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국에 단 하나뿐인 대공에게는 대공비가 있는데,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항간에는 대공이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심지어 매일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낸다는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에서 이름도 모르는 여인 하나가 대공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이게 소설 속에서 언급된 내용이었다. 소설 속 내용과 렉스가 말하는 건, 결은 비슷했지만 속사정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내가 아는 내용에서는 대공의 문제였고, 렉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대공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대공비가 그를 엄청 닦달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렉스가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반박할 힘도 없으셨죠.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것처럼…… 자신의 세력도 약했고, 원해서 올라간 대공 자리도 아니었는데 상황은 점점 나빠지니 더욱더 말을 잃으셨습니다. 결국 대공비 마마께서는 하지 말아야 할 짓까지 하셨습니다.”
“그게 뭐예요?”
“아이를 가지는지 못 가지는지 증명하자면서 여자를 매일 밤 침실에 넣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대공 전하께서 감정을 잃으셨어요. 그리고 실제로…… 아이를 가진 여자들은 하나도 없었죠.”
그건 조금 끔찍한 일이긴 했다. 증명하라며 다른 여자를 침실에 넣었다니.
내가 대공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가 이 여자, 저 여자, 여자라면 다 좋다고 달려들 그런 성격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스스로를 증명하라며 여자를 들여보냈으면…….
‘고지식한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은 가네.’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해서 대공가의 모든 것들을 다 넘기셨던 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그의 손이 조금씩 떨려 왔다.
“사실은 누구의 문제인지 확실치도 않은 상황이었죠. 하지만 대공비 마마의 가문인 셀렉트록스 후작가에서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겁니다. 귀한 딸을 결혼시켰더니 후사도 보지 못한다고. 대공비가 대공비이긴 한 거냐고. 이대로 두고 볼 순 없다고.”
“대공에게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대공 전하께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흔들리고 계셨거든요. 자신의 편이 없었기에 그러신 게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예상해요. 세상에 오로지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 때…… 기댈 곳이 없을 때, 고민이 자신을 잡아먹을 때 사람은 극한으로 몰리거든요. 아마도 대공 전하께서도 그러셨을 겁니다. ”
“결국…… 어떻게 된 거예요?”
렉스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보시다시피요. 대공가의 대부분의 의사 결정을 대공비 마마께 넘겨 버렸죠. 그게 맞다 생각하셨고, 그때는 그게 최선의 방도였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래서 지난번에 그런 말을 한 거구나. 언제까지 과거의 일을 운운할 거냐는 대공의 말, 그리고 대공비에게 모두 맡겨 놨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그 말. 그 모든 게 그때부터 시작된 거구나.
“그럼에도 대공 전하께서는 대공비 마마를 믿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시작은 좋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부부이시니까. 그래서 도련님과 아가씨에 대한 것들은 대공비 마마께 처음에 묻곤 하셨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요.”
“지금은 다른 곳에 물어요?”
“아니요. 아이샤 님이 하신 말씀이 있으시기에,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신답니다. 그게 맞는 거 같다고. 마음이 행하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하신다고. 어찌 되었든…… 굳이 과거의 일을 꺼내어 말한 건, 대공 전하께서는 그때부터 마음을 많이 닫으셨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구나.”
“아무도 믿지 못하고, 표현하지 않고. 자신이 약하다는 걸, 벼랑 끝에 몰렸다는 걸 알려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더더욱 표현하지 않으시는 거라는 걸. 실상 대공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렉스는 정말 대공이 좋나 보다. 내게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거 보면.
“알겠어요.”
“처음에 아이샤 님께 나쁘게 말했던 것도…… 잘하신 건 아니지만 과거의 그런 일들 때문에 강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그러셨으리라 생각해요.”
“사실 알고 있었어요. 대공 전하께서 생각보다 좋으신 분이라는 걸요.”
내 말에 도리어 렉스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 이곳에 있게 해주시는 것 자체가, 저를 배려해 주시는 것 자체가 그것들을 증명하니까요.”
소설 속에서는 그저 쌍둥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그런 걸로 마음을 대신하는 모자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아빠는 처음이다. 내가 들은 게 맞다면,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대공비가 낳은 론은 대공의 친자식이 아닐 테니까.
그래서 따로 그쪽엔 마음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이런 취급을 당해 놓고, 대공비의 잘못은 입에 담지도 않은 거지. 정말…… 바보같이.’
이제는 처음 대공이 되었을 때처럼 자신의 세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제껏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가…… 아니, 소설 속에서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가 이상할 따름이다.
‘아니면 너무 무기력해진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재는 좋은 상태인 건 확실하다.
“맞아요. 그러니까…… 대공 전하의 마음을 조금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렉스는 참 착한 사람 같아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저 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갇힌 사람일 뿐입니다.”
렉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 급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곧 대공비 마마의 정원에 도착합니다.”
“아. 대공비 마마의 정원은 여기 하나뿐이에요?”
“대공비 마마께서 묵으시는 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그녀가 그 씨앗을 가져왔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조차 심증일 뿐, 물증이 없다. 물증이없으면 밝힐 수도 없다. 어중간하게 말을 꺼내 봐야 핑곗거리만 만들기 편할 테니까. 증거가 완벽할 때 한 번에 말해서 검거를 해야 하니…….
‘분명 대공비는 이걸 외부로 돌리지 않았을 거야.’
누군가의 통해 라리를 그렇게 만든 씨앗을 가져왔다면 또 다른 증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했을 거 같진 않다. 그리고 그녀가 그동안 해온 걸 보면 바로바로 구할 수 있는 거 같았다. 그렇다는 건 그녀의 최측근이나 대공비 본인이 직접 재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아쉽네요…….”
“아무래도 대공가의 안주인이다 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시녀들을 영입하여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대공비 마마의 사람들은 절대 대공비 마마를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심각해지는 만큼, 렉스도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겠네요.”
대공비의 성 어딘가에 있을, 그것만 찾아내도 분명 도움이 될 텐데. 하지만 다짜고짜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왜 그러시나요?”
“건축 설계도를 혹시 얻을 수 있나요?”
“무언가 궁금한 게 있으신 거죠?”
내 질문에 렉스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낮춰 눈을 맞췄다.
“네. 혹여나 그…… 씨앗을 재배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해서요. 수입이 자유롭지 않은 품목. 그걸 굳이 자신임을 알 만한 정보를 흘려 가며 가져올 리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찾을 순 있을 겁니다. 원래라면 극비에 부쳐질 것이지만…… 대공가의 도서관에는 분명 있을 거예요. 아이샤 님이 도서관에 다니셨던 일들이 오늘 이날을 위해서 준비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런데 모든 걸 다 그려 놓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마도 비밀 통로나 이런 것들은 감춰져 있을 거예요.”
“괜찮아요. 그걸 재배하려면…… 비밀 통로나 통로는 아닐 테니까.”
“어딘가에 두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정확히는 어딘가에서 기르고 있을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조사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대공비의 정원에 다다랐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는 둘 다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근처에 있던 이들은 내 등장을 매우 못마땅한 듯 노려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대공비 마마를 뵈러 오셨습니까.”
“네.”
“따라오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분은 여기 계세요.”
“안전을 위해 함께 가겠습니다.”
“대공비 마마께서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유난스러우시네요.”
시종은 렉스를 보며 안색을 굳혔다.
“그래도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어디든 함께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공비 마마를 만나실 수 없으십니다. 지난번 이후,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리고 계셔서요. 오늘은 돌아가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전까지는 본 적 없는 단호함이었다. 원래라면 어지간해선 내 말을 들어주는 게 보통이었다. 대공비가 그렇게까지 나를 만나고 싶어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고, 렉스가 함께 가겠다고 하면 같이 들여보내 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아무래도 그 전 일로 대공비가 꽤 타격을 입었나 보다.
‘그게 아니면…… 오늘은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거겠지.’
본능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오늘은 렉스와 함께 들어가도 된다 해도 어쩐지 혼자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대공비는 극한에 몰린 상황이니까.
‘어쩌면…… 오늘 일을 벌일지 모르겠네.’
그녀에게 있어 나는 치워 버리고 싶은 존재일 것이다. 내가 있음으로 인해 대공이 변했으니까.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렉스를 바라봤다.
“렉스, 나 혼자 갔다 올게요.”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저희 대공비 마마께서 위험한 일을 하시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버럭 화를 내는 시종을 빤히 바라봤다. 저 말이 맞는 말인데, 정말 너무나도 맞는 말인데 조금 기묘했다.
유난스럽게 화를 내는 느낌이랄까. 무언가 들킨 사람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렉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하지만…….”
“대공비 마마께서 무슨 일을 하실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여전히 렉스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시종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불안한 모습을 느낀 건지, 마치 연기하듯 시종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기에서 대기하면 꽤 가까우니 여기 계세요. 그럼 되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게 해요.”
그들은, 대공비는 렉스가 여기에서 대기하길 바란 거구나.
그러고 보니 묘한 구석이 있긴 하다. 다른 이도 아닌 렉스에게, 기사인 렉스에게 굳이 대공비가 날 보고 싶어한다고 말한 거. 그리고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는 것처럼 강조하는 거.
그 모든 것들이 오늘 대공비가 일을 낼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언제나처럼 다른 이의 안내를 받으며 대공비가 있는 테이블까지 향했다. 여전히 우아하게 정원 한가운데서 차를 마시고 있던 그녀는 날 위아래로 훑었다.
“왔느냐.”
대공비의 얼굴은 여전히 똑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러고 있지.”
“제가 올 거라고 예상하셨어요?”
“아니. 올 것 같은 날에는 오지 않았고, 오지 않을 것 같은 오늘에는 왔으니 예상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도 여기 나와 계셨네요. 제가 올 걸 알았다는 듯이.”
“원래도 여기 있단다.”
“그렇구나.”
“우선 앉도록 해.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게.”
그 말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아까 렉스와 이야기하던 시종이 대공비에게 무어라 숙덕거렸다. 무표정하게 보고를 듣던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이샤. 너도 내게 할 말이 꽤 있나 보구나. 밖에서 살짝 소란이 있었다는데.”
“대공비 마마께서 할 말이 너~무 많으신 거 같아 들어드리러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