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98)화 (98/99)

-98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샤 님.”

“네. 잘 부탁드려요. 레이아나 님.”

그런 우리 둘을 느낀 건지, 대신녀님은 내 손과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행동들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떻게 난 엄마를 본 적이 없는데,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걸까.

“자. 그러면 이제부터 아이샤의 공부는 레이아나가 해주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아이샤.”

“대신녀님…… 저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요?”

나의 인생은 비극이라 생각했다. 이 세계의 이름 없는, 비중 없는 사람이 된 것부터 비극이었다. 일찌감치 죽었을 목숨, 그걸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대공이 처음 나를 고아 소녀라 부르며 사사건건 무시할 때마다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은 이유는, 그럼에도 살아 있어서였다. 어떤 취급을 받아도 살아 있고,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그런 삶을 살아온 나였다. 그저 죽지 않으면 다행인 인생.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이번에 대공비에 대한 일이 끝나면 당연히 신전으로 와야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나로서는 이 순간이 꿈같았다.

“그럼. 대신녀는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내 말을 믿어도 돼.”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의 삶을 즐기렴.”

나는 즐기지 못한 삶을 너는 즐겨 주렴. 제대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단다. 신녀 공부를 하면서 자주 와 이야기를 해다오. 네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세상인 건지. 나도 이제 갇혀 살지만은 않을 거지만…… 늙은이가 볼 수 있는 세상과 어린 네가 볼 수 있는 세상은 다르니까.”

“네.”

“그럼 어서 친구들에게 가렴. 아주 소중한 친구들이잖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을 나섰다. 마음이 이상했다. 들어올 때만 해도, 사실 부탁을 하려 했다. 대신녀가 되기 위한 준비를 조금만 늦춰 줄 수 있냐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아니 조금이나마 더 있게 해달라고. 그 말을 하려 했던 나는 눈물이 찔끔 나려는 걸 애써 참았다.

“감사해요. 다음엔 애들이랑 올게요.”

“그러렴.”

그게 끝이었다. 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때마침 레이아나, 엄마도 내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뵈어요. 아이샤 님.”

“네, 레이아나 님.”

그게 끝이었다.

나는 그길로 바로 신전에서 나왔다. 엄마를 만났다는 기쁜 마음도 존재했지만, 내가 나로서 살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공가로 돌아가는 마차에서도 들뜬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랬는데, 잠깐 만에 마음 바뀌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냥 아이들과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얼른 돌아가고 싶다.”

가서 말하고 싶다. 가서 쌍둥이들을 꼭 껴안아야지. 그러면 로헨이 왜 이러냐고 질색하겠지. 그러면 그냥, 이라고 해야겠다. 벌써부터 로헨의 얼굴이 상상되었다. 라리는 그런 날 보며 언니야 좋다고 같이 껴안겠지.

이제는 다른 부담감 없이 쌍둥이들과 어울려도 된다는 기쁨에 자꾸만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그런 마음들 때문인지 대공가로 가는 마차는 유난히도 더 느리게 느껴졌다. 대공가에 도착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도착했습니다. 아이샤 님.”

마부의 말을 듣자마자 튕기듯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내 얼굴은 굳어졌다. 마치 정신을 깨우쳐 주는 것처럼, 제플리가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안녕. 아이샤.”

“…….”

소설에서 쌍둥이들과 친한 척하는 그 존재. 오히려 무조건 악역인 대공비보다 제플리 같은 존재가 더 머리 아프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경계해서인지 생각보다 꽤 잠잠했다. 그랬는데, 아예 내 기억에서조차 잊고 지냈는데, 그가 왜 여기 있는 걸까. 하필 오늘. 이제야 겨우 쌍둥이들과 미래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공에게 그것만 말하면 되는 거였는데 왜. 그가 여기서 등장하는 걸까.

“오늘도 인사를 받아 주지 않는 거야? 조금 섭섭한데.”

평소보다 더 냉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과거에 아이샤가 겪은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그런 안일한 생각을 가진 오늘, 신이 말하는 듯했다.

아직 미래는 오지 않았다고.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고.

“아이샤?”

내가 대답 없이 자신을 보자 그는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무리 대공이 날 잘 봐줬다고 하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공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다. 그런 사람을 일개 고아 소녀가 무시할 수는 없던지라 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제플리 공자님.”

“안녕. 네 덕분에 요새 대공가에 큰 파란이 일어나서 아주 재미있던 차였어.”

“그렇군요.”

“그런데 좀 반응이 섭섭하네. 왜 그렇게까지 날 미워하는 거야?”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당신이 그 예쁜 얼굴과 다정한 미소로 쌍둥이들을 현혹하고, 그걸로 쌍둥이들에게 대공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으니까.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저 상황에 맞춰서 조금씩 그 발톱을 숨기는 것뿐.

“딱히 싫어한 적 없습니다. 좋아한 적도 없구요. 싫지도 좋지도 않다면 그냥 관심을 끄고 교류를 하지 않는 게 좋다 생각했습니다.”

“되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나.”

언제나 배실배실 웃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변했다.

“사실이니까요.”

“그에 비하면 대공비 마마와는 꽤 잘 지낸 거 같은데.”

“그쪽은 싫어하니까요. 싫어하니 교류를 한 것뿐이고, 그게 전부입니다. 제가 혹시 뭔가 더 말해야 하나요? 대공가에 있으려면 공자님과 잘 지내야 한다든가 그런 규칙이라도 있을까요?”

난 멀뚱히 그를 바라봤다.

“그래도 조금은 섭섭한데. 난 그래도 너한테 꽤 도움을 준 것 같은데.”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뭐. 아주 미미하려나. 대공비 마마께서 그동안 대공가에 대한 건 신경 쓰지 않으시고 다른 곳으로 돈을 빼돌린다든가, 갑작스럽고 급작스럽게 너를 미워하고 너를 죽이려 할 때 내가 조금씩 도움을 보탰는데…….”

“……원래 공치사는 본인이 말하면 그 힘을 잃는 법이죠. 도움을 주셨다면 감사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으셨을 분이라 딱히 엄청 많이 감사하진 않네요.”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거부했다. 솔직히 좀 의아하긴 했다. 일이 쉽게 쉽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모든 게 술술 풀리긴 했다. 그런데 그게 제플리가 뒤에서 힘을 쓴 덕분이라니.

설사 그렇다 한들, 나는 그가 싫다.

“푸하. 정말 너 여덟 살 맞아? 왜 대공 전하께서 널 아끼는지 알겠네.”

“제가 조금 뛰어나서요.”

“대공 전하와 함께 있어서 그런지 뻔뻔스러움도 닮는 거 같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

“저는 되게 마음에 안 드는데. 제플리 공자님이.”

“너무 그렇게 미워하지 마. 솔직히 이 가문에서 불순물 같은 존재는 우리 둘이잖아. 난 너무 좋다고. 나 혼자만 그런 존재가 아니라서, 동질감이 든다랄까. 그런 의미로 우린 꽤 잘 어울리는 거 같네.”

“별로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여기까지 할게요.”

제플리는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칭찬. 그리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의미랄까.”

“이거 놔요.”

“곧 파란이 올 거야. 대공비 마마는 절대 이곳에서 쫓겨나지 않을 거야. 네가 원하는 게 그분의 파멸이라면…… 내 손을 잡는 게 좋을 거야.”

“…….”

난 그를 뿌리치려고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힘도 좋았던지라, 그 손이 뿌리쳐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이거 놔요.”

“도와줄게. 네가 원하는 걸 해줄게. 그러니까 나에게도 조금 시선을 다오.”

“……그럴 리 없어요. 난 당신이 싫어요.”

“왜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거야? 첫 만남부터?”

당신은…… 내 소중한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니까.

“싫어하는 데 이유가 있나요. 이런 모습들이 싫은 거예요.”

“……그래. 알았어. 어쩔 수 없네.”

그제야 그는 손을 내려 두었다.

“네가 나를 더 싫어하겠네.”

“네.”

“그래도 나 착해.”

“착한 사람은 말로 하지 않아요. 보여 주죠.”

“보여 줄게. 내가 착하다는 걸.”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쌍둥이들도 제플리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마음을 열었던 이들은 많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 싫다.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번엔 그의 손에 아이들이 놀아나지 않게 할 거다.

그때.

“뭐 해.”

갑작스러운 등장인물이었다. 제플리와 이야기하던 나는 목소리의 진원지로 급히 몸을 돌렸다. 로헨이었다.

“로헨…….”

“둘이 뭐 하고 있던 거야?”

로헨은 매우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무 짓도 하지 않기는. 내가 봤는데.”

“오해하지 마. 로헨.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제플리 공자와 잠시 이야기했던 것뿐이야.”

“이야기하는데 왜 머리를 쓰다듬어.”

이미 오해를 해버린 듯 로헨이 나를 향해 표정을 굳혔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로헨의 몸에서 불길한 검은 연기까지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무 일 없었단다. 로헨.”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로헨은 오해를 풀 거 같지 않았다. 다행히 제플리가 입을 열었다

“……아무 일 없었다고?”

“그냥 친하게 지내자고 내가 매달리고 있었어.”

“……왜 매달려요?”

“내가 아이샤가 마음에 들었거든. 그래서 친하게 지내자 했어.”

그 순간 로헨이 나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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