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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87)화 (87/99)

-87화-

멍청한 건 당신이라고.

그때의 대공과 지금의 대공이 달라진 걸 왜 모르냐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한 가지만 생각할 수 있냐고 그리 말해야 하지만 입은 굳어져 버린 후였다.

“그러면 그이가 오면 반겨 줄 새 차를 준비해 볼까. 걜 끌고 오도록 해.”

“네.”

내가 억지로 끌려가는 걸 알아차린 건지 멀리서 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샤 님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저자도 끌어서 가둬 놓도록 해.”

“네.”

그곳에 있던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렉스에게 난 괜찮다고, 당장 이곳에서 떠나라고 그런 말들을 해야 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난 그저 대공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정신이 나간 건가.’

끌려가는 동안 대공비를 보며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삶을,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대공은 내가 마지막으로 간 곳을 의심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대공비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면 대공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밝혀질 거다.

‘그러면 자신한테 더더욱 안 좋을 텐데.’

“꽤 이해 못 하는 얼굴이구나.”

또각또각 걷던 그녀는 뒤에 따라오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여기…… 온 걸…….”

“아. 네가 여기 온 걸 알 거라고? 물론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 대공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내 명령을 따른단다. 그러니 네가 여기 온 걸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건 안 될 텐데. 혹시나 이런 상황이 생길까 봐 대공에게 직접 편지까지 쓰고 왔으니까.

물론 그녀가 알 리 없지만.

“설령 그가 알지라도 바뀌는 건 없어. 안 왔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야. 거기에 널 찾겠다고 내 궁을 뒤진다 해도 우릴 찾을 수 없거든. 우리가 가는 곳은 절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이라서 말이지.”

아닌 게 아니라 정신없이 끌려가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세상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나마 한 가지 구분되는 건 지하로 가는 듯 다리가 쿵쿵거리며 지면에 닿는다는 점 정도였다. 온몸이 마비된 탓에 고개가 잘 움직여지지 않아서 그것 말고는 알아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네 기사 또한 사라졌으니, 모두가 다 그를 의심하게 될 거야.”

“…….”

“걱정 마.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쉽게 쉽게 끝낼 생각은 없거든. 그 기사는 내가 손수 제조한 약들을 먹으며 점점 바보가 되겠지. 참 재미있어. 사람은 강하면 강할수록 약에 쉽게 취하거든. 그래도 그 약에 빠져 버리면 행복한 기억만 가득하다더구나. 그래서 깨기 싫고 점점 중독되고 그러다 보면…… 바보가 되어 버린다고.”

벌써부터 재미있는지 대공비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어중간하게 똑똑한 것들은 이래서 재미있어. 저희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지. 그래서 오히려 이런 것들이 더 쉽게 쉽게 넘어오는 법이야.”

“…….”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날 잡고 있던 이들은 물론 대공비까지 멈춰 섰다.

그리고 무언가를 먹고 얼굴을 천 같은 걸로 감싸기 시작했다. 물론 나에게 그런 걸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난 계단 중간에 방치되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가 끝난 건지 그들이 다시금 나를 잡아챘다.

마비되었음에도 고통은 그대로 느껴졌다. 텅텅거릴 때마다 바닥에 닿는 다리가 아파 왔다. 하지만 그것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하에 있는 문이 열렸다.

어둡고 어두운 길을 지나, 위험한 계단을 내려오고 또 내려와서 열린 문은 의외로 매끄럽게 열렸다.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것처럼. 그리고 보인 풍경에 난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뱉으려고 해봤자 뱉어지진 않았지만.

“어떠니. 나의 정원이.”

“…….”

“아. 이제 말 못 하려나.”

아름다웠다. 그건 사실이다. 이곳은 지하가 분명하다. 빛 하나 들지 않는. 하지만 이곳은 자체의 계절을 따로 가지고 있는 듯, 높고 높은 천장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그 덕분일까. 어둡기만 해야 할 지하가 생각보다 밝았다.

그리고 그 너른 공간에는…… 내 예상대로 수많은 꽃이 피어나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지?”

“…….”

“어중간히 똑똑한 넌 알겠지. 그리고 이곳은 너의 무덤이 될 예정이지.”

라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날 저걸로 죽일 셈이구나. 과용량을 섭취하게 해서.

“그래도 아름다운 꿈을 꾸게 될 거야. 나를 곤란하게 만든 너에게 주기에는 꽤 아름다운 죽음이지만, 그래도…… 난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해서 말이지. 잘 가렴. 아가.”

대공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를 질질 끌고 왔던 사람들이 날 꽃밭 한가운데로 던져 두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서 오래 있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급한 발걸음이었다. 대공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렇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가만히 그곳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

‘아름답긴 하네.’

천장에 반짝거리는 게 꼭 반딧불이 같다. 반짝반짝. 거기에 촘촘히 핀 꽃들은 푹신하다. 마치 침대 위에 누운 듯한 착각마저 주었다.

‘이런 죽음도. 나쁘지 않을 거 같긴 하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좋은 꿈을 꾸다 세상을 떠나는 것.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지켜야 할 게 있다. 쌍둥이들, 그 아이들의 미래. 이대로 난 죽을 수 없다.

하지만 마비 때문에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덕분에 숨 쉴 때마다 꽃과 그 씨앗에서 나온 향기가 내 몸 가득 쌓여 갔다.

‘아무리 내 몸은 낫는다지만 이 정도면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실제로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자꾸만 눈이 감겼다.

결국 난 그 무한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대공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은 참으로 날 편애하는지, 아니면 내가 꼭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흡입되는 양에 비례해 내 몸은 회복되어 갔다.

그게 느껴졌다. 심지어 흡입할 때마다 들어오는 수면제의 성분을 이겨 내고자 내 몸은 빠르게 회복했고 덕분에 마비도 점점 풀려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정신을 차렸다. 심지어 몸도 움직여졌다.

“이제 어쩌지.”

일어나긴 했지만 이후가 문제다. 난 아주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이 안에 있는 건 나 혼자인 듯하다. 아무래도 수면제, 독 성분이다 보니 이 안에는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하다.

그뿐 아니라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대공비의 말대로 이 안을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듯 경비도 생각보다 허술했다. 아마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부터 지키는 사람은 없을 거 같긴 하다. 내가 이곳으로 오면서 본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서 아주 조심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창문 하나 없는 곳.

‘창문이 없다는 건 결국…… 이곳이 탑은 아니라는 소리겠지?’

탑이나 외부로 이어진 곳이라면 창문이 있거나 바람 같은 게 새어 들어올 것이다. 벽을 통해서. 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만져지는 촉감상 벽은 돌로 되어 있으나, 돌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운 느낌이었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이런 재질로 만든 듯한 느낌이다.

거기에 이곳에 올 때에는 마치 탑처럼 계단이 줄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걷다 보니 계단이 그리 많은 느낌은 아녔다. 그저 무언가 개조한 듯 부분부분 턱이 있을 뿐이었다.

‘원통형의 구조가 아닌데 개조한 듯 턱이 있다는 건…….’

전체적인 느낌은 일직선의 기다란 복도랄까.

‘되게 단순하게…… 그냥 대공비 성의 지하인 건가.’

벽을 다 뚫어 버렸거나 문을 모두 치워서 이런 형태인 건가. 그런 의문이 들던 그때였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자가 새로 들어온 자라지?”

“그렇다더군. 오늘 하루는 그냥 두고, 상황을 본 뒤 독을 먹일 예정이라 하더군.”

“상황이라.”

“외부 상황이 좋지 않으면 과용량으로 먹일 건가 봐. 그런데 과용량으로 먹이면 죽을 수도 있으니 상황을 본다나 봐.”

“그렇구만. 불쌍한 사람이네.”

저들끼리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쯧쯧거리기 바빴다.

“지하에도 한 명 왔다며?”

“그쪽은 신경 쓸 것도 없어. 어차피 알아서 죽을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갑작스럽게 이게 뭔 일이래.”

“그런데 요새 대공비 마마 상황이 별로라며.”

“상황 보고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대공가의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망간다는 말을 들으니 외부 사람으로 보인다. 기둥 뒤에서 숨어서 본 그들은 옷도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어쨌든 식사나 하러 갑세. 여기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그러지.”

그 말과 함께 두 남자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졌나 끝까지 보던 나는 그들이 말했던 새로 들어온 사람을 봤다. 팔다리가 묶이고 눈까지 묶인 이는 렉스였다.

‘아…….’

그를 본 순간 난 무언가 생각이 떠올랐다.

“그거라면…… 렉스를 살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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