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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88)화 (88/99)

-88화-

이대로 두면 그는 독약을 먹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령 이곳에서 도망친다 해도 그가 나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 난 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정말 다행인 건, 내가 있던 방 때문인지, 아니면 보안 유지를 위해서인지 한참이 지나도록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내가 있던 방으로 가 씨앗 몇 개를 가지고 나와서는 렉스에게로 향했다.

그사이 정신이 든 건지, 렉스는 팔다리가 묶인 채 시선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아, 아이샤 님……!!”

“쉿. 다른 사람이 올 수도 있어요.”

“괜찮으신 겁니까? 도대체…… 이건…… 어떻게…….”

“나는 괜찮아요.”

“하지만…… 하지만, 저들이…… 분명…….”

렉스의 눈동자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내가 조금 특별하거든요.”

“특별……이요?”

“신이 꽤 사랑하는 아이라서요.”

내 말의 뜻을 알 리 없는 렉스는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절대 나는 죽지 않는단 소리예요.”

죽게 내버려 둘 거였으면, 신이 굳이 고생하며 시간을 돌릴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안전하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본 신은 그리 다정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자신을 떠받들 신녀를 만들기 위해, 절망의 끝에 선 사람들을, 그 사람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제 뜻대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살려만 놓는 걸로 끝날 수도 있기에 나 또한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우선…… 렉스. 렉스를 죽이진 않을 거예요.”

“네?”

“렉스에게 나를 죽였다는 죄를 물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허튼 생각 하지 말아요. 나를 구해서 이곳에서 나가겠다든가, 혹은 혼자 이곳에서 빠져나가겠다든가 그런 생각이요.”

“아이샤 님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 차분하신 겁니까.”

그 말에 순간 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게. 나는 왜 이다지도 차분한 걸까. 정말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 또한 죽음이 두려우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끝나는 게 두려우면서 난…… 왜 이렇게 차분해져 있는 걸까.

“글쎄요…… 안 죽을 걸 알아서?”

“……아이샤 님은 정말…… 아이 같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나중에 해도 돼요.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에요. 렉스, 날 믿죠?”

“당연히 믿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해줘요.”

“저 혼자 나가라는 거라든가, 아이샤 님을 신경 쓰지 말라든가 그런 것만 아니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렉스. 생각해 봐요. 어차피 나는 죽지 않아요.”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자신을 버릴 생각 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갈 생각을 하셔야죠.”

“우웅…… 하지만 렉스라도 나갔으면 하는데. 만약 렉스가 무사히 나가면…… 그렇게 되면 나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저들이 저를 쉽게 내보내 주겠습니까? 아이샤 님을 죽인 죄를 내게 뒤집어씌울 거였으면 어중간하게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신 거죠? 우선 저를 내보내고 나서 생각해 보자. 이렇게 마음먹으신 거죠?”

순간 가슴이 쿡 찔렸다. 나는 신의 가호가 있으니까 어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 그래서 렉스를 우선 잠재워서 그 이후를 생각하려 했으니까.

“…….”

“함께 나가시죠.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라니.”

“대공 전하께서 무조건 찾으러 오실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안 찾으러 오면. 그러면 어떻게 하게요.”

하지만 렉스는 조금도 걱정이 없어 보였다.

“저를 믿어 보세요. 나오기 전에 편지 쓰고 나오셨잖아요.”

“아, 그래도…… 우리를 무턱대고 이곳에 가둔 게 아니고 대공비도 생각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생각이 없다는 느낌이 지배적으로 들긴 한다. 솔직히 나는 대공의 친자식도 아니고, 죽여도 딱히 문제 될 게 없는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게 아니면 정말 피해를 입더라도 나를 죽여 버리고 싶거나, 그게 또 아니라면 무슨 방도라도 있는 거겠지.

“그렇기는 하겠죠.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우리를 이곳에 가두진 않았을 겁니다.”

“아. 나만 없으면 대공가를 다시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거 같았으니…… 너무 한 가지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제 생각에도요. 대공비 마마께서는 모든 게 제 뜻대로 되시던 분이시니까요. 아이샤 님이 오신 이후로는 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셨으니까 아마도…….”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욱해서 그랬을 확률이 높네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나갈까요.”

“렉스가 봤을 때는…… 여기는 어딘 거 같아요?”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먹여진 후 기절해서 아무 기억이 없습니다. 혹시 대공가 밖으로 나온 걸까요.”

“나는 정신이 있는 상태로 끌려왔어요. 그리고 여긴…… 대공가 안은 맞는 거 같아요. 나도 정신없어서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렉스를 먹이려고 손에 꽉 쥐고 있던 씨앗들은 주머니에 넣은 채 나는 렉스를 고정하고 있던 것들을 풀어냈다.

“유난스럽게 감시가 없지 않아요?”

“아. 그러네요.”

“내가 있던 곳은 그렇다 쳐도, 렉스 곁에도 아무도 없는 거 보면…….”

“그만큼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요?”

렉스의 질문에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일 수도 있어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생각했든지, 감시를 붙일 수 없던 상황이든지.”

어느새 밧줄이 모두 풀린 그는 팔다리를 이리저리 꺾으며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이제 알 거 같아요. 아마 감시를 붙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요. 대공 전하께서 조사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의심을 당할 곳은 여기일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현재 대공비 마마의 모든 자금 출처가 조사되고 있는 상황이니 다른 사람은 믿을 수도 쓸 수도 없겠죠.”

그러고 나니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럼 그냥 나가도 되겠어요.”

이미 라리를 통해 그 효능을 봤으니까, 이번에는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들이 그렇게까지 씨앗을 두려워하는 거 보면 이미 그들 또한 효과를 봤다는 것일 테고.

“네……?”

“어서 가요.”

나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물쭈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렉스는 내 손을 잡았다.

“언제나 내 손 잡아 주기로 했잖아요.”

“아…….”

“어서 가요. 렉스의 말대로 대공 전하께서 이곳을 조사하고 계신 거라면…….”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냥 끌려오면서 느낀 건데요, 여기 대공비성의 지하 같아요. 맨 처음은 탑 같은 게 아닐까 했지만…… 그냥 제 느낌이 그래요.”

그에게 하나하나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느낀 바가 그러했다.

“아이샤 님이 그러시다면 맞는 거겠죠…….”

우물쭈물하던 그는 내 손을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실내는 꽤 어두웠다. 오히려 내가 있던 곳이 밝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쪽으로 가는 게 맞을까요. 아이샤 님.”

“아마도요.”

내가 있던 곳과 반대로만 걸어도 밖으로 나가는 거겠지. 재배하는 것조차 어려운 것들, 위험한 것들을 입구 쪽에 재배하는 바보는 없을 테니까.

“밤일까요. 지금은.”

“밤일 거예요.”

식사하고 온다는 사람들, 렉스를 하루 지켜본다는 그들의 말이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나 또한 잠깐 잠들긴 했지만 바로 깨어났고, 이래저래 해봐야 초저녁쯤일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긴장되네요.”

“나도 처음이에요.”

“너무나 멀쩡해 보이셔서 이런 일 자주 겪으신 줄 알았어요.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들었는데, 고아원은 이렇게 살아남기 힘든 곳인가 그런 생각까지 했어요.”

“그럴 리가요. 나도 보통 사람처럼 산걸요.”

이런 일을 자주 겪은 건 내가 아니라 쌍둥이들이겠지.

‘아…… 아이들이 난리 치겠네.’

가뜩이나 로헨에게 요새 혼나고 있는 입장에서 벌써부터 암담하다.

그때, 우리 앞에 벽이 나타났다. 계속해서 일자로 이어진 복도를 지나 도착한 벽.

“막힌 걸까요. 다른 곳을 찾아야 할 거 같은데요.”

“잠깐만요.”

이대로 나가기에는 조금 묘했다. 분명 여기가 맞는데…… 막혀 있다니. 제일 묘한 건 바닥이었다. 묘하게 높낮이가 안 맞는 느낌이랄까.

“이거…… 문 아닐까요?”

그래서 한 말이었다.

“문이요?”

“네. 이거 올라가는 계단 같아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렉스는 앞에 있는 걸 발로 찼다. 벽으로 보이던 것을. 혹여나 내가 잘못 말해서 그의 다리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그러지 않았고 벽은 부서졌다.

그 타격 때문인지 문은…… 우리 쪽으로 열렸다.

“……아. 당겼으면 되는 문이었나 봐요.”

“……뭐. 벽처럼 생겨 오해하게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지금 문이 중요합니까. 나갈 곳을 찾았으니 어서 가도록 하죠.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렉스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렉스의 품에 안겨서 가니 엄청 빠르다. 계단이 휙휙 지나갔다.

이럴 때 보면 그도 기사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혹여나 밖에 기사들이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들키는 건 아닐까 했는데…….

묘할 정도로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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