청객 하나 남았다. 길 잃은 강아지인 양 불쌍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은 로안에게 말했다.

16549590014064.jpg“폐하도 가셔야죠?”

16549590014053.jpg“내가 지금 널 얼마나 걱정하는지 아느냐? 짐은 네 곁에 있고 싶다.”

남주님, 아무리 잘생기셨어도 이렇게 진상이시면 여주가 안 좋아해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꾸욱 삼키며 나는 로안을 달래듯 말했다.

16549590014064.jpg“쉬어야 제가 기억을 찾지요.”

그 말에 로안이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났다. 두 눈에 난생 처음 보는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16549590014053.jpg“알았다. 대신 밤에는 날 거부해선 안 된다. 그건 용서할 수 없어.”

16549590014064.jpg“네? 용서요?”

용납도 아니고, 용서요? 폐하? 제가 뭘 잘못한 거죠? 그게 용서하고 말고 할 일인가요?

16549590014053.jpg“오늘 밤도 너와 보내겠다. 다시 오마.”

로안은 갑자기 혼자 진지해져서 자기 할 말만 하더니 쌩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16549590014064.jpg‘뭐야? 지금 삐진 거야?’

이 세계 남주가 쫒아냈다고 나에게 토라졌다. 그리고 밤에 다시 오겠단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나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16549590014064.jpg‘게다가 ‘오늘도’라니, 그럼 어제도 함께 보냈다는 말이잖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방문이 닫히고 크고 화려한 방 안에 나와 레이나만이 남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받아들여야 할 현실과 상황이 당황스럽고 막막했다. 그때 내 이마에 따뜻한 손이 올려졌다.

16549590101365.jpg“엘리제, 너 괜찮은 거야?”

아, 레이나구나.

16549590014064.jpg“레이나?”

16549590101365.jpg“그래, 나야. 괜찮아?”

레이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16549590014064.jpg“응, 이제 괜찮아.”

16549590101365.jpg“정말 다행이야. 걱정 많이 했어. 너 쓰러졌을 때 너무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

16549590014064.jpg“놀라게 해서 미안해.”

표정을 보니, 두 사람이 정말 가까웠나 보다.

16549590101365.jpg“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

16549590014064.jpg“응…….”

레이나에게도 사실을 말할 수는 없겠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고, 이곳이 내가 읽은 책 속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라리 레이나를 통해 최대한 이 세계에 대해 배우고, 도움을 받아야 했다.

16549590101365.jpg“어쩐지. 너 아까 완전 다른 사람 같았어. 폐하께 그런 말투와 행동한 적 없었잖아. 황후 폐하께도 그렇고.”

아, 그렇구나! 생각해보니, 몸은 이곳 사람이 되었어도 나는 황궁의 예법을 전혀 모르니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스웠을까.

16549590014064.jpg‘기억을 잃은 것으로 생각해주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은인이었다. 나중에 꼭 보답이라도 해야지.

16549590101365.jpg“엘리제, 어서 쉬어야 해. 저녁 때부터는 준비해야 하잖아.”

16549590014064.jpg“준비? 저녁에 무슨 일 있어?”

16549590101365.jpg“설마…… 그런 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

무슨 일인데 그러니? 정말 기억이 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달라고 하자 레이나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미안해 친구야, 지금은 너밖에 없다.

16549590101365.jpg“아까 폐하께서 밤에 처소에 다시 드신다고 하셨으니까…….”

하얗던 레이나의 얼굴이 이제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16549590101365.jpg“그러니까, 밤에 아마 너와…… 잠자리에 드실 생각이실 거야. 준비를…….”

16549590014064.jpg“뭐? 잠자리?!”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레이나도 함께 놀랐다. 네가 말하는 잠자리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나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놈의 집착 남주 때문에 당장 발등에 불 떨어졌다. 지금 기억나는 소설 줄거리를 정리해서 생존 루트를 짜도 살까 말까 한데! 오늘 치를지도 모르는 첫날밤 준비까지 해야 한다고? 환장하겠다. 게다가 엘리제는 몰라도 나는 처음이라고!

16549590014064.jpg‘안 돼!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

현실에서 물론 남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스킨십을 포함한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번번이 그런 깊은 관계까지 이어지기 어려웠다. 생각해 보니 나는, 남녀 간에는 그런 거 없이도 감정적으로 서로가 좋다면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나름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철벽녀였다. 그런데 오늘, 그런 거 초고속으로 뛰어넘고 어른들의 끈적한 빨간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 어쩌면 좋지? 멍해진 나는 다시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날, 황제의 하나뿐인 애첩 엘리제가 쓰러지더니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다는 소문이 황궁 전역에 퍼지기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벌써 밤이다. 시간은 무정하게도 빠르게 흘렀다. 해가 지자, 로안이 내 방으로 밀어닥치듯 들어왔다. 방 앞을 지키고 섰던 레이나가 옆으로 밀쳐졌다. 아니! 지금, 님이 변사또세요?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이가 된 심정이다. 물론 나의 정절을 지킬 대상은 없지만. 이곳에서 나는 로안의 공식적인 첩이니까. 그것도 애첩. 하지만 몸뚱이가 엘리제가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오늘 처음 본 사람과 잠자리를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걱정스레 얼굴을 붉히며 레이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16549590101365.jpg“엘리제, 그런데 너 괜찮겠어? 폐하께서 밤만 되면 거친 짐승이 되신다고, 예전에 네가…….”

하…… 낮엔 진상, 밤엔 짐승이셨구나. 우리 남주 로안이. 분명 내가 읽을 때는 전체 연령가 소설이었는데, 현실이 되자 19금이 되려 하고 있었다.

16549590014053.jpg“나의 엘리제.”

16549590014064.jpg“폐, 폐하…….”

아니, 사랑하는 여자가 쓰러졌는데 당장 그날 잠자리를 원하는 남자도 있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로안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있네. 그런 남자.

16549590014064.jpg‘아니, 오지 마시라구요.’

결연한 표정,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다가오는 미남자가 내게는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아직 저승길 안 갈래요! 일단, 무조건 피해야 한다! 이런 맘에도 없는 집착남과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16549590014064.jpg“제가 아직 몸이 성치 않아, 힉!”

로안이 상의을 찢듯이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16549590014053.jpg“나 역시 아프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니,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들을 수가 있어요? 당황한 나를 향해 얇은 셔츠만 남은 로안이 달려들었다.

16549590014064.jpg“달, 달거리를!”

16549590014053.jpg“…….”

16549590014064.jpg“시작해서…….”

내 다급한 외침에 갑자기 멈춘 그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로안이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혀왔다

16549590014064.jpg‘그래도 남주는 남주구나!’

이 순간만큼은 왜 로안이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지 알 것 같았다. 한껏 진지해지자, 금발에 벽안을 가진 미남자가 매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느껴졌다.

16549590014053.jpg“아직 날짜가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알고 있구나. 황제가 애첩의 지극히 개인적인 것까지도 모를 리 없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을 모면할 방도가 그것 외에는 딱히 없었다.

16549590014064.jpg“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갑자기 시작했어요.”

어색하지만 필요하다면 나도 연기를 해야 했다. 배우도 아닌데, 연기가 잘 될 리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가식을 떨려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로안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16549590014053.jpg“이제야 좀 나의 엘리제 같구나.”

부끄럼을 타는 모습으로 비쳤는지 로안이 기뻐하며 두 팔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단단한 품 안 가득 안기자, 나와 로안의 가슴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엘리제는 현실의 나와는 차원이 다른 글래머였다.

16549590014064.jpg“아니, 저 지금 앙큼 떤 거 아닌데요!”

얼굴 좀 붉어진 것을 보고 오해하지 마세요!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로안이 갑자기 내 어깨에 고개를 툭 떨궜다.

16549590014064.jpg‘뭐지? 내가 실수했나?’

16549590014053.jpg“엘리제, 참기 힘들구나.”

뭘요…… 남주님. 설마? 아……. 차라리 모르고 싶다. 슬쩍 들어 올린 로안의 벽안이 역시나 욕정으로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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