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95)화 (95/99)

-95화-

피식 웃은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칭찬 받고 싶지 않아요…… 대공 전하의 칭찬에는 항상 다른 것도 딸려 오더라구요.”

난 앞에 놓인 서류들을 슬쩍 흘겼다.

“그만큼 네가 유능하단 거 아니겠니.”

“……처음에는 절 되게 못 믿으셨는데…… 이렇게 저한테 이것저것 맡기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너만큼 내 아이들을 위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부터 노력해서 내 아이들의 미래가 되어 다오.”

한마디로 어느 경우에서나 쌍둥이들을 위해 살라는 소리였다.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아이들의 미래가 될 거예요.”

절대 소설처럼 슬픈 일이 벌어지지 않게. 어지간해선 솔직히 여주도 쌍둥이들과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삐뚤어진 마음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되니까.

난 여주가 싫다.

여주는 쌍둥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어릴 적에 당한 학대의 기억들 때문에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 그걸 알면서도 여주는, 그 서사에 많은 힘을 실어 주었으면서도 여주는…… 황태자가 쌍둥이들을 죽이는 그 순간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말리지 않았다.

나아가는 걸음걸음이 지옥 같았던 쌍둥이에게, 온통 가시밭길 같은 길에 처음으로 피어난 꽃이면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원했고, 바랐는지 알면서.

여주인공을 납치한 건 다른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으로 집착하는 것밖에 모르는 아이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쌍둥이를 버렸다.

그래서 난 그 아이들의 미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나아가는 걸음걸음에 가시밭길이 펼쳐진다면, 그 밭을 고르고 골라 가시들을 모두 없애고 비료를 뿌릴 거다. 걷는 모든 길들마다 꽃이 피기를, 꽃길만을 걷길. 내가 그걸 해줄 거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

“그래. 아이들의 미래 좋지.”

“하지만 대공 전하의 미래가 될 생각은 없어요.”

“응?”

“대공 전하를 대신할 생각은 없다는 거예요. 저는 저로서 아이들의 미래가 된다는 거예요.”

대공비처럼 바보는 아닌 듯, 대공은 단번에 내 말을 알아들은 듯한 표정을 했다. 도리어 뿌듯한 표정마저 짓고 있다.

“그래. 너와 나는 다르지.”

“행해야 할 것도 다르죠.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과거에 이런 일은 없었다. 대공비가 쫓겨날 정도의 위기도 없었고, 그저 시간이 지나 찬찬히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 그녀는 자신의 궁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미래가 바뀌었기에 현재도 바뀌어야 한다. 이번에는 대공비가 멍청한 짓을 해서 이렇게 넘어갔다지만 앞으로 모든 일들이 이런 식으로 좋게 좋게 흘러가란 보장은 없다. 대신녀님의 말대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거니까.

“무슨 말이지?”

“저 나가려 해요.”

“가출을 정식으로 선포하는 건가. 아니면…….”

“가출이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지내려 해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 내가 불편하게 한 건가? 너무 일을 많이 시킨 건가? 고되나? 하긴 고될 만해. 하긴 내가 과중한 업무를 주긴 했지. 너무 똑똑하기도 하고, 어린애 같지도 않은 게 너무 신기해서 욕심을 부렸나 보군. 그러면 일을 줄여 주도록 하지. 그렇다 해서 당장 일을 줄일 수는 없는데…… 흐음.”

턱까지 쓰다듬던 대공은 큰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당분간은 이 일을 유지하다가 차차 할 일을 줄여 주마. 어떻겠느냐. 이 정도도 힘들려나.”

그는 말하면서도 영 불안한 건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냥…… 이제는 나갈 때가 된 거 같아요.”

“왜? 왜지? 그동안 힘들어서 그렇구나. 이해한다. 다 이해해. 하지만…….”

“신전으로 가려 해요.”

“신전? 갑자기? 신녀라도 되겠다는 것이냐.”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진실을 말해야 할까.

“네.”

“왜 갑자기? 신녀가 되어 봐야 속세와 단절하고 살아서 재미가 하나도 없다. 매번 뭘 할 때마다 눈치 봐야 하고. 얼마나 재미없고 재미없는 일들의 연속이겠어. 그러지 말고 대공가에 있거라. 원하면 입양도 해주마.”

“저를 입양해 주신다고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말을 바꿨다.

“아니다. 입양은 좀 그렇지.”

하긴. 내가 생각해도 고아인 나를, 부모도 모를 나를 입양하는 건 좀 그렇다. 기대도 안 했던지라 나도 그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샤. 넌 네 부모에 대해 알고 있나?”

“글쎄요.”

어릴 적부터 기억력은 타고났다. 그래서 나는 내가 버려지던 순간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조금의 눈물도 아쉬움도 슬픔도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곳에 버려졌다든가, 나중에 찾아올게라는 그런 말들도 없었다.

그저 나는 버려졌다.

그게 전부다.

“모친이 보고 싶지 않나?”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

“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거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으니까요.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각기의 사정이 있었겠죠. 하지만 그 사정이 있었다 해도 8년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도 연락도 하지 않은 거 보면…… 내가 보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요.”

그것에 대해 슬픈 감정은 없다. 낳는다고 갑작스럽게 없던 모정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각기의 사정이 있었겠지 하는 마음뿐이다.

“굳이 나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서 나란 존재를 알리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까 대공 전하도 굳이 찾지 마세요.”

“으응?”

“억지로 그분에게 저를 상기시켜 줄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그런 수고 하실 필요도 없으시고요.”

혹시나 해서 말을 꺼내 봤는데, 대공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뭔가 찔린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는 거 보니 아무래도 찾고 있었나 보다.

아니, 이미 찾아낸 걸지도 모른다. 부모라는 말 대신 모친이 보고 싶지 않냐는 거 보면. 아무래도 찾은 모양이다.

“찾았어도 말씀 안 해주셔도 돼요.”

“그래…….”

“저는 제 출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저예요. 그리고 저는 누구보다 쌍둥이들을 아끼고요.”

“그래. 그렇지. 너만큼 쌍둥이들을 위하는 사람은 없지. 그런데…… 하나 말해 주자면…… 난 네가 신전에는 가지 않길 바란다.”

“왜요? 그곳에 제 엄마가 있어요?”

설마 해서 물은 말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냐 말하다가 갑자기 신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보면.

“정말 눈치는 빠르다니까.”

“너무 눈에 보이는 행동들을 하셔서요. 그래서 그곳에 제 엄마가 있는 거예요?”

“글쎄?”

“확실히 말해 주세요.”

“말하면 가지 않을 것이야?”

“아뇨, 모르는 척해야죠. 피해야죠. 적어도 그렇게 만나고 싶진 않거든요. 나중에 누군가 우리에게 운명이니, 그래서 만난 거니 그딴 소리 할까 봐 무섭거든요.”

차분한 내 말에 그가 황당한 듯 웃었다.

“정말…… 아이 같지 않다니까. 그러면 부탁이 하나 있다.”

“신전에 가지 않는다든가 그런 건 안 돼요.”

“물론. 이건 이야기를 다 하고 말하마. 네 엄마에 대한 이야기.”

역시나 알아 왔던 게 맞구나. 조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린아이다. 그렇기에 엄마가 완전히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끔 가다 몸이 반응하듯 엄마가 보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살면서 자꾸 떠오르는 그런 존재들이 있다. 굳이 기억한다 한들 변하는 게 없고, 내가 막상 찾아간다 해도 반응은 뻔할 거기에 나는 억지로 고개만 끄덕였다.

신전에 가야 하는 상황이면, 그래도 내 모친에 대해 알고는 있어야 할 거 같으니까.

“네 모친은 신녀다.”

“그렇구나.”

“어떤 감흥도 없어 보이는구나.”

“네.”

“신전에서는 신녀의 결혼을 금기시한다. 신관은 자유롭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데 반해, 신녀에게는 참 부당한 처사지. 어찌 되었든 네 모친은 신관과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해서 네가 생긴 거지.”

“진부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네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뭐 그런 건가.

“네 부친은 너를 책임지겠다고 하고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네 모친과 너를 버렸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렸지. 네 모친은 배가 점점 불러 왔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도망갈 생각을 했단다. 하지만 가족도 없는 네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결국 그걸 대신녀가 알아차린 거야.”

“대신녀님이요?”

“네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대신녀에 대한 말이 나오니 더 놀라는 것 같구나.”

“그건…… 뭐…… 어쨌든…… 대신녀님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지.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그 아이를 그대로 신전에서 키우려 했으나…… 네 부친의 엄마, 그러니까 네게 할머니겠구나. 할머니가 알게 된 거야. 그래서 문제가 생길까 봐 너를 죽이려 했어.”

나는, 진부한 과거사 따윈 없을 줄 알았다.

내 기억 속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나를 버리고 주저 없이 떠난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구나. 그 엄마가. 나를 버리고 간 게, 엄마가 아니었구나.

“그걸 막다가 네 엄마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기억을 잃었지. 참 재미없게도. 결국 대신녀가 너를 고아원으로 보내고 모든 걸 함구했단다.”

“……그럼 내 엄마는…….”

“네가 그렇게 미워하지 않아도 돼. 너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너를 누구보다 지키고 싶어하던 사람이니까. 너는, 지켜진 아이다. 다른 이들로부터. 그러니까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렴. 굳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신녀가 되거나 그러지 않아도 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과 함께 눈가가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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