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82)화 (82/99)

-82화- 

아니구나. 론은 대공의 자식이 아니었구나.

론이 대공의 아들치고는 유난히 부진했던 게 모두 그 이유였던가.

‘외양은 퍽 닮았는데.’

소설 속에서도 대공의 아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무능력자라는 말이 나오긴 했었다. 그래서 대공이 론은 아예 후계로 생각지도 않았던 건가.

“지,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마치 우리 론이 진짜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글쎄. 진실은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 아니면 내 입에서 무언가 듣길 원하나?”

“…….”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도록. 혹여나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힘들게 한 정황이 나타난다면, 난 그대를 내칠 것이다.”

그 말에 대공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러는 게 말이 돼요? 내친다니요. 나를? 당신이 나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내가, 내가 어떻게 대공가를 이끌었는데!”

“그러니까 그런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하란 말이다.”

“……나는 잘 지내보려 했어요. 아이들이랑도. 하지만 저 아이가 계속 막은 거예요.”

갑작스럽게 대공비의 손가락이 내게로 향했다. 모든 책임을 내게 전가하듯이.

“저 아이만 아니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저요?”

“그래, 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뭐?”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과할게요. 그러니 말씀해 주세요.”

대공은 나서서 그 상황을 막으려다가, 내 행동을 보고선 대공비를 바라봤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표정이었다.

“어디서 버러지 같은 게 들어와서, 나한테 말하라고? 나한테 명령을 해?”

“명령 아니에요. 잘못한 게 없는 거 같은데 잘못했다 하시니, 그에 대해 말해 달란 것뿐이에요. 아니면 없으신 건가요?”

아무 감정 없는 어조로 그녀에게 한마디 한마디 뱉어 냈다. 어차피 그녀와 잘 지내보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 저……!”

“저는 어차피 불순물 같은 존재잖아요. 그러니 눈치 보면서 살았는데…… 저에게 잘못했다 하시면…… 전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그냥 잠자코 있어야 했을까요?”

조금 불쌍한 척 굴었다. 여기서 굳이 대공비에게 맞설 필요도 없으니까. 오늘 그녀는 훌륭하게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고 덕분에 의도치 않은 소득도 얻었다.

방을 옮길 수 있었고, 대공비의 아들인 론의 출생의 비밀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대공도 과거처럼 대공비에게 의지하여 쌍둥이들도 대하지 않았고.’

그거면 너무나 완벽한 소득인 듯싶다.

“저, 저게 정말. 제가 피해자인 척 말하네!”

“그만하지. 여덟 살짜리 아이한테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아니, 아니. 저 애가, 저 애가……!”

가끔은 어리다는 게 보호막이 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저 영악한 애가 지금 당신 앞이라고 내게 저러는 거라고요! 내 앞에서는…… 내 앞에서는 뭐라 했는데! 내 앞에서는 내 손을 잡아 내 뜻대로 움직일 것처럼 그래 놓고 지금……!”

“뭐라 했길래?”

“그게…….”

저렇게 말하기 힘들어하신다면 직접 말해 드려야지.

“쌍둥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 달라 하셨어요. 그에 대해서는 전 대답 안 했는데, 그거 가지고 오해하셨나 봐요.”

“저…… 저게……!”

“아, 비밀이었나요?!”

“……하, 정말…….”

“참 어린아이를 데리고 잘하는 짓이군. 대공비. 그대는 내가 말할 때까지 자신의 궁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말도록.”

결국 분노한 대공은 대공비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잠깐만요. 지금 나를…… 나를 가둬 두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이 나를? 헬렌 블레어 대공비를?”

“왜. 이젠 대공인 내 명령까지 무시하겠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요…… 부당하다는 거죠…… 우리 둘이서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지금 시점에서 할 이야기 없다. 그대가 방에 갇혀 스스로 잘 반성한다면, 그때 생각해 보지. 우린 들어가자꾸나.”

그리고 대공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로헨은 잔뜩 성난 표정으로 대공비를 바라보다가 기분 나쁜 듯 뒤도 안 돌아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 쪼르르 들어갔다가 다시금 대공비에게로 다가갔다.

“아, 그리고 대공비 마마. 의원을 보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딱히 의원이 필요 없는 거 같더라고요. 라리가 곧 일어난대요. 대신녀님이 라리를 치료해 주셨어요.”

“뭐? 대신녀가? 왜?”

“지난번에 부탁드렸거든요. 라리를 깨어나게 해달라고.”

“뭐? 그러면 왜 의원을 불러 달라 했으며 왜 그자를 신전으로 데려간 거지?”

잔뜩 성이 난 대공비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대공비 마마를 자극해 보려고요.”

“뭐?”

“이런 거면 되게 어린아이 안 같겠죠? 농담이에요. 얼굴 푸세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대신녀님이 힘을 써주셨다고 그렇게 한 번에 괜찮아질지 몰랐거든요. 어쨌든 불러 주신 건 감사해요. 그 말 하고 싶었어요.”

“저저…… 저게 나를 가지고 놀아?”

“오해하지 마세요. 전 그럴 의도 없었으니까. 그러면 이만. 들어가세요, 대공비 마마. 아, 라리가 일어나면 인사하러 한번 가도록 할게요!”

대공비는 날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손을 뻗었지만, 대공의 방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공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하러 저런 사람을 상대해!”

한발 늦게 들어온 날 보며 로헨이 잔뜩 성을 냈다.

“아…… 아니, 할 말이 있어서…….”

“할 말이 있으면 같이 가야지. 뭘 할 줄 알고 저 사람한테 혼자 가!”

“미안.”

어쩐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냥 잠깐 말하고 왔을 뿐인데.

“그리고 아까 그 이야기는 뭐야. 저 사람이 정말 너한테 그랬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 달라고?”

“어…… 응.”

“그런 거 보면 대처가 꽤나 똑똑했구나. 대공비와 둘이 있는 자리에서 싫다고 해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테니, 차라리 말을 무시하는 게 제일이긴 했겠지. 아이샤. 너는 꽤 똑똑한 것 같아.”

어쩐 일로 대공이 나를 칭찬했다.

평소랑은 조금 달랐다. 그 칭찬이 무겁다고 해야 할까. 뭔가 의도가 담긴 듯한 느낌이다.

“아이샤가 원래 똑똑해. 그걸 이제 알았어, 아빠?”

“어. 어. 나는 몰랐지.”

“하여튼, 다들 멍청하다니까. 아이샤가 얼마나 똑똑한데.”

로헨은 뿌듯한 듯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이제 로헨은 대놓고 대공을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게 좋았던 건지 대공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짓다가 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된 거, 네가 일 좀 하나 맡거라.”

“네? 제가요?”

“그래. 대공비에게 보여 줘야 할 거 같아 말이지.”

왜일까. 왜 이리 등골이 서늘한 걸까. 뭘 보여 준다는 거지.

“뭘……요……?”

“대공가를 네가 꾸려 보거라.”

“……네?”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래. 나는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제가요? 미천한 제가요?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는 저를 되게 싫어하셨던 거 아니세요?”

“뭐. 그때는 그랬지. 하지만 겪어 보니 넌 정말 내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거 같구나. 머리도 꽤 똑똑한 거 같고. 그러니 네가 보여 주거라. 대공비가 얼마나 그동안 멍청한 짓을 했는지.”

그제야 그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느낌이 딱 왔다.

#(회시)“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대단하다고 칭찬이라도 해야 할 판이야. 내가 한 과거의 짓들을 하나하나 꼬집으며 맹렬히 비난하고, 나같은 인간은 대공가를 제대로 꾸리지 못한다며 그대에게 모든 걸 위임했는데…… 이건,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맡긴 것만도 못해.”#(회끝)

어쩐지 아까 저 말을 했을 때 대공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이유가, 나한테 대공가를 꾸리라는 뜻이라니.

“네가 잘해서 대공비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무나. 그녀가 몇 년 동안 해온 게 여덟 살짜리,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너보다 못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 주거라.”

“아. 저 그런데 진짜…… 저는…… 좀 아닌 거 같아요. 이참에 따로 사람을 두시는 건 어떠실까요?”

“못 믿는다.”

“아니, 저는…… 저는 더 못 믿는 거 아니세요?”

“아니. 믿을 만해.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아주 믿을 만하다.”

“아니…… 정말…….”

“네가 잘하는 걸 보여 줘야 대공비도 타격이 있겠지. 어떠냐. 로헨. 내 생각이.”

“어. 아빠 말에 대해서 내가 딱히 호응하진 못했었는데, 이번 일은 호응해 줄 수 있을 거 같아. 아이샤. 아빠 말이 맞아. 네가 해. 내가 본 사람중에, 어른까지 다 포함해서 네가 젤 똑똑해.”

아니…… 왜 이럴 때는 서로 손발이 척척 맞는데.

대공은 뿌듯한 듯 로헨의 어깨를 툭툭 쳤고, 로헨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제가 망하게 하면 어쩌려고요. 대공비 마마보다 못하면…….”

“네가 발로 해도 그보단 잘할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도록 해. 이건 명령이다.”

“아니이…….”

“음…… 명령으로도 안 통하면, 아이들과 계속 있고 싶다면 그리하도록 해.”

와, 이런 걸로 협박한다고. 대공이라는 사람이 쫌생이네, 쫌생이.

난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알겠어요…….”

“대공비보다 꼭 잘해야 한다. 뭐 딱히 할 게 없긴 해.”

“……하. 대공 전하. 저는…….”

저는 이런 걸 할 사람이 진짜 아닌 거 같은데요. 그냥 또래보다 똑똑한 건 미래를 알아서, 어른이 돼봐서 그런 건데…… 하지만 그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믿는다.”

“믿어. 아이샤.”

두 사람은 똑같은 얼굴로 나에게 힘내라는 듯 손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우웅…….”

대공의 품에 있던 라리의 몸이 꿈틀거림과 동시에 아이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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