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조금은 아이같이 굴어도 된다.”
그 말에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나는 엄마가, 내 가족들이 나를 싫어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거라고. 그래서 신경조차 쓰지 않는 거라고.
특별한 날이 될 때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잠시 맡아 둔 아이들은 선물을 받곤 했다.
나도 받고 싶었다. 아주 작게나마, 작은 핀이어도 아니 길가에 핀 꽃이라도 좋으니까 가족에게 선물을 받고 싶었다.
사실 괜찮다는 건 스스로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괜찮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그렇게 내가 만들어 낸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뒀다. 고아 소녀. 모두가 싫어하는 아이. 그런 생각들을 매번 하면 스스로 무너질 거 같았다. 그래서 그랬는데…….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대신녀님께 물어봐도 된다.”
“아니요, 믿어요.”
“어쨌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제 출생이 별 볼 일 없는 건 맞겠네요. 제 부친은…… 누군지 모르겠으나…….”
“그자에게 복수하고 싶나?”
“복수…….”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감정을 알려 주는 게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네 부친이란 작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함구한 사람이다.”
소설 속, 아니 과거에는 내 부모라는 인물들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일들은 이번 생에도 몰랐어야 하는 게 맞다. 내 이야기는 이 시간 속에서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굳이 찾지도 않았고,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공에게 내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구나.”
“네가 복수를 원하면 해주마.”
“아…….”
복수라. 나를 지켰던 내 어머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직 부모자식 간의 사랑이라든가 이런 건 잘 모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사랑받았던 거 같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를 버리고 간 것도 모자라 날 죽이려고까지 한 나의 할머니. 그 모든 걸 알면서도 그냥 둔 내 부친이라는 인간.
그런 이들에게 나는 과연 복수를 하는 게 맞을까?
“저는…….”
그럴 필요 없어요. 제게 필요한 건 쌍둥이들이 잘 크는 거거든요. 그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을 뱉어야 하는데 소리 대신 눈에서 눈물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아이 참…… 왜 이러지.”
“어른이라 할지라도, 이런 사실을 알면 슬픈 게 당연한 거다. 그러니 울어도 된다. 슬퍼해도 된다.”
“아니에요. 슬픈 것보단 그냥…… 그냥.”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사랑받는 아이였구나. 내 엄마는 나를 지키려 했고, 내 아빠는 나를 죽이고 싶어한 거구나. 내게도 부모님이 있었구나. 복수, 하고 싶다.
“엄마는 괜찮아요?”
“응?”
“그런 집이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 후로 괜찮았던 거예요?”
“대신녀님이 보호하고 있기에 큰 문제는 없었던 듯싶더구나.”
더 이상의 말을 해주지 않는 거 보면 그게 끝이 아닌가 보다. 뭔가 있는 모양이다.
‘아마…… 대신녀님이 아니었으면,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큰일이 날 뻔한 거겠지.’
난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지 않으면 언제든 이런 일은 또 있을 수 있단다. 아이샤는 똑똑하니까 내 말이 뭔지 알지?”
“네…… 사실은 복수……하고 싶어요.”
마치 그는 내가 그 말을 하길 바라는 듯했다.
“사실 그 말을 기다렸단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아니고서야 여덟 살짜리에게 진실을 알려 줄 리도 없겠지. 원래 피도 눈물도 없는 대공인 건 알았지만, 어린아이에게 복수심을 심는 건 조금 의외긴 했다.
“네.”
“하지만 어린아이가 복수를 할 수도 없고, 이것 참 난감한 상황이구나.”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실컷 복수하라고 종용해 놓고 이제 와서 복수를 할 수 없는 그런 난감한 상황이라니.
“그렇지? 어린아이인 네가 무슨 복수를 할 수 있겠어. 네 엄마도 기억이 없으니 같이 합심할 수도 없고…….”
턱을 쓰다듬는 그의 표정이 조금은 묘했다.
“그래서 내가 그 복수를 대신 해주려 한단다.”
“정말요?”
너무나 의외였다. 그가, 대공이 내 복수를 대신 해준다니.
“하지만 복수를 하려면 말이지, 이유라는 게 필요하단다.”
“이유요?”
“갑자기 대공가에서 나서서 그자를 처단할 수는 없잖니. 그러니까 그 이유를 만들어야 한단다.”
“아……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필요하면 제가…… 나중에라도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그는 전혀 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음에도 그는 자신이 뜻한 바를 말하려는 사람처럼 입을 움직였다.
“난 그 이유를 만들려고 해. 사실 너를 찾으러 데리러 갈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기도 하고, 네 복수를 도와도 되는지 물어보기 위해서 말을 꺼내기도 한 거란다.”
“아……? 아까 입양은 안 하신다고…….”
“맞아. 입양 말고 너를 내 며느리로 생각 중이다. 로헨이 너를 좋아하기도 하고, 라리도 너를 좋아하니까. 물론 언제든 나이 먹고 네가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저 너를 보호하기 위한 방도일 뿐이니까.”
사람이 너무 놀라면 귀가 멍해진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걸까. 난 소처럼 눈만 깜빡였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사실 나도 편안하고 안온한 삶을 바라서, 그래서 이곳에 있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대공이 하지 않은 말이 마치 한 것처럼 들리는 게 아닐까. 그런 수많은 물음과 궁금증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아까는…… 제 출생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한 건, 혹여나 너를 데려갈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란다.”
“아…….”
“어떠니. 나의 며느리가 되어 주겠니.”
내게 너무 좋은 일이었다. 며느리가 된다면 쌍둥이들 옆에 있을 수 있다. 더 이상 내 신분이 문제 될 게 없다. 아니, 신분이 문제가 될지라도 대공가가 나를 지켜 주는 방패이자 담벼락이 될 거다. 그러면 아이들을 구함에 있어, 아이들의 미래를 함께 지켜 가는 데 있어 더 편하고 좋은 길이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나의 선택이, 나의 걸음걸음이 이곳까지 나를 이끌었지만 난 여기까지다.
내 삶은 이들과 완벽하게 달랐다. 미래를 담보로 나는 이 시간을 허락받았다. 로헨과 라리에게 새로운 삶을 줄 수 있는, 내가 과거에 한 짓을 용서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을.
그렇기에 난 그 신의 뜻에 따라야 한다. 설사 부당하더라도, 설사 눈앞에 있는 달콤한 저 말을 꿀꺽 삼키고 싶더라도.
“그래도 저는 신녀가 되어야 해요. 신녀는 결혼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왜 신녀가 되어야 하는 거지?”
“그건…….”
삶을 다시 허락받았으니까. 신은 내 시간을 돌려주었고, 자신의 뜻을 받들길 바라니까.
“제안은 감사해요. 하지만 이게 제 뜻이에요. 엄마에 대해 알아봐 주셔서 감사해요. 복수는 제가 스스로 해볼게요.”
“…….”
“정말, 정말 감사해요. 살면서 어른에게, 이렇게 다정함을 받은 적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순간 너무 떨렸어요. 너무 감사했어요. 절대 싫거나 해서 거부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저에게도 제 길이 있으니까 그 길을 가려는 것뿐이에요.”
혹여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죄송해요…….”
대공이, 그 오만하고 콧대 높은 사람이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데 나는 그걸 거부해 버렸다. 손이 조금씩 떨려 왔다.
혹여나 기분 상하게 한 걸까. 언제나 당당했고, 언제나 그에게 말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았던 내가, 내 마음이 불안했다.
“기분 나쁘셨죠. 저는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초자연적인 이 현상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설명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난 말할 수 없다. 신의 계획을 말했다가, 그 여파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 거기에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이샤.”
대공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낮아졌다. 순간 불안감이 느껴졌다.
‘뭘 무서워해. 어차피 나는 이곳을 떠날 건데…….’
내 힘을 길러 올 것이다. 이번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신전에 가서 신녀 후보가 되어 내 편을 만들 거다. 쌍둥이들을 위해서. 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그러기 위해 떠나기로 마음먹어 놓고, 그렇기에 굳이 저런 말에 혹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 놓고 이제 와 뭘 그리 두려워하는 걸까.
그때. 대공의 큰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바보구나.”
“아…….”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나는 네게 제안을 한 것뿐이다. 제안은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도, 죄송해할 것도 없다. 고마워할 것도 더더욱 아니지. 이건 나를 위해서 네게 제안한 거기도 하니까.”
“대공 전하.”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네가 있는 게 좋다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이를 시키는 것보다 똑 부러지는 너에게 대공가의 일들을 맡기는 게 좋다고 또 생각했지. 그런데 이게 나중에 말 나오면 피곤해질 거 같으니까, 널 며느리 삼아서라도 곁에 두고 있고 싶었던 거란다. 그러니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