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다. 그러니 직접 가야 하는 게 맞다. 꼭 알고 싶은 정보도 있고.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대공비를 더 무너뜨려야 하는 걸까.’
이 정도면 충분히 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갇힌 상태고, 대공도 소설 속에 언급되던 것처럼 쌍둥이들을 키움에 있어 더 이상 대공비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면 다 된 게 아닐까.
이제 다 맡기고 나는 쌍둥이들과 행복하게 지내다 신전으로 가면 끝날 일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이대로 끝내면 안 될 것 같다고, 대신녀님은 시간이 되돌려져도 실패했다 했지만, 난…… 절대 실패할 수 없다.
“네! 가려고요.”
“안 가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대공 전하께서 못 가게 하신 거예요?”
“아니요. 대공 전하께서는 아이샤 님이 가는 곳은 모두 다 안내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저 제가 불안해서…….”
“렉스가 함께 가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어떤 경우에도 난 죽지 않을 거라고, 그리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일한 마음을 가져야, 내 자신을 내가 소중히 여기지 않아야만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게 느껴졌다.
미래를 바꾼다는 건, 그만큼 자신을 내놓아도 모자랄 만큼 힘든 거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대공 전하께는 말씀 안 드리고 가도 될까요?”
“곧 오실 거니까 편지 쓰고 가요.”
그리고 난 바보가 아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언제나 방비는 해놓는다.
죽을 각오로 하지만, 죽거나 다칠 일은 없을 거다. 그건 우리 애들이 싫어할 거니까.
그래서 난 편지를 꾹꾹 눌러 썼다. 그리고 렉스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은 지켜 줘요.”
“네.”
그렇게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렉스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어떻게서든 대공이 오면 가려는 듯 느릿느릿 발걸음을 움직였다.
“대공 전하께서 오시면 더 잘 아이샤 님을 지켜 주실 텐데요.”
“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요.”
“하아…… 전 걱정이 됩니다. 사실 지난번에 주신 그 물건도…… 알고 보니 매우 위험했던 거라는 걸 알아서…… 그것 때문에 혹시 아이샤 님의 건강이 나빠지신 건 아닐까, 걱정하고 또 했답니다. 물어봐야 하는데 시간은 안 되고…….”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마무리하고 온 거예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속에도 나왔듯 그는 신념이 굉장히 올곧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주인이 있다 한들,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으면 옳은 소리를 하는 그런 사람인 걸 안다. 그래서 조금은 답답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게 어떤 말인지 잘 알 거 같다.
“나한테 그 말을 전하고 싶어서요?”
“그런 것도 있고 아이샤 님을 지켜 드리고 싶어서요. 대공 전하께서 아이샤 님을 많이 신경 쓰고 계시거든요. 저 또한…….”
“왜요?”
묻지 않았던 말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묻고 싶었다. 마음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이샤 님을 정말 아끼세요. 절대 좁혀지지 않을 것 쌍둥이들과의 틈을 좁히게 해준 게 바로 아이샤 님이기 때문이에요. 저를 옆에 두신 것 또한 아끼셔서예요.”
“아낀다…….”
참 어색한 말이다. 누군가 나를 아낀다는 건, 내가 그런 존재가 되긴 했었나.
“별로 안 믿기시죠……?”
그는 내가 말끝을 흐리자 조금은 아쉬운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거 받아 본 적이 없어서요.”
“아…… 정말 아끼시면서도 안타까워하기도 하시는데…… 아이샤 님에 대해 대공 전하께서 조사하셨거든요. 이런 이야기 해도 될까요?”
“해도 돼요. 뭐…… 조사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거든요!”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자식들 곁에 두면서 나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렉스가 이런 말들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와 대공이 어떻게든 잘 지내게 하고 싶은 그런 맘인 거 같다.
“그렇죠……? 대공 전하께서는 아이샤 님을 아끼세요. 정말로. 아이샤 님은 어릴 적에 버려졌고 후원자가 없는 아이였다고…… 그래서 부모도 찾을 수 없었기에 무언가 원해서 이곳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걸 알고선 미안해하셨어요.”
“아.”
그제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만큼 신경 쓰고 계세요.”
“그래서 렉스를 통해 날 감시하는 거죠? 난 정말 다 괜찮아요.”
그때였다. 안쓰럽게 날 보던 렉스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욱더 어두워졌다.
“저, 아이샤 님.”
“네?”
“음. 무언가 오해하고 계신 거 같아서 먼저 말씀드리려 해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해요?”
“대공 전하께서는 제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그의 말이었다.
“아이샤 님께서는 아마도 제가, 아이샤 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하는 목적으로 있는 거라 생각하시는 거 같아서요.”
정확하게 꼽는 그를 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분은 순수하게 아이샤 님을 지켜 달라 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무언가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저 또한 아이샤 님과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구요. 그런 상황에서 아이샤 님이 뭘 하는지 제게 말해 달라 하지도 않으셨어요.”
“정말요?”
그건 의외였다. 그 씨앗에 대해 대공이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긴 했다. 렉스가 혹시 보고를 하지 않은 건가, 그래서 모르는 건가 했었는데…… 정말 몰랐다니.
놀라움이 느껴졌다. 정말 보고받는 용도로 렉스를 둔 게 아닌가. 겸사겸사라 생각했는데.
“아, 아니다. 있긴 했네요.”
역시나 보고 안 했을 리 없다고, 대공이 내 모든 걸 알고 싶어했을 게 분명하다고, 그런 생각들을 하던 찰나 그가 씩 웃었다.
“도서관에 관한 일 정도는 이야기했네요. 그 외에는 정말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으시던가요?”
“아니요. 많이 궁금해하셨습니다. 대공가에는 잘 적응한 건지, 필요한 건 없는지. 그런 것들을 궁금해하셨으나 묻지는 않으셨습니다.”
“아.”
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대공 전하께서는 그런 분이십니다. 표현하진 못하셔도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하세요. 하지만 표현할 줄 모르시죠.”
“표현……할 줄 모른다…….”
믿기지 않는 말에 내가 천천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대공 전하의 이야기를 잠시 해드릴까요? 아이샤 님은 수도에 살지 않으셨고, 아직 어리시기에 듣지 못하셨을……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물론 대공 전하께서 직접 하시면 좋겠지만 절대…… 남을 믿지 않으시는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아마 이야기하실 일은 없으실 거예요. 그럼에도 말씀드리려 하는 건…… 아이샤 님도 조금은 대공 전하에 대해 이해해 주셨으면 해서예요.”
난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남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쌍둥이들을 가지기 전, 대공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쌍둥이들은 그 여인을 통해 낳은 아이들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미 그때 전에, 아니 대공비를 들이기도 전에 그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경향이 확실히 있었다.
소설 속에서 언급되었고, 그래서 쌍둥이들에게 그리 잘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차라리 주변에 묻고 변하면 될 텐데, 그는 절대 그런 게 없었다.
혼자 독단적으로 생각했고, 혼자 행동했고. 그게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는 채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쌍둥이들과의 틈이 그리도 좁아지지 못한 것이었다. 그나마 물은 게 대공비였다.
아이를 키워 봤으니까, 그녀라면 쌍둥이들에 대해 잘 알 거라 생각하고, 쌍둥이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 결과 최악의 수가 나왔지만,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다른 이에게 기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니.
‘쌍둥이들에 대한 이야기일까. 대공비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는 천천히 정면을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요?”
“대공 전하께서는 원래 장자가 아니셨습니다. 정식 후계자가 아니셨죠.”
“아.”
“제플리 도련님의 부친이신 카시어스 대공 전하가 계셨죠. 카시어스 대공 전하께서는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아이조차 어린 나이에 보셨죠. 하지만 카시어스 대공 전하께서는 제플리 도련님이 성장하는 걸 보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레디아 대공비께서도 제플리 도련님을 낳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안다. 소설에도 언급되었던 이야기니까. 이제는 흐릿해져 버린 소설에 대한 이야기. 소설의 결말도, 소설의 중간 스토리도 내 머릿속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런 부분들은 기억한다.
“현재 대공비 마마이신 헬렌 대공비께서는 원래 카시어스 대공 전하의 후비셨답니다.”
“그렇구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미르 대공 전하, 현 대공 전하께서는 대공이 되고 싶어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떠나고 싶어하셨죠. 하지만 카시어스 대공 전하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셨고 결국 이어받으셔야 했죠. 그 과정 중에 카시미르 대공 전하께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으셔야 했죠. 헬렌 님이 자신은 대공비가 되겠다고, 남편이 죽어 버린 자신은 뭐가 되냐면서 난리를 치셨…… 흐흠, 어쨌든 그래서 헬렌 님을 대공비로 올리셨죠. 그때부터 대공께서는…… 꽤 힘든 생활이 시작되셨어요.”
“힘든 생활?”
“아이를 가지지 못하셨거든요. 사랑 없이 한 결혼이었으나, 헬렌 대공비께서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압박하셨어요.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는 가질 수 없었고, 헬렌 대공비와 그분의 가문에서 대공 전하께서 후사를 못 보는 몸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런 게 소설 속에서 나왔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