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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94)화 (94/99)

-94화-

명백하게 차갑고, 차갑도록 매정한 말이었다.

남들이 보면 원수 사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냉랭함이었다.

“맞습니다. 저는 미쳤습니다. 이런 위기가 다가왔는데 제가 안 미치고 견디겠습니까?”

“위기? 고작 그런 게 위기?”

“네. 제 어머니께서 뭘 그리 잘못하셨습니까.”

“어디서 무엇을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하고 나가거라. 나의 인내심도 여기까지니까.”

당장이라도 무언가 말할 것처럼 숨을 내쉬던 그는 겨우겨우 마음의 진정시키며 손을 저었다.

“인내심이요? 저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어요. 얼마나 더 하셔야 합니까.”

“……뭐?”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자식들이라고 쌍둥이들을 데려온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밖에서 낳은 애들인데 아버지의 자식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

침묵의 이유는 다른 이유이건만, 론은 자신의 말이 통한다 생각한 건지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 어머니께서는 그런 아이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저 고아까지요. 그런데…… 그런데 어머니를 내쫓으시다니요.”

“론.”

“네.”

“더 할 말 있나?”

“네. 할 말 많습니다. 많고 말고요. 이렇게 된 거 더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대공가를 위해 평생을 애쓰신 분이십니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그저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온 애들조차 품은 분이시라고요. 버릇도 없고 예의도 없는 저 애에게조차 사랑을 나눠 주신 분인데…… 왜, 왜!”

보던 것들을 내려놓은 대공은 가만히 론을 응시했다.

“누가 너에게 그 말을 했는지는 확실히 알겠군. 대공비가 다 말한 모양이야. 자신은 억울하다고.”

“……그게 중요합니까?”

“그래. 중요하다. 네 덕분에 대공비라는 여자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적어도 이곳까지 달려오기 전에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지. 멍청하게도 대공가에서 교육이라는 걸 받은 자가 이렇게까지 멍청한 짓을 할 줄이야. 쯧. 선생이란 것들부터 다 갈아엎어야겠군. 로헨과 라리를 교육시키기 전에.”

이미 대공에게 있어 론은 전혀 중요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론도 그걸 알아차린 듯하고.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거기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달해 줄 이들이 모두 갇혀 있어서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들 또한 죄를 지은 자들이란 소리다. 대공비를 비롯해 그곳에 있던 모두가 말이다. 적어도 머리라는 걸 장식용으로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그쯤은 생각할 만한데. 아무리 제 어미의 편을 들고 싶어도.”

더 이상 대공은 참지 않았다. 그리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던 그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미워서, 그래서 그런 거잖아요. 어리다 해도 저도 알 거 다 압니다. 어머니와 사랑해서 결혼하신 게 아니라서 언제든 내쫓으려 하셨다고. 핍박하셨다고.”

“푸하. 정말 재미있어. 핍박? 과거 이야기까지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대공비가 되어서 나를 핍박한 게 네 어미다.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았지만 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평생 대공가를 위해 노력을 해? 여덟 살짜리 아이보다도 대공가 안주인으로서의 운영을 더 못했는데 뭘 했다는 거지?”

“…….”

“또, 아이들을 품어? 품으려고 한 자가, 쌍둥이들을 죽이려고 하던가?”

“그건 오해라 하셨습니다. 다 오해라고.”

“무슨 오해? 이번에도 다른 이가 누명을 씌운 거다 뭐 그딴 식으로 말하나 보지?”

론은 바들바들 떨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뻔한 거 아니겠어요? 저게 그런 거겠죠.”

“네 어미와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고아 소녀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고아 소녀가…… 네 어미가 사는 궁 아래에 수입조차 금지된 식물을 어떻게 키울 수 있다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걸 라리의 모든 인형에 넣을 수 있다는 거지? 그리 당당하면 설명해 보거라. 론.”

“그건……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정말…… 멍청하긴. 정말 나를 하나도 안 닮았구나. 결국 징징거리는 꼴이 애만도 못 해.”

어떻게서든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듯 론은 열심히 입을 움직였지만, 아이처럼 우기는 꼴은 더욱더 상황만 나쁘게 만들 뿐이었다.

“네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게 오해라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네가 증거를 찾아왔어야지. 멍청하게도. 정말 실로 멍청해.”

“……멍청하고 아둔한 건 아버지이십니다.”

정말 미쳐 돌아가는지 론은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꺼냈다. 너무 놀라 들고 있던 깃펜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새하얀 백지에 검은 잉크가 서서히 물들어 갔다.

“내가? 내가 멍청하고 아둔하다? 정말 신선한 소리로군. 내게 그런 오만한 말을 하는 건 너뿐일 것이다.”

“결국 어머니만큼 이 대공가를 위하는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되실 겁니다.”

“그렇게 대공가를 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어 와서는 내 아이라고 하고, 그 아이를 대공자로 올리려고 했을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그간 정이 있어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말이다. 이제는 안 되겠구나. 별것도 아닌 게 내 자식들을 욕되게 하고, 그 아이들을 보호해 주려 본인 목숨도 내놓은 아이에게 모든 걸 떠넘기려고 하는 꼴은 더 이상 못 보겠어. 개새끼를 돌봐 줬더니 내 자식들을 물려 해?”

그의 말투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졌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나도 차분해졌다. 이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지만 두 남자는 나란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 다른 이들은 들으면 안 될 법한 이야기들을 계속 하기 바빴다.

“지금…… 저는 단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자식이 아닌 건 그 쌍둥이들입니다.”

“대공가의 핏줄치고는 무엇 하나 뛰어나지 않고, 나를 조금도 닮지 않은 건 너다. 부진아 소리를 듣고 자란 론, 너라고.”

“……그건, 아직…… 아직 힘을…….”

“왜 그다지도 자신은 아무 힘도 없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본 적은 없나?”

“늦을 뿐이라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는 그저 조금 느린 것뿐이라고…… 늦게 개화할수록 더 크게 피어날 거라고 하셨습니다.”

“느린 게 아니라 내 자식이 아니기에 대공가의 힘은 어떤 것도 발현시키지 못한 거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나? 아주 어릴 적부터 너를 키운 건 나인데, 왜 너는 대공자가 되지 못했는지?”

론은 입술만 바들바들 떨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저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어머니와 똑같이? 아버지의 자식인지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더러운 핏줄의 쌍둥이들을 보고 나니…… 저희가 필요 없어지신 겁니까?”

“좋구나.”

“…….”

“그렇게 반항하는 게 아주 좋아. 그래야지. 인정해 버리면…… 너조차 다 알고 이러는 거라 내가 착각하지 않겠느냐. 론, 잘 들어 보렴.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존재는 바로 너란다. 나도 믿지 않았어, 너처럼. 설마 대공비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품고선 내 아이라고 속였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어쩌다 보니 대공의 곁에 항상 붙어 있었던 내가 너무나도 잘 예상한 일.

“어머니가 그랬을 리 없어요!”

“나도 그렇게 믿었지. 하지만 네 부친이라는 작자가 직접 찾아왔더구나. 꾸준히도 왔어. 나와 꼭 닮은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지닌 이로 구할 정도로 네 어미는 철저했으나 그 망나니를 죽이지 못했기에 모든 건 다 밝혀졌지.”

“아니요. 아니에요.”

“일부러 보란 듯이 대공가 주변에서 숙식하며 술집에서 온갖 소문을 내는데…… 모를 리가 없지. 그래서 모든 걸 조사하니 딱 맞더구나.”

“아니라고요!”

“나도 잘 모르는 네 몸에 있는 점의 위치까지 알던데?”

론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네 어미한테 가서 물어보거라. 네가 누구의 자식인지. 정말 대공가의 자식인지.”

“…….”

“그럼 꺼지도록. 론. 네 어미처럼 방에 갇혀서 지내고 싶지 않다면 이런 무례는 끼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 자식도 아닌 이에게 베풀 친절은 여기서 끝났거든.”

어쩔 줄 모르던 론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몰아가던 론은 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이게 사실이 아니면…….”

“아니면 어쩌겠다는 거지, 론? 멍청하게도 너는 대공자도 아니고 대공도 아니다. 그런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거지?”

“…….”

제 어미처럼 오로지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론. 가진 것도 없이 그저 기득권층으로 태어나 당연한 듯 누려 온 것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대공가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막상 밖으로 나가면, 뒷배경 하나 없이 밖으로 나가면 나나 론이나 비슷할 게 뻔하다.

결국 론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 믿지 못하겠으면 네 어미에게 직접 묻거라. 원한다면 네 아비도 불러 줄 테니, 원하면 말하거라.”

“…….”

“그리고 네 어미한테도 전하거라. 허튼짓 한 번만 더 하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꼭 전하고.”

그게 전부였다. 더 이상 말해 봤자 자신만 불리해질 걸 알았던 듯 론은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멍청한 놈. 가만히만 있었어도…… 아! 네가 있었구나.”

혀를 끌차던 대공은 뒤늦게 나를 발견한 건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 있는지 알고 말씀하신 거 아니세요?”

“맞다.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평생을 대공가에서 교육받은 론보다 네가 훨씬 낫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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