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과격한 행동이었다. 순간 내 몸은 억 하는 소리를 내며 로헨 쪽으로 움직여졌다.
“그럴 일 없어요. 아이샤는 나와, 우리와만 친하게 지낼 거니까.”
“아이샤가 너희의 물건은 아니잖니. 로헨.”
“…….”
“아이샤의 의견도 중요하지 않겠어?”
“설사 아이샤가 그쪽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 해도, 내가 허락 안 해, 그건. 그러니까 꺼져.”
예상치 못한 말에 제플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형인데 꺼지라니. 너무한 거 같은데.”
“내 거 빼앗으면 누구든 죽여 버릴 거니까 꺼지라고.”
제플리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제플리와 이야기했던 게 싫은 건지 로헨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섬뜩하리만큼 차가웠고, 섬뜩하리만큼 마음이 느껴졌다.
절대 다른 이와 내가 어울리게 두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마치 자신의 것을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는 짐승 같아 보였다. 지나치게 위험해 보였다. 길들일 수 없는 날짐승. 불안하리만큼 극단적인 그 모습에 제플리는 한발 물러났다.
“정말 이럴 때면…… 대공가의 핏줄을 그대로 이었다니까.”
“…….”
“알았어. 가면 되잖아. 그런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로헨. 감정적으로는 누구를 지키지 못하거든. 누군가를 지키려면 강해져야지. 안 그래? 이번만 하더라도…… 넌 아무것도 하지 못했잖아. 대공비 마마께서 그렇게 난리 치는데.”
“그만해요.”
결국 나는 두 사람 사이를 껴들었다.
왜 저래. 원래 소설에서는 오히려 로헨과 라리에게 지나칠 정도로 친절해서 문제였던 사람이, 이제는 반대였다. 소설은 대본집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게 다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 쌍둥이들의 호감을 사는지는. 그가 어떻게 해서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가게 되는지, 그런 것들이 전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은 아닐 거 같다.
이런 식이라면 로헨은 제플리의 말을 듣기는커녕 그를 죽일 것만 같으니까.
“아이샤가 그만하라니 그만하겠지만, 정신 차리도록 해. 로헨. 지금의 너는 그저 떼쓰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니까.”
“저게!!”
결국 참지 못한 로헨은 당장이라도 제플리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제플리는 피식 웃으며 물러설 뿐이었다.
“대공 전하의 비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애송이.”
그게 전부였다. 누룽지 긁듯이 제플리는 그렇게 아이의 속을 박박 긁어 놓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로헨…….”
나는 로헨을 급히 껴안았다.
“…….”
“괜찮은 거야?”
“저 자식…… 마음에 안 들어.”
“어어. 나도 마음에 안 들어.”
“다시는 저 자식이랑 있지 마. 기분 나빠.”
씩씩거리던 로헨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럴 일 없어. 갑자기 나타나서 친한 척하고 그러는 거 나도 싫었어.”
“…….”
“그러니까 걱정 마. 저 사람과 엮일 일은 조금도 없으니까.”
그제야 로헨은 씩씩거리던 걸 멈췄다. 그렇다 해서 로헨의 기분이 좋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로헨은 불편한 표정과 불편한 기색은 여전히 내비쳤다.
“우리 어서 들어가자.”
“어디 갔다 온 거야.”
“어?”
“라리랑 도서관 갔다가 왔는데…… 네가 없길래.”
“아아, 신전에 잠깐 갔다 왔어.”
“……자꾸 말없이 어디 다니면…… 발 부러뜨린다?”
섭섭함에 하는 말치고는 꽤나 무서울 정도였다.
“그냥 하는 말이라도 그런 말 하면 안 돼, 로헨.”
“왜.”
“어…… 그러니까…… 그게…….”
너무 진심 같거든. 넌 정말 당장이라도 내 다리를 부러뜨려서 곁에 둘 것만 같거든.
난 어색하게 웃으며 로헨을 바라봤다.
“어쨌든 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네가 그리 말한다고 내가 안 할 줄 알아?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지 않게 어디 갈 땐 꼭 말하고. 어지간해선 우리랑 가. 그 일 있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걱정했던 거였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로헨은 부끄러운지 목을 흠흠 가다듬다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가자. 라리가 걱정해.”
“으응…….”
“이제 정말 어디 혼자 가지 마. 알았지?”
“절대 안 갈게.”
다행히 그 정도로 만족한 듯 로헨은 내 손을 흔들며 라리에게로 향했다. 다행히 라리와 로헨은 내가 나간 걸 안 지 얼마 안 된 듯, 라리는 로헨처럼 화내거나 하지 않았다.
의외로 라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던 로헨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순간 내게 시선을 집중할 뿐이었다.
***
“아이들의 교육을 제대로 시작하려 한다.”
일부러 자신의 일을 도울 때는 아이들과 따로 분리시켜 놓았던 대공이 기다렸다든 듯 입을 열었다.
“교육이요?”
“그래. 지금까지는 네게 모든 걸 맡겨 놨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으니까. 아이들에 맞게 교육을 시키려 한다. 괜찮을까.”
“대공 전하께서 그리하시겠다고 하시면 그리하는 거죠. 전 괜찮아요.”
“섭섭해할 줄 알았더니. 원래 아이들을 맨 처음 이곳에 두었을 때, 너에게 모든 걸 일임한다 했었으니까.”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처음에 적응 못하던 로헨도 이제 어느새 대공가의 모든 것들이 익숙해졌다. 글자도 모르던 아이들은 매일매일 내가 틈틈이 알려 준 덕분에 어느 정도 글자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가져다주는 책들도 꽤나 잘 읽게 되었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안다. 처음에 대공에게 아이들 곁에 내가 있겠노라, 아이들의 전반적인 것들을 내가 관리하겠노라 했던 건 대공비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던 그 찰나였다.
똑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대공 전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일정은 없던 걸로 아는데. 거기에 설사 일정이 있다 한들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문을 열고 들어온 보좌관은 꽤나 난처한 얼굴을 했다. 대공의 뒤에 언제나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남자였다. 존재감은 워낙 흐린 편에 속했고, 대공이 하도 일을 많이 시켜서인지,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자였다.
그리고 대공의 모진 말을 제일 많이 듣는 사람이었기에 안쓰럽다. 한국의 직장인으로서…… 그리 성격 좋지 않은 상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무나 잘 아니까.
그래서였을까. 보좌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셀세트록스 후작입니다.”
“……그자인가.”
나는 수도에 살지도 않았고, 귀족으로서의 교육을 받은 건 아니었기에 귀족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누가 누구고 누가 어느 가문이고. 하지만 저 이름은, 아니 가문의 성은 들어 본 적이 있다.
대공의 반응을 보니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 맞나 보다.
“저 나갈까요?”
“아니다. 볼 이유도 없는 자야. 그냥 돌려보내도록 해. 오늘은 바쁘다고.”
하지만 그 말이 전해지기도 전에 방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대공도 몸이 꽤나 큰 편인데, 그 남자의 몸도 꽤 컸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
그 사람은 대공비의 부친이었다. 셀세트록스 후작. 그래서 내가 그 이름을 알고 있던 것이다.
“허허. 별로 바쁜 거 같지 않은데, 시간 좀 내지 그러나. 대공.”
“우리 사이에 굳이 할 말은 없는 거 같습니다. 셀세트록스 후작.”
“없다니. 나는 할 말이 많을 거 같은데.”
“아니요. 하실 말씀이 있거든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와주세요.”
“몇 번이나 만나자고 청했는데 거부해 놓고, 참 우스운 말을 하는군.”
후작은 뻔뻔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소파에 자리 잡았다.
“그만 가주시죠. 억지로 끌어내는 건 남들 보기에 나쁘니.”
“억지로 끌어낼 이유가 있나. 내가 뭐 대단한 거 하자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만 나누자고 했을 뿐인데, 뭘 그리 예민하게 구나.”
그는 도리어 대공을 예민한 사람 취급했다. 그냥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인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왜 이 나라의 인간들은 안 보겠다는 사람 바짓가랑이를 붙드는지 모르겠다고.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내가 절대 나설 수 없는 자리 같았다.
그래서 나는 둘을 가만히 바라봤다. 물론 후작은 내가 있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매우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여기서 나가는 것도 웃긴 꼴이다.
“그 이야기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드리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대공비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니 다시 조사해라. 혹은 고작 그런 문제로 대공비를 내치려고 하나, 문제를 왜 만드나. 이번에도 또 제 잘못으로 밀어붙이고, 저를 잘못된 인간으로, 모자란 인간으로 만들려는 겁니까?”
그동안 당한 게 있는 듯 대공은 울분을 토해 냈다.
예상보다 대공의 반응이 과격한 건지 후작은 목을 흠흠 가다듬었다. 원래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던 듯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이 아니라 음…… 그래. 이번엔 뭐 내 딸이 잘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겠네.”
“이번에요? 지난번에도 잘못한 건, 잘못된 건 그 여자였는데, 마치 아니었단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흐흠. 그건…….”
“왜요. 론을 끝까지 대공가의 자식이라 밀어붙이려고요? 이제 그 멍청한 말을 들어 줄 이유 없습니다. 후작. 그러니 물러가시죠.”
대공이 이렇게 반사적으로 거부할지는 몰랐던 건지, 후작은 어색하게 웃었다.
“다 알고 있다던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게 중요합니까,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