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93)화 (93/99)

-93화-

대공비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지…… 지금……!”

우리 로헨 다 컸네. 대공비 앞에서 저렇게 말하다니. 스스로 대공가의 핏줄이라 말하다니. 마음 한편에서 뿌듯함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잘하지 그랬어. 뭐. 어차피 처음부터 잘할 생각조차 없었잖아. 아이샤를 이용하려고 했으니까. 얼마나 모자라면 여덟 살짜리를 이용하려 해.”

“……제 아비를 닮아서 아주…… 싸가지가 없구나.”

“응! 그거 자기소개야. 아줌마.”

로헨은 비죽비죽하며 그녀를 놀리기 바빴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거 같은 걸 겨우 참았다. 그리고 대공비 앞으로 갔다.

“다 자기가 한 대로 돌려받는 거예요. 대공비 마마. 그리고 왜 안 죽었냐 그랬죠? 제가 특별하거든요. 누구와 달리 저는 신께서 특별히 선택한 사람이거든요.”

“뭐?”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와 달리 당신은 뭔데요? 대공비 자리에서 쫓겨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잖아요. 앞으로 잘 생각하도록 해요.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작 어린애일 뿐이라고 생각한 저도 그저 어린아이는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저 신분으로, 살아온 배경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이런 말로 대공비가 나아지진 않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부친에게 나에 대해 말하게 될 때, 이 부분을 말하게 만들기 위한 방도였다.

‘만에 하나, 아주 만에 하나…….’

이번에도 그가 나서서 모든 일이 무마된다면…… 대공비가 쫓겨나지 않는다면 그 후를 봐야 한다.

그걸 위해서 나는 아주 작은 힌트를 그녀에게 주었다. 건드릴 거면 제대로 건드리라고. 하지만 신이 선택한 아이를 쉽게 건드리지 못할뿐더러, 그런 내가 쌍둥이들을 지키고 있으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는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걸 경고한 것이다. 

“그러면 끌고 가도록.”

가만히 우리 이야기를 듣던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잠깐만. 당신…… 내 말 좀 들어 봐요. 우리 부부잖아요? 네? 혹여라도 이렇게 나를 대했다는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당신도 난처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상관없다.”

“아니…… 그게…….”

“소문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남들 시선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그저 그게 늦었을 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으니 끌고 가도록. 그래도 대공비니까 아주 극진히, 자신의 궁, 자신의 방 안에 가둬 두도록. ”

“네. 전하.”

대공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또한 대공비의 궁에서 일하던 모든 이들은 감옥에 처넣도록. 한 명, 한 명 고문해서 진실을 밝힐 테니.”

“네.”

“그럼 우리는 가도록 하지. 아이샤. 로헨. 라리.”

“네!”

라리는 기다렸다는 듯 내 팔에 매달렸다. 혹시나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들은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반짝 빛내며 내 팔을 꽉 잡았다.

“언니야. 이제 어디 가면 안 돼? 라리는…… 언니 잃을까 봐 너무 무서워. 위험한 일 하면 안 돼.”

“응. 위험한 일 이제 안 할게.”

“어디 안 간다는 말에는 대답 안 하네.”

그때 오늘따라 유난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로헨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건…….”

“그냥, 위험한 일만 하지 마.”

뭐라 더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로헨은 내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며칠 사이 키라도 더 큰 듯, 나보다 한 뼘이나 더 큰 로헨은 손까지 커버린 것 같았다.

“어…… 어…….”

“그래서 아이샤, 몸은 괜찮나.”

대공의 방으로 향하는 길. 대공은 그래도 내가 걱정되는 듯 꽤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아마도요! 저 정말 특별해서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없게 하마.”

“저는 괜찮아요. 그냥 애들이 힘든 일만 없었으면 해요.”

그 말이 무엇인지는 대공이 더 잘 알 것이다. 과거 소설과 달리 이번엔 나의 개입으로 어찌어찌 잘 끝났지만, 모든 일들이 다 이렇게 잘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더 위험한 일들이 생길 수도 있고, 대공이 지켜 주지 못할 일들도 분명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은근슬쩍 대공을 압박한 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달라고.

“노력하지. 아니. 없게 하마. 내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네게도…….”

“네!”

대공은 꽤 깊은 다짐을 한 듯했다.

그게 끝이었다. 그런 일을 겪어서인지 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더 이상 고아 소녀라고, 더 이상 신분을 알 수 없다고 내가 따로 자는 일은 없었다. 마치 삼 남매라도 된 것처럼 대공은 그렇게 나를 배려해 주었고 그날로부터 며칠이라는 시간이 더 지났다.

다 끝날 때까지 다른 말을 하지 않으려는 듯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대신 안전을 위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대공의 방에 머물러야 했고, 아이들은 조금씩 공부를 시작했다. 전반적인 건 내가 가르쳤지만, 그 외에 내가 가르칠 수 없는 검술이라든지 예법 같은 건 따로 선생이 붙었다.

그리고 난 여전히 대공비가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젠 제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뭐를 말이지?”

“이거요. 이거 다 대공비 마마 보여 주기용으로 하던 거 아니었어요?”

“시작은 그러했으나, 지금은 편해서 말이지. 꽤 일도 잘하는 거 같고.”

“어린아이에게 맡기는 거 좀 그렇지 않으세요?”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였다. 이런 일들을 어린아이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보통의 경우를 훨씬 벗어났으니까. 그래서 물은 거였는데 대공은 꽤 단호했다.

“전혀? 능력이 있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지?”

“아아.”

“그리고 너 꽤 잘한다. 아. 혹시 하기 싫어서 그런 건가?”

“그런 것보단…….”

“하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주도록 하지. 봉급을 주마. 그러면 괜찮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싫다고 할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알겠어요. 봉급은 주지 않으셔도 돼요. 이곳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답받고 있는걸요.”

혹여나 나를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볼까 봐, 돈이면 뭐든 하는 사람으로 볼까 봐 급히 말을 덧붙였는데, 대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을 하면 정당한 대가를 주는 건 당연하지. 그러니 그리 생각하지 말도록.”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난스럽게 예민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제외하곤 다른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게 확실했다. 그래서 이런 모습들이 참 이상했다.

편안해 보였고, 다정해 보이는 그가. 조금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잃어버린 감정을 찾은 것처럼,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몰라서 우물거리는 모습이 아이 같다.

“칭찬 감사해요.”

“칭찬?”

“이거요.”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그의 손을 손가락질했다.

“아, 이건…… 그냥 장해서.”

“그게 칭찬이죠. 아이들은 이런 거 좋아해요. 피부와 피부가 맞대면서 느껴지는 온기를, 그리고 그걸 통해 느껴지는 긍정의 감정을요.”

“라리와 로헨도 좋아할까?”

“그럼요.”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쌍둥이들과 어떻게 지낼지에 대한 생각들뿐인 거 같았다.

“걱정 마세요. 이제 마음 많이 열었잖아요. 아이들이. 지금도 잘해 오셨으니까, 지금처럼 하시면 돼요.”

“……고맙다. 네 덕에 아이들과 확실히 친해진 느낌이야. 로헨은…… 조금씩 내게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대공비 앞에서 대공이 우리에게 보인 행동들은,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이렇게만 유지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아이들이 나쁘게 자랄 일도 없겠지?’

과거와 현재는 확실히 달라졌다. 소설 속에서 비참한 미래를 맞이했던 쌍둥이들. 하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달랐다. 대공은 진심으로 아이들을 아껴 주고, 대공비가 몰락했으니까.

‘정말…… 괜찮겠지.’

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다. 대공비에게도 말했으니까. 신전이 아이들의 뒤에 있다고. 그러니 별일 없을 거다.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곳은 대공 전하의 방입니다.”

“이거 놔!”

하지만 문을 연 사람의 모습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문 여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래도 저지를 당한 모양이다.

“누구지.”

결국 불편한 기색을 한 대공이 문 쪽을 바라봤다. 그제야 시종에 의해 저지를 당하고 있던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론이었다.

“왜 찾아온 거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너무 가혹하세요!”

아무래도 제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야 들은 듯, 론은 큰 상처를 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물론 그런 얼굴을 한다 한들 불쌍해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론은 쌍둥이들을 무시했고, 추후 쌍둥이들을 더 힘들게 할 근본 원인이니까.

“무어가 말이지?”

“어머니가 뭘 그리 잘못하신 겁니까.”

공작의 옆에서 원치 않는 대공가의 서류들을 살피던 나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왜 이 집안 일에 이렇게 깊게 참여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여기만큼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으니…….’

“수도 없이 많은 잘못을 했다. 그러니 물러가도록, 론. 너에게 이 방문을 그리 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의 무례는 넘어가 줄 테니까…….”

“무슨 잘못이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어머니가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는 겁니까?”

“내 자식들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저는 자식 아닙니까?”

“뭐?”

“저 또한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그런 제게서 어머니를 빼앗는 게, 위기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대공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제 어미를 닮아서…… 미쳤구나.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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