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97)화 (97/99)

-97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정신이 조금 멀쩡하지 못한 대공. 어린 쌍둥이들에게 제대로 교육조차 하지 못해서, 마음을 제대로 주지 못해서 아이들을 삐뚤게 자라게 한 원흉.

나는 그를 싫어했다. 

여전히 그가 싫다.

‘이렇게 감동 주기 있기야…… 정말…… 사람 마음 하나도 몰랐던 사람이면서.’

쌍둥이들의 마음을 조금도 몰랐던 사람이면서 왜 나를 감동시키는 건지 정말…… 정말…….

눈물이 나려는 걸 애써 참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걱정한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군. 혹여나 네가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거부하는 걸까 봐 걱정이 된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 보이니 말하지 않겠다. 대신 아이샤.”

“……네.”

“언제든 도움을 받고 싶을 때가 있으면 말하거라. 나는 너의 도움을 받고 싶으니까. 이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막지 않으마.”

내가 난감해한다는 걸 잘 알아차린 듯 그는 더 이상 다른 것들을 묻지 않았다.

“대신녀님께 가고 싶다면 마차를 준비해 주마.”

“네! 갔다 올게요.”

그의 손길이 참 다정했다. 나도 부친이 있었으면 이랬을까. 나도, 나도 보통의 가족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다정한 손길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랬더라면 나는, 나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았을까.

“잘 다녀오렴.”

‘아니야, 이건 내 것이 아니야.’

그의 다정함도 모두 쌍둥이 덕분에 얻는 것뿐. 언제나 세상은 혼자였다. 그리고 혼자인 게 싫지 않았다. 언제나 나는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자꾸만 차오르려는 간질간질한 감정을 애써 감췄다.

“아이샤.”

“네.”

“너의 복수는 언제든 도울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든 이야기하렴.”

“저에게…… 왜 그렇게 잘해 주시는 거예요?”

“너는 내게 소중한 것을 알려 주었거든. 돈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권력으로도 가질 수 없는 것을. 그러니까 너는 충분히 내 도움을 받아도 돼.”

솔직해서 좋네.

오히려 그런 대공의 말이 내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쌍둥이들이 있기에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쌍둥이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나는 스스로 그에게 도움을 청할 거다.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네!”

그러는 사이 대공은 종을 울려 밖에 있는 이를 불렀다. 마차를 준비하라고.

난 그가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향했다.

***

대신녀님이 보내준 신녀 출신 리렌이 함께 있어서이지 신전에 도착하고 나서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우리를 막는 이는 없었다. 대신녀님을 만나 뵙기는 되게 힘든 거라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이샤.”

언제나처럼 자애로운 표정이었다. 오늘도 정원에 있던 대신녀님은 이전보다 기분이 더 좋아 보였다. 가만히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찬란했다.

“대신녀님.”

하지만 날 부르는 대신녀님의 목소리에도 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이샤가 금방 올 거라 생각했어요. 잘 지냈어요? 표정을 보니 잘 못 지낸 거 같은데?”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녀는 나에 대해 꿰뚫어 보는 듯 단번에 내 상태를 파악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기분이 좋았다. 사실은 내가 버림받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오히려 지켜졌던 아이란 것도 알게 돼서 기뻤다.

대공의, 입양이 아닌 며느리로 대공가에 있어 달라는 말도 기뻤다.

그것들을 모두 할 수 없는 내 상황을 알면서도 그런 말들을 들어서 기뻤다. 하지만 신전에 오자 현실이 깨달아졌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이 순간 확실히 느껴진다.

그사이 대신녀님은 손을 들어 주변을 물렸다. 이전처럼 우리 둘만 있게 된 공간. 대신녀님은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샤?”

“아니요. 그냥…… 고민이 많아서요.”

“신전으로 올 준비는 하고 있는 거예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 말에 난 어색하게 웃었다.

“……네.”

“막상 일이 해결되고 나니, 조금은 세상을 더 보고 싶은 거죠. 아이샤.”

가까이 오라는 듯 대신녀님이 손짓했다. 난 어미의 품을 찾아가는 새처럼 그녀 앞에 무릎 꿇고 그녀의 손에 얼굴을 대었다.

“저는…….”

“사람의 욕심은 언제나 끝도 없는 법이죠.”

“죄송해요.”

마치 내가 지금 뭘 고민하는지, 뭘 생각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처럼 대신녀님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단호했다. 

“하지만 신은 인간의 그런 욕심을 이해하지 못하죠.”

역시 안 되는 거겠지. 아주 잠시 행복에 젖었는지도 모른다. 대공이 내 뒤를 봐주는 게, 내가 아이들 곁에 있을 수 있는 게. 잠시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꿈에 젖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네…… 욕심내지 않을게요.”

그런 아이 같은 내 속마음을 들켜 버린 듯한 기분에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조금만 힘을 보태 주면 다 할 것처럼 굴고선 이제 와 말을 돌리는 꼴도 우습긴 하다. 그래서 난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대신녀님이 보드랍게 내 머리 쓰다듬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어떤 생각이요?”

“신은 우리에게 길을 열어 준 게 아닌가. 우리의 반항을 어느 정도 용인해 주는 게 아닌가 하고요.”

“네……?”

“나에게는 영생을 주었고, 아이샤에게는 대신녀가 되라 했죠. 하지만 언제 되라 한 적은 없어요.”

난 가만히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건…….”

“조금 더 아이샤가 세상을 보고 와도 괜찮을 거란 말이에요. 대신녀의 부재가 생긴 것도 아니고 신탁이 내려온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신녀님은…….”

대신녀님은 이미 너무 오랜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대신녀님은 그 삶을 끝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지금 하는 저 말들은 그 말들을 완벽하게 뒤엎는 말이었다.

나에게만 너무 유리한 말들.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주어진 삶, 몇 년, 몇십 년 더 산다고 문제 될 게 있나요.”

“아…….”

“사실은 그동안 나는 신전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살았어요. 그게 맞다 생각했고, 대신녀이기에 모든 이들이 다 안전을 위해 가둬 둔 거죠. 하지만 이제는 그리 살지 않으려 해요. 조금은 세상 구경도 하고, 그렇게 살아볼까 해요. 그러니까 아이샤. 아이샤는 내가 겪지 못하는 세상을 조금 더 많이 보고 와줘요. 대신녀가 되면 한동안 세상 구경은 못할 테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입만 뻐끔거렸다.

“정말 그래도 돼요……?”

“완전한 자유는 아니에요. 그래도 신녀로서 계속 공부하게 신전에도 오고 그래야 해요.”

“저 정말…… 살아도 돼요? 정말…… 정말 그래도 돼요?”

“물론. 나 같은 후회는 하지 말렴. 아이샤.”

대신녀님은 무릎 꿇은 채 몸을 세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언제나 경어를 쓰던 대신녀님은 처음으로 편하게 대해 주셨다.

“아…….”

“나의 선택은 후회가 없었지만, 그래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있단다. 그러니 너는 나 같은 일을 하지 말렴. 신녀로서 공부도 계속계속 해야 해. 그것이 힘들다고 도망치면 그때는 그냥 이 자리에 앉힐 거야. 알았지?”

“네. 네. 그럴게요.”

“예쁘구나. 네 어미를 꼭 닮았어.”

나는 놀란 마음에 그녀를 바라봤다.

“아…… 제 엄마는…….”

“그것에 대해서도 궁금했던 거 아니니?”

“맞아요…… 그런데 알고 계셨어요? 대공 전하께서 오셔서 물어보신 거예요?”

“아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단다. 하지만 신전에는 내 귀와 눈들이 많아. 그들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뿐. 그리고 나는 네가 걱정이 된단다. 아이샤.”

나로서 살아도 된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애써 참았다. 목소리는 의도치 않게 떨려 왔다.

“그러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직 너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내 곁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단다.”

“대신녀님.”

“응?”

조심스럽게 입이 떨려 왔다. 엄마를 대신녀님이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그때부터 들었던 의문.

“다 알고 저를 거두신 거예요? 제 어머니에 대해 다 아시고?”

“아니. 너는 그저 너일 뿐이란다. 신의 선택을 받았기에 널 곁에 둔 거고, 문득 느꼈을 뿐이야. 네가 그 아이구나, 하고.”

“아…….”

“그런 말이 있단다. 보는 것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아주 어릴 적에 한번 보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알아볼 수 없었지. 하지만…… 그냥 느꼈단다. 어릴 적 내가 보내 준 아이가 너라는 걸.”

그렇구나. 그랬구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감사해요. 엄마를 지켜 주셔서…….”

“아니란다. 그러면 이만 돌아가려무나. 너의 소중한 친구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녀님은 자신의 무릎에 있던 종을 울렸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사람이 대신녀님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신녀님의 곁에 다가온 한 여자, 아니 신녀. 지난번과는 다른 신녀였다. 그리고 난 그녀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대신녀님이 말한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존재.

그 사람은…… 내 엄마였다. 그냥 느낌으로 느껴졌다.

‘엄마.’

나랑 그리 닮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같긴 하지만 그건 꽤 흔한 색이다. 그럼에도 난 그녀를 보며 확실히 느꼈다.

저 사람이 내 엄마라고.

“이쪽은 아이샤예요. 레이아나. 신녀 공부를 할 아이죠. 나를 자주 찾아올 것이니 잘 봐둬요.”

“네, 신녀님. 아이샤 님. 레이아나라고 합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가, 새하얀 얼굴이었지만 건강해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 그냥 울컥 눈물을 쏟을 거 같았다.

존재할 거라고, 나를 사랑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서 내 감정이 유난히도 예민해진 느낌이다.

“아이……샤예요.”

엄마. 저예요. 제가 엄마의 딸이에요. 엄마의 기억 속에 묻힌 그 아이가…… 저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