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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92)화 (92/99)

-92화-

대공의 분노는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다. 이런 걸 하려고, 저자를 가차 없이 죽이려고 우리들의 눈과 귀를 막은 거구나.

그래도 그는 우리를 배려해 주는구나.

예상치 못한 다정함에 놀랐고, 예상치 못한 단호함에 또 한번 놀랐다.

“말해 보라고. 대공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대는 아무 죄도 없다, 그런 말들을 더 해보라는 거다.”

“정말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이건 다…….”

“그래. 그렇게 우기도록 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다. 이건 누군가의 모함이다.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도록 해. 그러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그대의 목을 비틀어 버릴 거 같으니까.”

“……결국 증거 없이 내게 이러는 거잖아요. 여덟 살짜리 꼬마가 하는 말에 신빙성이 있다 생각해요? 평민 출신 기사가 하는 말들이, 진실일지 아닐지도 모를 저런 말들 때문에 평생 대공가에서 살아왔던 나를, 그런 나를 지금…….”

대공의 표정이 더욱더 차가워졌다. 대공비가 지금 와 할 수 있는 것들은 저런 것들뿐이겠지. 현실을 부정하고 어떻게서든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

“증거라면 있어요.”

그래서 그걸 깨버리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지금만이 대공비를 완벽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순간이라는 걸 잘 알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게 있을 리 없어. 거짓말을 해가며 나를 어떻게서든 궁지로 몰려는 저 아이의 행동일 뿐이에요. 믿지 마요.”

아이들 곁에 딱 달라붙어 있던 나는 빠르게 대공에게로 뛰어갔다. 로헨과 라리가 놀란 듯 나를 바라봤지만 대공에게 가는 걸 본 아이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대공이 눈과 귀를 막으라고 했고, 아직 그걸 풀라 하지 않았기에 꽤 귀여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이들이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나는 대공 옆에 자리 잡았다.

“저는 저 안에서 죽을 뻔했어요.”

“저저, 또 거짓말……! 저러니까 출생이 미천한 것들은……!”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저를 죽이려 했어요. 그리고 렉스를 범인으로 몰려고까지 했어요.”

진실을 말했지만, 그녀는 여유로울 뿐이었다.

“멍청한 아이야. 어린아이의 말은 어떠한 증거도 되지 못한단다. 그 말이 뭔지 아니? 어린아이는 원래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서 신빙성이 없다는 말이란다. 거기에 증거도 없잖니?”

“증거, 있어요.”

“있기는 뭐가 있다는 거지?”

불안한 듯 그녀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없을 거 같으세요. 대공비 마마? 제가 아무것도 없이 이렇게 나섰을 거라 생각하세요? 저는 아이이지만, 아이치고는 신중해서요.”

물론 신중하지 않다. 그랬으면 대공비의 계략에 넘어가서 죽을 뻔하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를 살살 건드리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그렇게 자신은 대단한 사람처럼 굴더니, 그녀는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의 말에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영원한 꿈이라 불리는 루즈엘라. 그게 저 안에 가득했어요.”

“……루즈엘라? 수면 성분이 강한 그걸 말하는 건가?”

“네! 그리고 그건 라리를 계속 자게 만들었던 그 물건이죠.”

라리를 바라보고 싶었으나, 볼 수 없었다. 마음속의 짐이 아직 남아 있었다.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그런 죄책감이.

“라리를 자게 만들었던 거라니. 그건 무슨 소리지?”

“라리가 가지고 있던 인형들 안에 그 씨앗들이 가득했어요. 라리가 깨어나지 못했던 건 모두 그 루즈엘라 때문인 것 같아요. 신전에서도 그 씨앗을 증명해 주었어요.”

“렉스가 최근에 그런 식물에 대해 알아보는 거 같더니…… 그것도 같은 연유인가?”

“네. 신전에서 온 리렌이 조사를 도와줬어요.”

내 말에 대공이 미친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었다.

“왜 아이가 깨어나지 못하나 했더니 그 이유였나. 아이를 진료 보았던 의원들이 했던 말들이 모두 그걸 뜻하는 것이었나. 아이샤가 아이들의 방을 뒤엎었을 때 이상하리만큼 난리 친 것도…… 모두 자신의 죄를 들킬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거였나. 대공비?”

“아니에요. 증거, 증거 없잖아요!”

아주 조용히 몇 명의 시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편에 있던 이들의 움직임이었고, 몸을 낮춰 움직이는 이들이기에 눈에 띄는 움직임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잘 보였다.

“증거가 없다면서, 왜 저 시녀들은 급하게 움직이는 거예요?”

난 주저 없이 그들을 지적했다.

“누, 누가 움직였다 그래!”

“몸을 숙이고 조용히 가는 사람들이요. 그 증거를 없애려고 가는 거 아닌가요?”

“누가, 누가 갔다고!”

대공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이미 대공의 눈에도 그들은 확인되었다.

“정말 눈에 보이는 뻔한 짓을 하는군, 대공비. 저쪽에 움직이는 이들을 모두 잡아 오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자가 있으면 즉결 처형한다. 다른 것도 아닌…… 대공녀에 대한 살인미수이고, 그것에 대한 증거인멸은 용서치 않을 테니.”

그제야 비참한 모습으로 몸을 숙여 가며 증거인멸을 하려던 시녀들이 붙잡혀 나왔다.

“대공비의 사람들은 죽는 게 두렵지 않은 모양이야. 내가 나서지 않아도 이렇게 죽음을 자초하니.”

“……난 모르는 일이에요. 저희들끼리 나선 일에 나까지 끼우지 말아요.”

“대, 대공비 마마. 저, 저희는…… 저희는…….”

“시끄럽다!”

대공비는 납작 엎드려 있는 시녀들을 향해 짜증을 뱉어 냈다. 그제야 그녀들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만 숙였다.

“제가 붙잡혀 있던 곳에는 그것들이 가득했어요. 그리고 대공비 마마는 그게 뭔지도 알고 있었고, 기르고 계셨어요.”

“수입조차 막힌 그것들을 재배하고 있었다고.”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나는 주머니에서 씨앗들을 꺼냈다. 혹여나 로헨이 볼까 봐 몸까지 틀어 가며.

“그 안에 있던 거예요.”

“……저건…….”

“수입이 막힌 것을 제가 가지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겠죠.”

“저 아이가 어디서 구해 온 거겠죠!!”

“제가요? 아무 힘도 없는 고아 소녀가 어디서 이런 걸 얻어 오겠어요.”

“이건 다 누명이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대공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증거까지 나온 지금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자기변명일 뿐이었다. 모든 게 거짓으로 둘러싸인 자기변명.

“이건 내가 가지고 가도록 하지. 위험하니까.”

대공은 그사이 손수건을 꺼내어 내 손에 있는 루즈엘라를 자신이 가져갔다.

“네! 저 안에 가득했어요. 위치는…… 지하인 것 같았어요.”

이 일이 만약에 며칠만 더 늦게 일어났어도, 렉스에게 건축설계도를 구해 달라 했던지라 더 쉬웠을 텐데.

‘하긴 그랬다면…… 렉스가 그 지하에서 헤매는 일은 없었겠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깨달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에요. 내 성에 지하 같은 곳은 없어요.”

“찾아보면 될 일이겠지.”

“거짓말이라고요!”

“그 말이 아니면 딱히 할 만한 변명이 혹시 없는 건가. 대공비?”

대공은 입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정도껏이어야지, 어쩜 이리도 변함없이 똑같은 말만 하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야.”

“……거짓이니까요. 모든 건 다 나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짓말들뿐이니까 항변할 이유도 없어요. 그래요. 고아 소녀가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낼 리 없죠. 이건 모두…… 저 기사가 한 짓이에요. 그게 분명해요. 나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지난번에 시녀들이 자신을 좀 무시했다고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거라고요.”

이제는 렉스에게 모든 걸 돌리려는 듯 그녀가 다시금 입을 놀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렉스를 바라봤다.

“렉스도 죽을 뻔한걸요. 렉스의 팔만 봐도 묶여 있었던 게 보일 거예요.”

눈치 좋은 렉스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은근슬쩍 자신의 팔을 보였다. 

“대공비의 말에 따르면 렉스는 참 대단한 자이군. 자기 스스로 밧줄을 묶고 스스로 학대하다가, 피해자인 척 나섰으니. 렉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한 사람이야.”

“…….”

이제 더 이상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피식피식 웃던 대공은 렉스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렉스. 아이샤와 함께 있었다는 곳이 어딘지 유추되나?”

“네.”

“그러면 기사들과 함께 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안 돼요. 못 가요!”

“대공비를, 아니 저 여자를 잡도록.”

그 말에 눈만 깜빡이던 대공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굴 잡는 것이야. 내가 누군 줄 알고. 나는 대공비야. 대공비라고!”

“글쎄. 그대가 계속 대공비일지 아닐지는…… 조금 지켜봐야겠는데?”

서늘한 미소를 지은 대공은 그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를 죽이려 하고, 그 죄를 다른 이에게 덮어씌우려 하고. 그것도 모자라…… 내 딸인 라리까지 죽이려고 했던 그대를 더 이상 대공비로 둘 수 없다. 이후의 일은 조사를 더 해보겠지만…… 그대를 더 이상 대공비로 두는 일은 없을 거다.”

이제는 다 끝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은 듯 대공비는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젠장. 젠장……!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않을 거라고!”

모든 게 밝혀져 버려서일까, 대공비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당연히 그 분노는 내게 제일 먼저 닿았다.

“죽기만 했어도…… 네가 죽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죠. 제가 죽었으면…… 렉스의 탓으로 돌리거나, 대공 전하께서 대공비 마마를 난처하게 만들기 위한 쇼 같은 걸로 몰아붙이셨을 테니까요.”

“왜 죽지 않았지, 왜?! 완벽했는데, 너무 완벽했는데!!”

그녀는 당장이라도 나를 죽여 버릴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비쳤다. 하지만 대공의 기사들에 의해 그녀는 저지당했다. 굳이 그녀가 아니어도 로헨이 내 앞을 막아섰다. 어느새 귀와 눈을 풀고 라리와 함께 내 곁으로 다가온 로헨은 대공과 똑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만해. 못난아.”

“하…… 잡종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어디서 거지 같은 것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내가 이 꼴이 되어 버리고……!!”

“난 잡종이고, 너는 살인자고. 차라리 잡종이 나은 거 같은데. 못돼 먹어서 남을 죽이려고 하진 않으니까.”

“하…… 하. 대공자, 대공자라고 불러 줬더니만 제가 뭐라도 된 줄 아는구나!”

“뭐라도 됐지! 난 누구와 달리 핏줄 자체가 대공가의 것이라서 쫓겨날 일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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