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빙의했는데 내가 너무 예쁘다2021.11.04.
“엘리제!”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 깜짝이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나는 놀라서 잠에서 깼다. 본 적 없는 화려한 천장과, 아름다운 무늬의 레이스가 수놓아진 커다란 침대 상단이 보였다.
‘어? 여기가 어디지?’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무거워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인가?’
“괜찮느냐?”
당황할 틈도 없이 내 앞으로 아름다운 금발의 젊은 미남자가 쏟아지듯 다가왔다.
‘외국인?’
어쩌다 내가 갑자기 외국으로 오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눈앞의 남자는 우리말을 하고 있었다. 외모가 비현실적으로 잘생겨서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방 안이 온통 서양식으로 화려했다.
‘뭐지? 죽어서 천국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다니!”
미남자는 방에 선 사람들에게 화를 내더니, 내 얼굴에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누, 누구세요?”
뭔데 남의 얼굴을 막 만지는 거야. 나도 모르게 낯선 미남자의 손길을 피하며 말을 툭 뱉었다. 미남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주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말해보라.”
미남자는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옆에서 하얀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덜덜 떨며 말했다.
“그, 그것이 쓰러지실 때 기억의 일부를 잃으신 듯합니다.”
“기억을 잃어??”
‘내가 쓰러졌다고?’
나도 놀라 눈이 커졌지만, 미남자의 잘생긴 푸른 눈이 더 커졌다. 진심으로 당황한 눈치였다. 겁에 질린 할아버지가 갑자기 머리를 부딪히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설명하였지만 소용이 없어 보였다. 미남자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말아 쥐자, 갑자기 할아버지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폐, 폐하. 죽여주십시오.”
‘폐하??’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다. 여기가 어딘지 몰라도 이 사람이 폐하래. 잘 보이지 않으면 죽게 생긴 걸지도 모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얼굴만 잘생겼지 성질머리는 더러워 보였다.
“저, 저기.”
“엘리제, 그냥 누워 있거라.”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황제라는 미남자가 내 팔을 다정히 잡고 날 그대로 눕혔다. 그런데 나를 눕히는 그의 시선이 내 가슴 언저리에서 멈췄다.
‘응? 어딜 보는 거야?’
“옴마야!”
나는 소리를 지르며 얼른 레이스로 가득한 내 앞섶을 여몄다. 반 이상 벌어진 옷깃 사이로 풍만한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아니, 무슨 옷이 이렇게 앞이 다 파였어?! 아무리 침실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야한 옷을 입고 있담? 놀라는 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에 서운함과 처연함이 가득했다.
“정녕,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 가슴 가린 것이 그리 서글픈 일인가?
“다, 다른 곳은 괜찮으시니 며칠 푹 쉬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갑자기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할아버지 의사의 말을 듣고 황제는 다시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에 좋은 탕약을 지어 올려라! 약재가 필요하다면 황궁의 모든 것을 사용해도 좋다.”
“예, 폐하.”
이제 그만 내게 휴식과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에 황제를 따르는 시녀들이 우르르 방을 나갔다. 그런데.
‘너님은 왜 안 가세요?’
황제가 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엘리제…….”
의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내 두 손을 꼭 잡고 침대 옆에 앉았다.
‘아예 자리를 잡으셨네?’
“저는, 괜찮습니다.”
환자가 괜찮다는데. 좀 나가주시겠어요? 황제를 보내놓고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좀 탐색하고 싶었다.
“괜찮다니,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디가 괜찮단 말이냐.”
아, 황제라더니 역시 남의 말 안 듣는구나.
“네가 누구인지는 기억하느냐?”
마침 궁금했는데 잘됐다. 그래, 안 가실 거면 그냥 황제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나는 직진하기로 했다.
“기억 안 납니다.”
곱고 여린 미성이 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단호한 말투가 어딘가 따로 놀아 나조차 위화감이 들었다. 황제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이윽고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세상에, 이게 울 일이야?? 다 큰 남자가, 그것도 금발에 잘생긴 남자가, 그것도 이 나라의 황제라는 사람이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그 잘생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사연 있는 사이길래 저리도 애절한 눈빛으로…….
“나의…….”
아, 혹시 사랑하는 부인으로 착각하는…….
“애첩 엘리제다.”
“……네? 애첩요?”
부……인 말고 첩이요? 너무 당황스러워 멍해진다. 나를 너무 소중히 대하길래 부인으로 착각하는 줄 알았는데, 잠깐의 기대가 무너지자 충격이 컸다.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딴 세상인 것도 황당한데, 내가 첩이라니 더욱 당혹감이 느껴졌다. 난 아직 제대로 연애도, 결혼도 못 해봤는데?
“그래. 내가 널 너무 사랑하여 크레미언 대공가에서 데려왔었지. 여기 네 가장 친한 친구 레이나도 너의 부탁으로 내가 데려오지 않았느냐.”
뚝뚝. 결국 황제는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황제 옆에서 같이 울상이 된 시녀 한 명도 울먹울먹 나를 바라보았다. 쟤가 레이나인가 보다.
“가서 거울을 가져오너라!”
황제의 명에 레이나가 상반신이 가득 담길 만큼 큰 거울을 들고 왔다.
“자, 보아라. 이게 엘리제 너다.”
“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여자인 내가 봐도 놀라웠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그만 넋을 잃을 정도였다. 말도 안 되게 이쁜, 황홀한 미인의 모습이었다. 빛이 흐르는 듯 구불거리는 은색 머리에 황금색 두 눈. 사랑스러운 분홍빛 입술이 하얀 피부 속에 더욱 선연했다. 게다가 얼핏 보아도 몸매도 완벽한 게 완전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이게 나라고? 사람이 이렇게 이뻐도 되나?’
그때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잠깐만! 아, 그래. 생각났다.’
엘리제, 레이나, 크레미언 대공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들. 아름다운 하녀 엘리제를 첩으로 들여 후궁의 자리에 올린 황제의 이야기. 황후의 자리까지 욕심내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엘리제,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씹어 삼키는 걸크러쉬 황후의 이야기가!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빙의한 것이다. 스쳐가듯 읽었던 막강 여주 사이다 소설 <황후 프시케>. 그 소설 속 황제의 첩으로!
* * * 나는 그저 웹소설을 좋아하는 회사원이었다. 적성에 맞지 않은 회사는 1년 만에 때려치웠다. 공무원 준비는 쉽지 않았고,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니며 계약직으로 일해온 지 3년 차였다. 고향에는 엄마와 남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지만 간간이 연락할 뿐 서로 사는 게 바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자취방에서 저녁을 먹은 후 웹소설을 읽다 잠이 들었었는데, 깨어보니 이 상황이었다.
‘현실의 나는, 죽었을까?’
아니, 그보다 나는 왜 하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엘리제로 빙의한 것일까? 여주도 아니고!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죽음이 기억나지 않는 24살 현실의 나보다도, 곧 죽을 조연에 빙의한 지금이 더 기구하게 느껴졌다.
‘엘리제가 언제 죽더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죽고 싶진 않았다. 꽃다운 24살에 이유도 모르고 죽은 것도 억울했고, 모처럼 엄청 예쁜 언니로 빙의했는데 곧 죽는다니 그건 더 억울했다. 읽은 지 한참 되어서 책의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엘리제는 미로니카 황국의 황제가 황후와 결혼한 이후에 들인 첩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불륜녀인 거네?’
물론, 소설 속에서 황제가 첩을 들이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 윤리 도덕 관념은 소설 밖 현실의 것이었다. 이미 결혼한 남자를 홀려서 그 부인을 상처 입히는 역할 아닌가. 게다가 더 큰 진짜 문제는 내가 여주에게 죽임을 당하는 조연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 벌컥! 방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황, 황후!”
이 세계의 주인공 프시케가 등장했다. 황후 프시케는 과연 주인공이었다. 붉은 머리는 한 올도 빠짐없이 우아하게 틀어올렸고, 작은 티아라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과 굳게 닫은 입술이 그녀의 반듯한 성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찬란한 에메랄드 색 눈빛은 정의로워 보였고 동시에 무척 현명해 보였다. 그녀는 황후여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기품 있고 멋있어서 나는 반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 멋진 부인을 두고 황제는 딴 여자를 바라본 거야?’
“역시 여기 계시는군요. 자네 몸은 괜찮은가?”
차분하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프시케가 나의 안위를 물었다.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워 나는 그만 얼어서 고개만 여러 번 끄덕였다.
“흠흠, 황후가 여긴 어쩐 일이오?”
미남 황제 로안은 멋쩍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를 향해 섰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에게 자신의 소중한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어 지키려는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결국 소설 속 로안은 후회 남주라 다시 황후에게 돌아오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눈앞의 내 애인이 지금 아무리 날 사랑해도, 어차피 프시케 거라는 이야기였다. 상황 파악이 끝나자, 머릿속에 한 생각만이 강하게 들었다.
‘살려면 무조건 프시케에게 잘 보여야 해!’
아름다운 황후 프시케가 황제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폐하.”
“…….”
“아무리 애첩이 귀하다지만, 정무회의 중에 뛰쳐나가시면 어찌합니까.”
‘정무회의 중에 뛰쳐나왔다고?’
일하다 말고 지금 나 쓰러졌다고 달려 온 거야? 로안이 나 잘했쪄?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야…… 나 이 빙의 안 할래.
“황후는 말씀이 과하오. 내게 가장 귀한 사람이 엘리제인 걸 황후도 알잖소!”
황제야, 미쳤니? 어디선가 내 인생 종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 정도면 대인배 프시케여도 화가 날 만하다. 그런데, 의외로 프시케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어리광 달래듯 황제에게 말했다.
“예, 폐하.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대한 안건을 논의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회의실로 함께 가시지요.”
성녀도 울고 갈 만큼 대인배였다. 전혀 당황하거나 화내지 않고 황제를 달래는 모습이 하루 이틀의 내공이 아닌 듯했다. 역시 여주인 건가? 그런데, 원래 소설 속 프시케 성격이 이랬던가?
“싫소!”
순간 프시케와 나를 경악하게 만드는 대답이 들렸다. 황제가 회의 참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도 황후가 직접 찾으러 왔는데.
“오늘 엘리제를 친히 보살피고, 이곳 침소에 들 것이오.”
‘뭐라고요? 님아, 내 의견은요?’
누가 언제 같이 있겠대?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편한 부인이 어디에 있을까. 남편이 아픈 첩을 직접 보살피고, 밤에 함께 있기까지 하겠다고 선언하는데 말이다. 심지어 황제가. 미동 없이 평온했던 프시케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본능적으로 외쳤다.
“제! 제가 싫습니다!”
그 말에 방 안 모든 사람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절망스러운 표정은 말할 것 없고, 다들 네가 왜 이러니? 의 표정이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소설 속 엘리제는 황제를 온몸으로 유혹해왔다. 시작은 로안이 첫눈에 엘리제에게 반한 거였지만, 황제의 첩이 된 후로 엘리제는 자신의 욕망에 눈을 뜬다. 권력과 재력을 잔뜩 맛본 후로는 적극적으로 황제를 유혹했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엘리제의 변화에 모두 당황스러울 수밖에.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실인가 보구나.”
프시케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 황후 폐하. 제가 누구인지도 방금 들었어요.”
흥미롭다는 듯 프시케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내가 성급히 외쳤다.
“저는, 황제 폐하 말고, 황후 님이 좋아요!”
모두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