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멜로디아 신녀에 관한 것.
원래 소설 속에서 그녀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상 지금보다 더 미래의 시간이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히 나오지 않는 인물도 생겼다. 소설은 어차피 여주와 황태자의 이야기였으니까.
결국 두 사람과 관련 없는 자들의 서술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나마 쌍둥이들에 대한 건, 그들이 악역들이었으니까 나온 것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크게 나올 일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알 수 있는 건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멜로디아 신녀에 대한 건 그저 내 생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래도 좀 찝찝하다.
‘어쩌면…… 멜로디아 신녀가 대공비의 편이었던 건 아닐까? 아냐. 확실히 대공비의 편인 거야.’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지만, 이것만큼 현 상황을 잘 설명해 줄 만한 일은 없다.
‘쌍둥이들 모친의 특이 사항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면, 멜로디아 신녀가 그녀를 알고 있다는 건 명확해진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상해. 소설에서는 원래 아주 나중에 여주인공이 쌍둥이들의 모친을 찾는데. 만약에 지금부터 멜로디아 신녀가 대공에게 말을 했었더라면…….
‘오히려 대공 쪽에서 더 빠르게 찾았을 텐데.’
내가 소설에 개입하면서부터 무언가 빨라진 건가. 대공이 쌍둥이들을 찾아온 것도 그렇고.
‘소설 속에서는 멜로디아 신녀가 여주에게 쌍둥이들의 모친에 대해 알려 준 건가? 대공비를 막판에 배신하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대공비는 아무 힘이 없으니까, 그녀와 인연을 끊어 버리고…… 쌍둥이들의 모친이 신전으로 도망친 건 우연이 아니라 멜로디아 신녀가 준비한 일일지도 몰라.’
의아한 건 왜 지금이냐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멜로디아 신녀가 이런 식으로 알고 있다 말해 놓고 대공을 떠보는 건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걱정 말거라.”
“……네?”
“내가 또 이야기해 주지 않을까 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 아니더냐.”
“아.”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걸 가지고 오해한 모양이다. 그런데 참 마음에 드는 오해다.
“네. 맞아요.”
그래서 나도 그 오해에 거짓말을 조금 보탰다.
“그래. 너도 궁금하겠지. 너는 어쩌면 나보다 더…… 쌍둥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거 같으니. 아이들의 엄마도 궁금하겠지.”
“네.”
“알겠다. 새로운 게 있으면 이야기해 주마. 그런데 너는 너의 엄마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더냐. 그리울 거 같은데.”
“아.”
어른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립지 않은 사람조차 그리울 거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아이샤에게 엄마란 자신을 버리고 간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립거나 보고 싶다든가 그런 마음은 어릴 적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보고 싶었더라면 이름 하나는 지어 주고 갔을 거라고. 쪽지 하나는 두고 갔을 거라고. 아니면 다른 아이들의 엄마들처럼 찾아오기라도 했을 거라고.
하지만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정이 있어서 찾아오지 못하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해봤자 희망고문일 뿐이다, 아이샤에게는.
“별로요.”
“알았다. 그래도 찾으면 알려 줄까?”
“……그냥 궁금은 하네요. 왜 버려 놓고 단 한 번 찾아오지도 않은 건지.”
혹시나 쌍둥이들의 엄마처럼 나름의 사정이 있던 건지. 하지만 그런 사정이 없을 거라는 건 너무나 잘 안다. 나는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니까. 내 기억속,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의 그 시간의 내게도 엄마는 없으니까.
결국 날 찾는 이는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단 소리다. 그게 슬프진 않았는데, 오늘은 조금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난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분위기가 싫다.
“그런데 대공님은 왜 아무 말 하지 않으세요?”
“응? 무엇을?”
“대신녀님을 만나는 거요…….”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난 신전은 좋아하지 않지만, 대신녀님은 다르다 생각한다. 그분은 진정으로 신에 닿아 있는 분이니까.”
“그렇구나.”
“라리를 도와주신 것도, 너를 따로 불러 예뻐하시는 것도 모두 뜻이 있겠지. 그저 나는 감사할 뿐이다.”
대공은 진심을 다해 라리를 바라봤다. 정말 아빠의 눈으로. 서투르지만 사랑과 진심이 담긴 눈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로헨도 그걸 느낀 건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히 내게서부터 화제가 멀어졌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을까, 대공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는 대공가로 향했다.
유난히도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좋은 날에는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대공가에 도착한 뒤 우린 바로 방으로 향했다.
곧 깨어날 라리를 기다리며, 품 가득 꽃다발을 들고 들어갔는데…… 우리 방이 엉망이었다.
너무나 예상 가능 한 범주 내였던지라,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방이…… 꼴이 엉망이군.”
하지만 범인을 누구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으니까.
“좋아.”
그런데 예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했다. 외출하고 오면 대공이 함께 방으로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방이 엉망이 되어 있을 거라는 것도. 이 방 곳곳에는 어지러운 틈을 타, 다시금 우리에게, 그리고 라리에게 독약이 될 만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걸 물증 삼을 생각이었다. 분명 라리를 잠들게 만든 건 대공비이고, 그 독이 라리에게 효과가 있는 걸 알았으니 무언가 더 할 거라 생각했다. 이제 그녀에게 쌍둥이들은 물론이고 나도 눈엣가시일 테니까.
“내 방으로 가지.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도록.”
“네?”
“왜 그런 반응이지?”
“아…… 그게…….”
저는 이 방에 남아서 증거 수집 좀 해야 해서요. 그 말을 해야 하는데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런 방에서 아이들을 지내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아. 그럼 저는 이곳에…….”
“너도 함께다.”
“배려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너를 위한 일이 아니다. 쌍둥이들을 위한 거지.”
그 말과 함께 대공은 다시금 문 밖으로 나섰다.
“아…… 하지만…….”
“렉스.”
“네.”
“이 방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이 방에 드나들었던 너라면 알 수 있겠지.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바뀐 건지. 무언가 찾기 위해 엉망으로 만든 건지, 아니면 무언가 숨기기 위해 엉망으로 만든 건지.”
마치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대공은 렉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너 이외에는 어떤 이도 들어가지 못하게 조치해 놓을 테니, 조사가 끝나면 보고하러 오도록. 당분간 아이샤의 호위는 쉬어라. 아이들은 안전상 내 방에서 외출도 못 하게 둘 테니. 확실하게, 빠르게 조사하고 오도록 해.”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던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되었나.”
“아…… 제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아셨어요?”
“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거든. 이상하리만큼 아까 대공비를 도발한 것도 모두 이 탓이겠지. 무언가 바뀌는 걸 보기 위해.”
대공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많은 것들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대공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아…….”
“넌 참 똑똑한 아이구나 싶더구나.”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이렇게까지 했으니 내 방으로 돌아가도 되겠지?”
“네.”
내가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배려해 준다는데, 여기서 더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우리는 대공의 방으로 향했다. 도리어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대공의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번졌다. 왜일까. 왜 저리 좋아하는 게 느껴질까.
자신의 방을 내주어야 하는건데.
‘렉스가 무언가 찾아올 거라 생각하는 걸까?’
조사한다 한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길고 긴 복도를 지나, 대공성의 본성 2층에 위치한 방에 당도했다. 중앙에서 약간 우측으로 치우쳐 있는 방. 그리고 그 앞에는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대공에게 있어서도 퍽 달가운 손님은 아닌 듯,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대가 왜 내 방 앞에 있는 거지?”
대공비였다. 그녀는 우리를 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돌아오면 이야기 좀 할까 해서 기다렸어요. 그런데 아이들과 더 할 말이 있나 보네요? 왜 이곳까지 줄줄이 달고 온 건지. 또 기다려야 해요?”
“딱히 할 말이 없다 생각하는데. 그리고 할 말이 있어서 데려온 게 아니다. 방이 엉망이기에 아이들을 데려온 것뿐.”
“데려왔다니요. 설마 아이들을 당신 방에서 지내게 하겠다는 뭐 그런 말이에요?”
대공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지.”
“허…… 방이 엉망이면…… 손님용 방에서 지내게 하든가 하면 되잖아요. 왜 자꾸 아이들에게 특혜를 주는 거죠?”
“특혜라…… 대공비. 그 말 아나.”
“무슨 말이요.”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말.”
“…….”
“그대는 실로 멍청한 짓을 했어.”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말이었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멍청한 짓이라니. 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네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
“날 떠보기라도 하는 거예요?”
“글쎄. 떠보는 건지 무언가 정말 알고 있는 건지는…… 차차 지켜보도록 해.”
“정말…… 나랑 따로 이야기 좀 해요. 나는 당신하고 다시 잘 지내고 싶어요. 사랑이 없긴 했지만 이상적인 부부였잖아요.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우리 아이? 아. 설마 론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졌다. 로헨은 무언가 불안한 듯 내 손을 꼭 잡았다.
“맞아요. 론을 이야기하는 거.”
“론이라…… 참 재미있군. 그 아이의 이름을 말할 줄이야. 대공비. 그 아이라도 살리고 싶으면 적당히 하도록. 내 자식들을 괴롭히는 건 나도 못 보겠으니까.”
“지금 자기 자식을 가지고 협박하는 거예요?”
“내 자식이라.”
피식 웃은 대공은 말없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 내 자식. 내 자식이지. 내 자식이어야지. 론을 낳은 어미가 그렇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