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마치 내가 자신에게 어떠한 의도가 있길 바라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참 투명하게 내비쳤다.
“내가 할 말이 많다니. 그랬나.”
“저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하신 거 보면, 할 말이 많으신 거 아니에요?”
“내가 사과하고 싶다 했나? 너에게?”
대공비는 역시나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세웠다. 어차피 정말 사과를 받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다.
그저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제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언제까지나 대공비가 혼자 움직이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그래서 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닌가요?”
“글쎄다. 오류가 있던 게 아닐까. 대공비인 내가 너에게 사과할 일은 없을 거 같은데?”
“그렇구나. 대공비 마마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일을 못하나 봐요. 대공비 마마의 말 하나 전달하지 못하고, 되게 무능력한가 봐요.”
잔뜩 얼굴을 구긴 그녀를 보며 마음을 표출했다.
더 화나라고. 더 분노하라고. 그래서 어설픈 마음을 내보이라고.
“…….”
“대공비 마마도 참 마음이 넓으신 거 같아요. 매번 실수하는 이들을 가만 넘기시는 거 보면, 정말 대단하세요.”
“비꼬는 거 같구나.”
난 대답하는 대신 웃어 보였다. 비꼬는 게 맞으니까. 다행이라 해야 할지 대공비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했는지 표정을 어쩌지 못하다가 애써 웃었다. 겨우겨우 표정을 바꾼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뭐. 어쨌든 오늘 이야기를 하고자 온 거니…… 이야기 좀 하자꾸나.”
그러고선 제 앞에 있는 찻잔을 들고 홀짝홀짝 차를 마셨다.
“차는 생각이 없니?”
순간, 저번에 대공이 조금 이상한 말을 한 게 기억났다. 대공비는 언제나 자신의 정원에서 차를 권한다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클리셰다. 자신의 정원에서 균일하게 차를 마시고 이상해져서 곤란에 빠지는 그 흔하디흔한 상황들.
어차피 내가 그런 일을 겪는다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거 같다. 어차피 나는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난 비겁하게도 나를 지킨다.
그래서 차를 마실까 하다 고개를 저었다.
“네. 없어요.”
대공비가 어떤 반응을 보이나 궁금했으니까. 정말 대공의 예상이 맞는다면, 대공비가 정말 그런 의도가 있는 거라면, 여기에서 더 격하게 차를 권하는 게 맞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대공비는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뭐 편할 대로 하려무나.”
그러고선 앞에 놓인 간식거리에 손을 대었다. 초코가 콕콕 박힌 쿠키들.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된단다.”
쿠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녀가 먹던 쪽의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독오독 씹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요새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지?”
“잘 지내요. 라리는 이제 깨어난 상태예요.”
“별말은 하지 않고?”
“별말 할 게 뭐 있나요. 그냥 멍해서 요새는 계속 쉬고 있어요.”
“그래. 아이샤.”
오독오독 씹는 쿠키의 맛이 생각보다 뛰어났다. 역시 대공가의 음식 솜씨는 예술이다. 끝맛에 쌉싸름한 초코맛이 느껴지는 게 특히 일품이었다.
“처음부터 네가 이렇게 내 말에 잘 대답해 주고 아이들에 대해 말해 주었다면, 그래도 우리는 꽤 잘 지내보았을 텐데 말이지.”
“그러게요.”
“그래도 나는 네가 그리 싫진 않았단다. 물론 처음에는 그 쌍둥이들 말고 다른 아이가 또 있는 걸까 봐 짜증 나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온 새로운 아이는 짜증 나거든.”
“대공비 마마께서는 알고 계셨어요? 쌍둥이들의 존재 자체를?”
“그럼.”
왜 갑자기 이렇게 순순히 말하는 거지?
“알면서도 그곳에 둔 거예요?”
“그래. 다 알면서 그곳에 둔 거지. 너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내게 그리도 예민하게 군 거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무언가 이상했다.
“아…….”
“왜, 내가 이런 것들을 다 이야기하니 이상해?”
“……네.”
“그러면 그 똑똑하고 잘난 머리로 한번 생각해 보자꾸나.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너에게 할까? 첫 번째. 밖에 나가서 대공비가 이런 말 했어요라고 해봤자 어린 네 말을 아무도 들어 주지 않을 거라서?”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또 맞는 말도 아니다.
과거의 나였더라면 내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재는 대공이 누구보다 내 말을 잘 들어 주고 있으니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 말을 들어 주고 있으니, 대공비의 첫 번째 가정은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녀가 모를 리 없을 테니까.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두 번째. 네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거라서?”
“네? 그게 무슨…….”
“내내 똑똑하게 굴더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나 보구나.”
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일까 봐. 이 여자가 정말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걸까 봐. 그래서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멍청하게도.”
“제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시죠?”
“네가 생각하는 게 뭔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길이요. 극단적으로 미워하는 나를 해치워 버릴 순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자신에게 조금의 득도 될 수 없는…… 그런 길.
“아니죠?”
“뭐.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구나. 떨고 있는 네 행태가, 아마도 내가 뭔 짓을 할지 예상하고 있는 듯해.”
“아니길 바라요.”
“왜. 두렵니? 그러니까 적당히 하지 그랬어. 가끔 말이야, 너와 이야기하면 기분이 더러워. 고작 고아 주제에 제가 뭐라도 된 듯 굴거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지 마세요.”
그녀의 눈에 어린 광기가 보였다. 어차피 여기 온 순간 그녀가 뭔 짓을 할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진짜 내 예상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일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지 말라니 왜?”
“저한테 해를 끼쳐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으시잖아요. 결국…… 다 밝혀질 텐데…… 가뜩이나 대공 전하께서…….”
“왜. 내가 대공이 무서워서, 그이가 무서워서 너를 가만두어야 한다는 거야? 그럴 생각 조금도 없거든. 사실 너만 아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아닌 척해도 그이는 나한테 기대어 있었고, 대공가의 모든 것들은 내가 관리했었지. 그런데 네가 나타난 후부터 바뀌었어. 라리만 해도 내 말을 잘 들었는데, 네가 나타난 후부터 내 말을 처듣질 않고…….”
그녀는 스트레스가 과중했던 건지 머리를 뜯기 시작했다.
“진짜 짜증 나서. 저희들이 뭐라고 감히 내 말을 무시해. 거기에 고작 저딴 애한테 내 일을 맡겨?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가 하는 일을 내가 못했다고 대공은 무시하고…….”
“그래서, 그래서 라리를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뭐?”
“라리를 잠들게 만든 거…… 죽이려고 한 거 대공비 마마시잖아요. 아니에요?”
“그래. 맞아. 그게 왜? 그러니까 내 말을 잘 들었으면 별일 없었을 거 아니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알아? 너만 아니었으면 라리 그 애가 그런 일을 당할 것도 없었다고.”
“되게 비겁하시네요. 그것조차 제 탓으로 돌리시는 거 보면.”
그녀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비겁?”
“네. 어차피 다 알고 있었어요. 대공비 마마께서 라리의 인형 안에 씨앗을 넣으셨다는 걸요. 그것 때문에 라리는 계속 잠들었었다는 걸요.”
“그래. 네가 어느 정도 조사한 것 같더구나. 그런데 뭐. 그 일에 대해 아는 것 또한 너 하나인 것 같더구나.”
“그건…….”
“아. 저 밖에 있는 저 신분이 미천하기 짝이 없는 기사 놈도 알고 있는 거 같지만. 뭐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사라지면 어느 누구도 모르겠지.”
“……렉스까지 손대려는 거예요?”
나에게 손을 대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대공비의 모든 것을 다 망가뜨린 게 나니까. 하지만 렉스를 건드리는 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왜? 이번에도 그 버릇없는 행동으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게?”
“……렉스한테까진 그럴 필요 없잖아요.”
“글쎄. 너희 둘 다 참 마음에 안 들거든.”
“……나를 어떻게 하려고요. 고아원 원장님을 시켜 아이들을 가둔 것처럼, 나를 가두기라도 하려고요?”
“그건 어찌 알았지? 그 배후에 내가 있다는걸? 하지만 넌 그럴 필요조차 없어. 뭐 하러 인력 들게 가둬 놔. 그렇게 하느라 원치 않은 사람의 손까지 탔는데. 넌 그냥 죽여 줄게. 뭐, 혼자 외롭진 않을 거다. 렉스라는 그자가 너를 그렇게 만든 거라 하고 같이 보내 줄 테니까.”
“뭘 하실 수 있으신데요. 이렇게 다 주절주절 말해 놓고 무얼…….”
그때였다. 말을 하는데 입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참 재미있지. 머리가 좋은 아이라 생각해서, 차를 마시지 않을 거 정도는 예상했어. 그리고 예상대로 차는 마시지 않더구나. 하지만 멍청하게도 내가 먹는 쿠키는 열심히 먹더구나.”
“그…… 그건…… 같이…… 먹…….”
“나는 미리 해독제를 먹어 놨지. 똑똑한 척하더니 참 멍청해.”
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몸에 점점 힘이 빠졌다.
“들어 올리도록 해. 멍청한 꼬마야. 너는 네 꾀에 네가 넘어간 거야.”
“이런다 해도…… 결국…… 다 밝혀질……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는걸. 아이샤. 너만 없으면 다들 바보처럼 내 말을 들어줄 거야. 대공도 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멍청하게 내 말을 다 들어줬거든.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