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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89)화 (89/99)

-89화-

참 이상했다.

내가 예상한 광경은 우리가 나오자마자 다들 난리가 난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 그 자체다.

“렉스.”

“네?”

“내가 혹시 지금 꿈을 꾸는 거예요?”

“어…… 아무래도 그 꿈을 저도 꾸고 있는 듯합니다. 이상하리만큼 고요하네요……?”

둘 다 본능적으로 이상하다 느꼈기에, 우리 둘 다 서로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그리고선 아주 조심히 그곳을 벗어났다. 고요했다. 내가 혹시 처음부터 잘못 짚고 있었던 걸까.

여기는 알고 보니 대공비의 성이 아니었던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먼 곳으로 이동이 되었던 건가.

대공가가 아니면 조금 문제가 생기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누군가 화를 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악다구니를 쓰는 여자의 목소리도. 직감적으로 우리가 아는 사람인 것 같다는 예감이 여실히 들었다. 나와 렉스는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빠르면서도 은밀하게 벽에 붙어서 그쪽으로 향했다.

혹여나 우리가 원하는 상황이 아닐까 봐 하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정원 앞에 서 있는 한 무리, 아니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대공비.”

“말이 아니라면 뭐죠? 나는 사실을 말할 뿐이에요.”

“뭐가 사실이라는 거지? 분명 아이는 그대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데도 끝까지 아닌 척한다는 건가?”

“온 건 맞아요.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진작에 갔다니까요? 그걸 본 이가 한둘이 아니에요. 그리고 같이 다니던 기사도 사라졌다면서요. 기사가 납치라도 했나 보죠.”

숨죽이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곳은 대공비의 궁이 맞았다. 유난히도 화려한 곳. 하지만 그 화려한 곳에 모든 사람들은 저곳에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대공비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이곳의 사용인들을 모두 불러모았나 보다.

‘양날의 검이네. 사용인들을 빠짐없이 이곳에 불러들인 덕에, 자신의 누명을 밝힐 수 있는 방패. 하지만 지금처럼 우리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왔을 때에는…… 감시하는 이 하나 없어서 결국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양날의 검. 바보 같게도…… 그녀는 우리가 빠져나올 거라는 생각을 1도 하지 않은 듯하지만.’

“못 믿겠으면 조사해봐요. 내 소속 사용인들은 모두 이곳에 있어요. 원한다면 내 거처를 조사해도 상관없어요.”

“마치 내가 이럴 줄 알고 모두 준비한 사람처럼 구는군. 대공비.”

“준비라니요.”

피식 웃는 대공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 대공비는 대공과 이야기할 때 언제나 지고 들어가야만 했다. 맨 처음 내가 쌍둥이와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그녀는 꽤 당당했다. 쌍둥이들을 데려온 대공에게 화를 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본격적으로 내가 껴들면서 그녀는 언제나 지고 들어갔다. 그런 그녀가 이리 당당한 걸 보면…… 그만큼 계획을 하고 있었단 거겠지.

오늘 당장 나와 렉스를 납치한 것은 계획에 없을지언정, 우리에게 벌인 일이 욱해서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의 머리치곤 꽤나 똑똑한데…….’

아무래도 이 계획에는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조사를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아니요. 하라고 하는 거예요. 나만 나쁜 악역이 되어 있잖아요. 내가 대공가를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은 고작 8살짜리 꼬마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으니까. 이참에 증명하려는 거예요. 그런 꼬마를 건들 이유가 내겐 없으니까요.”

“당당하군.”

“당당하죠.”

“그대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때는 오히려 뒤가 구렸는데 말이지?”

대공의 목소리가 공기를 차갑게 만드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졌다.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게 화가 난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분노를 뿜어내는 게 아니라 속으로 삭이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여실히 든다.

“맘대로 생각해요.”

“그래. 그러도록 하지. 당장 대공비의 거처를 샅샅이 뒤지도록. 또한 사용인들중에 자리를 비운 사람이 없는지도 확인하도록.”

“네.”

대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대공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참에 알아 주었으면 하네요. 당신이 나에게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

“내가 이곳을 조사하는 순간 가만있지 않겠단 소리인가.”

“네.”

“조사하라면서, 조사하는 게 두려운가 보지?”

“아니요. 조사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대공비의 그 말 때문인지 기사들이 빠르게 멈췄다. 덕분에 렉스와 나는 더욱더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아직은 나갈 때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둘 다 알아차렸던 탓이었다.

“책임. 대공비. 그대는 꼭 나를 짓밟으려 하는군.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서, 나를 자신의 아래에 두고 싶은 모양이야. 부부라는 사이가 꼭 누구 하나를 밟아야만 지속되는 사이인가 싶을 정도야.”

“당신이 내게 먼저 그랬잖아요. 내 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고작 8살짜리 애만 믿고 그 애가 하자는 대로 했잖아요. 솔직히 말이에요. 그 영악한 것이 내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이었다. 누군가에게 특훈이라도 받은 것처럼 대공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재를 변환시켰다. 나 또한 조금 놀랄 정도였다.

평소였다면 대공의 저 말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을 텐데.

대공도 꽤나 의외의 말이었던 건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

“아니고서야, 마치 의도한 것처럼 이곳에 간다는 말을 남겨두고 사라지는 게 웃기잖아요?”

그걸 보며 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머리 좀 쓰셨네.’

내가 대공에게 어떤 식으로든 연락하고 왔을 거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이걸 가지고 트집을 잡을 거란 것도. 

“그래서. 결국 아이샤가 그대를 난처하게 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다?”

“그럼요. 꼬마 주제에 얼마나 요망한 애였어요? 당신도 생각해봐요. 그 아이가 오면서 평온했던 대공가가 얼마나 소란스러워졌는지. 그러니 그런 일도 충분히 벌일 수 있는 거죠. 나를 사사건건 싫어했으니까.”

나가서 한마디 하고 싶네. 사사건건 미워한 건 본인이면서.

하지만 이제는 궁금해질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는 건지.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로헨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우리 아이샤가 그런 일을 벌이고 도망이라도 쳤다는 거야? 고작 아줌마한테 누명 씌우려고?”

“……아줌마가 아니라 대공비란다. 로헨. 네 엄마이기도 하지.”

“엄마는 무슨.”

“말 가려 하거라 로헨.”

“아이샤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하고는 말도 하기 싫어.”

목소리만 들어도 로헨이 얼마나 짜증 나 있는 건지 느껴진다. 이제 슬슬 나가야하나. 이대로 두었다가는 로헨의 분노가 폭발할 것 같다. 지금도 겨우겨우 참는 것 같은데.

“이제 나갈까요. 렉스.”

“그럴까요……?”

그때였다.

마치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두 사람의 무리가 있는 쪽으로 기사 하나가 뛰어왔다.

우리는 의도치 않게 또 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대공 전하. 대공비 마마.”

“무슨 일이지?”

“대공 전하의 분부대로 모두 뒤져보다가, 단서를 찾았습니다.”

“아이샤를 찾은 건가?”

“아이샤 님은 모르겠으나, 경비병에게 알아본 결과, 기사 셀렉스로 추정되는 이가 몇 시간 전에 외출했다 합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거였구나.’

어쩐지 이상하리만큼 대공비가 당당하다 했는데, 다 생각이 있었구나. 

거기에 대공의 명에 움직이는 자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제대로 경비병을 매수한 모양이다.

‘그만큼 자신있었다는 거지. 나와 렉스의 실종을 덮어버릴 수 있게.’

“그렇게 나를 의심했으면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확실한가?”

“네.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

“말해봐요. 왜 말하지 못하죠? 나를 그렇게나 의심해놓고, 내 거처를 조사할 만큼 당당해놓고 이제 와서 말하지 못할 정도로 난처한가요?”

순식간에 대공비의 승리의 상황으로 바뀌었다.

“왜 말을 하지 못하는 거죠? 미안해서? 아니면 아직도 나를 의심하는 건가요?”

“…….”

“그래요. 의심할 수 있죠. 할 수 있고말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이상한걸요.”

“뭐가 말이지?”

“아무리 그 꼬마애가 영악한다 한들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거기에 당신 기사가 그 아이를 데려갈 이유가 없잖아요?”

갑작스럽게 대공비는 말을 바꿨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동안 여러 일들이 겹쳐졌으니까, 당신 이참에 나를 아예 보내버리려고…… 당신이 이 일을 꾸민 거 아니에요?”

“대공비. 말 가려서 하지?”

“아니고서야. 이상하잖아요? 그 애가 어떻게 대공가의 기사와 나갈 수 있겠어요. 이제야 알겠네요. 이 모든 건 당신이 조작한 거죠?”

이렇게 대공을 괴롭혀왔구나. 렉스가 이야기했던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대공의 성격 자체를 바꾸게 만든, 그 일을.

대공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며 몰아가던 대공비를. 아마도 그때 일처럼 대공비는 큰 그림을 그렸나 보다. 물론 그녀의 생각으로 비치지는 않는다. 그녀의 부친이 시킨 일이고, 그녀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이는 거겠지.

대공비라면, 내가 아는 그녀라면 절대 저렇게 여유롭게 상황을 끌어갈 수 없을 테니까. 

“왜요. 들켰나요?”

“그건 제가 대공비 마마께 하고 싶은 말인데요.”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빠르게 그곳에서 나왔다. 내가 더 지켜볼 줄 알았던 렉스는 급하게 나를 쫓아 나왔고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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