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라리야!!”
“라리!”
“아가.”
나를 필두로 로헨과 대공이 라리를 불렀다. 당장이라도 라리가 몸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에 대공은 급히 거실을 지나 침실로 가 아이를 눕혔다.
대공의 성정과 딱 어울리게 온통 가구들이 검은 방.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히 눈을 뜰 거 같지 않던 라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라리의 손을 꼭 잡았다.
“라리야…… 언제까지 언니 기다리게 할 거야…….”
로헨이 반대편 손을 잡았다.
“너 눈 안 뜨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러니까…… 어서 눈을 떠.”
그 목소리를 들은 걸까. 라리가 아주 천천히 느리게 눈을 떴다. 하늘색 눈동자가 멍하니 천장으로 향했다.
“늦잠꾸러기…… 이제 일어났어?”
나는 라리를 보며 울 것 같은 마음을 애써 내려 두었다. 혹시 라리를 보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괜찮은 척했는데, 다 잘될 거라고 자부했는데. 그 마음 어딘가에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그걸 몰랐는데, 라리가 눈을 뜨자 알게 되었다. 내가 유난히도 무서웠다는 것을. 소설에서는 라리가 죽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라리가 잘못될까 봐, 나 때문에 틀어진 것들 때문에 라리가 일찍 세상을 떠날까 봐 두려웠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언니…… 언제까지 걱정시킬 거야…….”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언니……야…….”
아주 느리지만, 아주 작지만 또렷하게 그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난 눈물을 닦고 라리를 바라봤다.
“라리…….”
라리의 손이 천천히 내 볼을 훑었다.
“왜…… 울어…….”
축복을 받고 있었고, 대신녀님의 힘 덕분에 깨어나서인지 크게 아픈 곳은 없는 건지 라리는 예전처럼 활력을 되찾았다.
“물이라도 먹이도록.”
가만히 우리 뒤에 있던 대공은 물을 한잔 따라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조심히 그걸 받아 들었다. 로헨이 빠르게 라리를 앉혔고, 라리는 그걸 천천히 마셨다.
“시원해!”
회복력이 빠른 대공가의 핏줄답게 라리는 빠르게 회복하고선 나를 바라봤다.
“언니야!!”
그러더니 나를 다시금 꼭 껴안았다.
“으응…… 라리. 괜찮아?”
“언니야. 언니야. 어디 안 갔지? 우리 언니야 맞지?”
나를 여기저기 살피던 라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언니야가 쪼꼬만해져따.”
“응?”
“언니 엄청 컸는데…… 되게 짝아졌다.”
“라리도 작아.”
“아!”
라리는 그제야 자신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러네!”
“라리가…… 이상해졌다.”
그제야 라리는 로헨을 바라봤다.
“오빠는 왜 이리 쥐똥이야?”
“……쥐똥이라니. 네가 이상한 거야. 무슨 꿈 꿨길래 작아졌다느니 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어! 막 이상한 꿈이었어. 우리가 다 어른이 되었어. 언니는 그때두 되게 이뻤구! 히히. 그래서 되게 좋았는데…… 그래서 어른이 된 줄 알았어.”
“바보네. 푹 자고 일어나더니 바보가 되었어.”
“바보 아니야! 그런데 거기서 언니가 우릴 떠나서 무서웠단 말이야.”
라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데 좀 기분이 묘했다.
“내가…… 너희들을 떠났어?”
“응! 지금이랑 달리 언니야가 우리한테 막 존댓말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졌어. 나는 너무 슬펐어. 그때도 지금도 라리는 언니야 좋아하는데.”
그러더니 내 품에 폭 안겨 버렸다.
“어디 가면 안 돼?”
“응. 안 가!”
“섭섭하네. 오빠가 옆에 있는데 아이샤만 찾는 거야?”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불편감이 떠올랐다. 라리가 봤다는 그 꿈이 소설 속 그 시간 같아서, 내가 쌍둥이들의 하녀로 들어와서 둘을 떠났던 그때 같아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왜 라리는 하필 그런 꿈을 꾼 거지.
‘그냥 우연일 거야. 우연히 그런 꿈을 꿀 수도 있지. 라리는 아주 오래오래 잤으니까.’
“언니 다시는 어디 가지 않기야. 언니 어디 가면 내가 언니 다리 부러뜨려서라도 옆에 둘 거야. 히히.”
라리는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순간 등골이 싸해졌다.
“농담도 참.”
“농담 아니야. 진짜야. 언니 어디 가면 안 돼?”
“어…… 어. 응. 그, 그보다 라리야, 혹시 잠들기 전에 마지막을 기억해?”
“웅!”
라리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혹시 잠들기 전에 이상한 거 없었어?”
“우웅…… 움…… 아! 시녀 언니들이 나한테만 몸에 좋은 거라고 뭐 먹였어!”
“……뭘 먹였다고?”
“응! 언니야랑 오빠한테는 말하지 말고 나 혼자만 먹으라 했어. 나만 성장이 너무 늦어지니까, 이대로 시간 지나면 라리만 작다고, 오빠랑 언니야가 나랑 안 놀아 줄 거라고. 그러니까 빨리 커야 한다면서 먹였어!”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누가 그랬어?”
“잘 모르겠어. 새로 왔다는 사람이었는데, 그 전에 본 적이 있는 거 같기두 하구우…… 그건 기억 안 난당! 그러고 나서 바로 졸려서 푹 잔 거 같아. 헤헤.”
라리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아무 일이 아닐 리가 없다. 라리는 그 후로 잠들었고 실제로 깨어나지 못할 뻔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었나.”
잔뜩 분노한 목소리를 낸 건 대공이었다.
“안 되겠군. 이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사를 해야겠어. 라리. 데려오면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겠느냐?”
“네!”
“시간이 너무 지나서 아마…… 찾기 힘들 거예요. 오히려 그냥 두는 게 어떠세요?”
그리고 난 그런 대공에게 천천히 내 생각을 말했다.
“뭐라? 그딴 것들을 그냥 둬?”
“대신 라리가 돌아다니면서 대공가에서 아직 일하는지 파악하면 되는 거고 이 일에 대해서는 조용히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결국 이 일에 대해 들킬까 봐 라리에게 또 어떠한 해코지를 하려 할 테니까…… 현장 적발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내내 흥분하며 씩식거리던 대공이 차분해졌다.
“그렇군. 그럴 수 있어. 역시 나보단 네가 더 나은 거 같구나. 아이샤.”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지금 이 타이밍에 말해도 될까. 마음 같아서는 루즈엘라, 영원한 꿈에 대해서 말해야 할 거 같지만, 라리의 앞에서는 아닌 것 같다.
‘거기에 렉스가 다른 정보를 알아 왔을지 모르니…… 우선 그쪽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네.’
“그러면 네 말대로 하자꾸나. 로헨. 네가 조금도 시선을 떼지 말고 라리를 지키거라.”
“걱정 마. 내 동생이야. 내가 지킬 거야.”
대공비가 그렇게까지 라리를 못 깨어나게 하고 싶어한 게 이런 연유였던가.
이것조차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에 라리는 이렇게까지 오래 깨어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이 모든 게 내가 개입해서 생긴 일이고, 대공비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라리 먼저 죽이려고 한 건…… 나 때문에 생긴 일인가. 그래서 아까 대신녀님이 도와주셨다는 말에 그렇게 군 건가.
그래서 그렇게…… 모든 게 다 극단적으로, 도저히 어른의 생각이라고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얕은수를 써가며 온 것이었나.
“어찌 되었든 지금은 라리가 일어난 소식을 크게 알리고, 대신에 라리가 기억하는 것들을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해요.”
“그러도록 하지.”
대공비는 결국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과 연을 이을 생각을 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며 난 현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다. 우리 라리. 라리는 그냥 여기서 쉬면 돼.”
“그런데 여기 어디야?”
“대공 전하의 방. 설명은 우리 라리가 많이 좋아지면 그때 할게.”
“응! 나는 언니야가 좋아.”
꿈에서 나를 잃어버린 기억 때문인지 라리는 여느 때보다 내게 집착했고, 난 그런 라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
대공비에게서 우리 쪽으로 연락이 온 건 그날로부터 꼬박 이틀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바로 내게 연락을 해 왔다. 그것도 방의 조사를 모두 끝마치고 대공의 방으로 온 렉스를 통해서였다.
모든 일들을 대공이 방 안에서 하긴 했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까지 이곳에서 할 순 없었기에 잠시 그가 자리를 비웠고, 렉스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대공 전하는 안 계신가 보네요.”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그런데 렉스가 왔다는 건 방의 조사가 모두 끝났다는 거예요?”
“네.”
나는 잠시 거실과 이어진 침실로 다가갔다. 쌍둥이들은 밥을 먹은 뒤 방에서 잠이 든 상태였다. 난 문을 닫고선 밖으로 나왔다. 대공 방에 있는 거실이자 임시 집무실에는 온갖 서류들이 가득했다.
정말 나에게 대공가의 살림을 맡기려는 것인지 대공은 수많은 서류들을 가져왔고 난 예상과 다르게 이곳에서 그 서류들을 살펴고 있던 차였다.
“일이 많으시네요.”
“아무래도요…… 그래서 거기서 뭔가 확인되었나요?”
“네. 그때 제게 맡기신 그 씨앗과 비슷한 것들을 침구류에서도 발견했습니다. 이걸 대공 전하께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조사는 다 끝난 거죠?”
“네.”
“으음…….”
“그리고 한 가지 더. 대공비 마마께서 저를 통해 아이샤 님께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때 너무 막 나간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시간이 되면 한번 와달라고 말이죠.”
순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아. 대공비 마마께서 현재 자신의 성에서 못 나오고 계셔서 시녀를 통해 전해온 겁니다.”
“아. 저를 보자 해요?”
“네. 저는 안 가셨으면 하지만…….”
내가 원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녀를 통해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남아 있다.
“좋네요.”
“네……? 설마 가시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