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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90)화 (90/99)

-90화-

“……네…… 네가 어떻게……!”

대공에게 왜요, 들켰나요라는 말을 하며 승리자라도 된 듯 웃던 대공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서 그녀는 손을 벌벌 떨었다.

“그리고 어떻게 여기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거 보면…… 누가 범인인지 밝혀지는 순간이겠네요.”

“허……허…….”

그때 로헨이 내 쪽으로 뛰어왔다.

“미쳤어?”

잔뜩 화가 난 로헨은 날 이리저리 살피기 바빴다.

“아…… 아니. 그게.”

“위험한 일 스스로 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왜 그랬어!”

“우선…… 혼나는 건 조금 있다 할게. 지금은 이 일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어?”

“하. 정말…….”

대공의 옆에 꼭 붙어 있던 라리도 어느새 내 옆으로 왔다. 로헨과 달리 라리는 내 팔에 매달려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미안해. 라리. 걱정했어?”

“언니야…… 잘못되는 줄 알고…….”

“울지 말고.”

라리를 꼭 껴안으며 다독여 주었다. 어느새 로헨도 내가 라리를 껴안고 있는 팔 안쪽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되게 어정쩡하게 나는 두 아이들을 토닥였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다시 한번 말없이 사라져 버리면…….”

“언니야 발목을 부러뜨려서라도 옆에 둘 거야. 다시는…… 어디도 가지 못하게.”

“으응…….”

얘들아,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줄래. 너희들은 한다면 하는 애들이라 조금 무섭거든.

그러는 사이 대공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샤. 괜찮느냐.”

꽤 다정한 표정이었다. 그가 나를 정말 걱정한 것처럼, 그 표정에는 걱정과 안도가 담겨 있었다.

“네…….”

그의 걱정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대공이 걱정하는 건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에게 있어 나는 고아 소녀, 혹은 쌍둥이들이 아끼는 아이 정도에서 그쳤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게 아니면 대공비를 견제하거나, 대공비를 건드릴 용도로 쓴다고 생각했는데…….

“걱정하신 거예요?”

“당연한 소리.”

“아…….”

왜요? 왜 저를 걱정하셨어요? 우리가 그렇게 걱정하고 걱정받는 사이였나요.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왜 나를 걱정했을까. 정말 그는 나를 생각보다 소중히 여기는 걸까.

“무사하니…… 다행이구나.”

쌍둥이들을 볼 때의 표정이 그대로 보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이 삶에서, 아이샤의 삶에서 저렇게 날 봐주는 건 대신녀 정도뿐이었으니까.

“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돌아가서 너를 살피고 싶지만, 당장은 안 되겠구나.”

렉스도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라리와 로헨은 렉스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래도 항상 내 곁에 붙어 다녀서인지 아이들도 렉스에 대한 정이 조금은 생긴 모양이다.

“렉스는 괜찮아?”

“괜찮아?”

“네. 도련님. 아가씨.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렉스는 방긋 웃으며 둘을 안심시켰다. 나야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어 보였지만 렉스는 아니었다. 험하게 다뤄진 건지 그의 몸, 특히 결박되어 있던 팔과 입가에는 살짝 피가 비쳤다.

“렉스나 아이샤나 똑같아.”

“똑같아.”

“둘 다 괜찮다고만 해.”

“전 정말 괜찮습니다. 아이샤 님 덕분에요.”

그사이 대공은 우리들을 살피다가 대공비에게로 다가갔다.

“대공비. 나를 몰아가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를 어쩌지. 이번에도 멋지게, 아이샤가 해결해 버렸는데.”

“…….”

“거기에 아이샤의 말대로 아이샤가 어떻게 여기 있냐고 물은 거 보면, 그대는 아이샤가 그곳에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아무리 머리를 돌려 봤자 좋은 생각은 나지 않는지 대공비는 자신의 손톱만 뜯기 바빴다.

“말해 보도록. 변명이든, 해명이든.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겠어?”

“…….”

“왜. 나를 몰아갈 때는 그렇게나 당당하게 굴더니, 그사이 말을 못 하게 된 건가?”

대공비에 비해 머리통이 하나는 더 큰 대공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위협적으로 보였다. 언제나 당당했던 대공비는, 무슨 말이든 해가며 상황을 넘기려던 대공비는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그러니까…… 그건…….”

“그래. 그건 뭐.”

“그, 그래요! 저, 저게 나를 골탕 먹이려고 숨어 있었던 거예요.”

수많은 선택지 중에, 인정이 제일 빠른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자신이 부당한 일을 겪었으니 그게 미워서 잠시 가둬 놨던 거라고.

‘하긴 그랬으면 대공을 몰아간 것에 대해서 또 말이 나왔겠지.’

무엇이 되었든 최선의 선택은 없었다.

최악과 차악과 차악만 있을 뿐. 그리고 대공비는 그나마 용서받을 수 있는 수많은 길을 두고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모든 증거가 있는데 부정을 할 줄이야.

‘뭐가 되었든 최선의 선택이라는 건 없으니까.’

“숨어 있었다고…….”

“지금도 봐봐요. 내가 당신을 끝까지 모니까 기다렸단 듯이 나왔잖아요.”

“아아. 그래. 처음에는 내가 아이를 몰래 숨겨서 그대를 난처하게 만들려 했던 거고, 지금은 아이 스스로 그대를 골탕 먹이려 한 것이다?”

“맞아요.”

이게 먹혀들 거라고 생각했는지, 대공비는 아까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런 타이밍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요.”

“…….”

황당함을 느낀 건지 대공은 그녀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와 신분이 미천한 기사가 할 말들을 믿을 건 아니죠? 신분이 귀한 내가, 대공비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신분이 무슨 상관이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대 말들이 믿을 만한 거라 생각하나?”

“원래 신분이 미천할수록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잖아요.”

“꽤 두려운 모양이야. 아직 아이샤나 렉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선수 쳐가며 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거 보면.”

“몰아간다니요. 내가요? 정말. 웃기지도 않아서.”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그것만 밀어붙이는 것처럼, 아니 길이 오직 이것뿐인 것처럼 대공비는 계속해서 우리를 몰아가려 했다. 사실상 그녀가 거짓말로 몰아가면 딱히 할 말이 없긴 하다. 아니. 할 말이 있다.

주머니 속에 무언가 있음이 느껴졌다. 렉스에게 먹이려다가 못 먹였던 씨앗.

‘그러면 더욱더 대공비가 잘난 체해서 말실수하게 만들어야지.’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니 말해 봐. 아이샤. 이제 무슨 말을 할 거니? 할 말이 없으니까 계속해서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는 거 아니니? 거짓말이라도 괜찮으니까 어서 말해 봐.”

내가 말하길 기다리는 듯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렉스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걸 봤다는 이가 있었지?”

아까 우리가 멀리 있을 때, 대공과 대공비 사이를 파고들었던 기사였다. 렉스가 몇 시간 전에 밖으로 나가는 걸 봤다는 사람. 대공은 그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네. 대공 전하.”

“끌고 오도록.”

“아…… 네…….”

그 소식을 전해온 기사는 우물쭈물하다가 어디론가 뛰어갔다.

‘저자가 거짓말을 한 걸까. 경비병이 거짓말을 한 걸까. 아니면 둘 다인 걸까.’

난 말없이 멀어져 가는 그 사람을 바라봤다.

“왜 아무 말 하지 못할까. 아이샤.”

“저 사람이 온 이후에 말할래요.”

“아아. 상황 봐서 거짓말하려는 거구나. 뭐든 좋아. 어차피 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거짓말임을 알고 있으니까.”

“네네.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조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저게. 대공비인 나한테 말하는 꼴하며. 이래서 신분이 미천한 것들은……!”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나를 바라봤다.

“그거 아세요? 원래 말 많은 사람이 범인이래요.”

“뭐?”

“자신의 불안감을 어떻게서든 내려놓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는 경우가 많대요. 책에서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까 대공비 마마도 가만히 계시는 게 좋으실 거 같아요. 계속해서 말하시는 거 보면…… 모두들 범인으로 의심할지 모르잖아요. 변명할 기회도 없이.”

난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순간 대공이 피식 웃었다. 고개까지 돌린 그는 애써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공비 앞에서 웃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저…… 저게 정말…….”

“흐흠. 그러니 대공비도 조용히 있도록 하시오. 정말 아이샤의 말대로, 변명할 기회도 없이 범인으로 몰리면 좀 그럴 테니.”

“지금 저게 나를 능욕하는데, 그게 할 말이에요?!”

“능욕이라니.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군.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가 하는 말에 그리 파르르 난리 치는 꼴은. 쯧.”

“하…… 하. 어떻게…… 어떻게 내 편을 안 들어 줄 수 있죠?”

“이 상황에서 그대 편을 들어야 할 조금의 이유도 찾지 못하겠어서 말이지.”

대공은 팔짱을 끼고선 그녀를 바라봤다. 날 노려보던 대공비는 이 자리에서 더 말을 해봤자 조금도 도움 되지 못할 걸 알아서인지 씩씩거리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래. 그녀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지. 그래야 앞으로 말실수를 더 하겠지. 자기 자신이 지금 이기고 있다고, 먹히는 변명을 낸 거라는 착각에 빠져야 하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 기사가 돌아왔다. 경비병 하나를 끌고선.

“어서 오도록 해!”

“아, 아니, 무슨 일이시길래 저를 이렇게 데려오시는 겁니까.”

어딘지 모르게 순박하게 생긴 경비병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우리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기사는 조금의 주저 없이 경비병을 바닥에 꿇렸다.

“이자입니다.”

“네? 이자요? 제가 뭘 했다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경비병은 오들오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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