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할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뜻.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조금 특별한 사람이래.”
“아. 그거 좋은 거 아냐?”
로헨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응. 대신녀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다른 이들을 낫게 해줄 수 있고, 내 몸을 스스로 치유한대. 아플 일도 없고.”
“아플 일 없다는 게 제일 좋다.”
해맑게 웃는 로헨을 보며 마음속 어딘가가 따끔따끔해졌다. 나는 지금 맞는 일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진실을 말하니까 된 게 아닐까. 나는 또 그런 안일한 생각을 가졌다.
그러는 사이 내 손은 빠르게 꽃을 하나로 엮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쁜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그래 봐야 꽃줄기를 서로서로 엮은 거에다가 머리에 묶고 왔던 리본을 풀어 내서 단 것뿐이지만.
“예쁘지!”
순간 머리에 묶었던 리본이 풀어지면서 머리가 바닥으로 사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바라본 로헨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 그동안 말하지 않았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닌가 보네?”
갑작스럽게 로헨의 표정이 변했다.
“어……?”
“정말 좋은 거였다면, 그냥 좋기만 한 거였다면 너는 분명 내게 말했겠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지만 고민하고 또 고민 끝에 이야기한 거 보면…… 뭔가 있구나.”
“로헨…….”
“혹시…… 우리 곁을 떠나야 하거나 그런 거야? 대신녀님은 이곳에 있으니까, 너도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로헨의 눈동자가 붉어 보이는 걸까. 그 시선이 왜 이다지도 슬픈 걸까.
“그건…… 나중의 일이야.”
“아니라고 하지 않는 거 보니, 내 말이 맞나 보네.”
“로헨.”
“괜찮아. 다 이해해.”
“……정말로?”
“하지만 우릴 떠날 순 없어.”
꽃다발을 든 내 손목을 잡아챈 로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곁에서 네가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힘 따윈 필요없어. 내가 널 지키면 되니까. 그러니까 떠날 생각 마.”
“로헨…… 아파.”
“아파도 참아. 네가 떠난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더 아프니까. 왜 자꾸만 우리를 떠나려 하는 거야? 우리는 너만 있으면 된다 했는데, 너만 있으면 되는데. 짐승처럼 살아도, 얻어 처맞고 살아도, 죽을 거 같아도 너만 있으면 된다는데 왜 너는 그게 안 돼?”
가슴이 저미는 것 같다.
“로헨.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
“어.”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어.”
“하지만 너의 집착의 대상은 내가 아닌걸.”
너와 라리가 집착해야 하는 대상은 소설 속 여주인공인걸. 지금 내게 가지는 이런 마음은, 아직 여주인공을 만나지 못해서 가지는 그런 마음인걸.
“……집착의 대상은 내가 정해. 네가 우리를 지켜 주고자 아등바등했을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너는 내 거였어. 우리 곁에서 못 떠나.”
“그러면 로헨.”
“어.”
“그 마음 변치 말아야 해.”
나는 로헨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안 변해. 우리가 좋아하고 집착하는 건 너뿐이야.”
여주를 사랑하면서, 그녀에게 집착하거나 하면 안 돼. 그렇게 되어 버리면, 소설처럼 로헨과 라리는 여주가 사랑한 황태자에게 목숨을 잃게 될 거니까.
나는 그 꼴 못 본다.
“응.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돼?”
“어. 너만. 오로지 너만 좋아할 거야. 너만…….”
무언가 뒷말을 더하려던 로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떠나지 마. 떠나는 순간…….”
“어떻게 할 거야?”
“납치할 거야.”
미래의 로헨과 라리가 여주에게 했던 게 바로 납치였다. 그런데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납치한다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진심인데.”
“응응. 알았어.”
그냥 아무리 시간이 바뀌고, 다른 선택들을 한다 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게 신기해서. 그래서 웃는 거야. 그 말은 할 수 없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떠날 생각 하지 마. 혹여나 대신녀님이 너를 데리고 간다 해도…… 못 가겠다 해. 아직 라리도 몸이 회복 안 되었고. 그래, 다음번엔 내가 아프다 해. 그래서 못 가겠다고. 알았지?”
“응.”
“거짓말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알았어. 알았어.”
로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작은 머리통 안에 얼마나 많은 고민들과 생각들이 있는 걸까. 난 왜 이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웃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이야기 다 안 끝나셨나.”
“아이샤.”
“응?”
“믿음직한 사람 될게. 그러니까 나 믿어야 해. 네가 믿을 만한 사람 될게.”
“지금도 믿음직스러워. 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 하지 못한 건, 그냥 내 생각이 많아서 그래. 이제 다 이야기한 거 같아.”
“정말로? 그래 놓고 이런 것도 숨기고 있었잖아.”
“정말로!”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한다 해서 믿을 로헨은 아니었다. 로헨은 여전히 못 믿는다는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으음.”
“정말로.”
그때 꽤 멀리서 대공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우리가 서 있는 걸 보자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품에 있는 라리가 깰까 봐 걱정이 된 건지 걸음걸이가 되게 어색하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에요. 꽃다발 만드느라 대공 전하를 잠시 잊을 정도였어요.”
“흐흠. 그런가.”
“라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래. 그런데 곧 깰 거 같긴 해. 아까 살짝 목소리를 냈다.”
그 말에 로헨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다시 잠들었어. 그래 봐야 잠꼬대같이 낸 소리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 전과 다르게 변화가 있었으니 기대할 만해.”
“다행이다.”
나는 라리를 빤히 바라봤다. 대신녀님이 힘을 쓰면 바로 일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잠들었나 보다. 그래서 마음이 좋지 않다. 내가 너무 억지로 자게 둔 거 같아서. 방법이 있는데 쓰지 않은 거 같아서.
그걸 알 리 없는 로헨은 라리와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신이 난 것처럼.
“정말 라리가 깨어나는구나.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아.”
“응. 그럼 얼른 집으로 가자. 길에서 일어나게 하는 건 별로잖아. 그렇죠. 대공 전하.”
“그렇지.”
“두 사람 말 들어 보니 그러네. 아빠. 어서 가자.”
오늘따라 잔뜩 들뜬 로헨을 재촉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로헨은 아빠라는 말을 하며 그를 재촉했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대공은 로헨을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래. 가, 가야지.”
그러고선 어색하게 뚜벅거리며 앞서 갔다.
로헨은 그 뒤를 따랐고, 나는 꽃을 든 채 두 사람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그렇게 우리는 마차에 당도했고, 로헨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멜로디아 신녀님은 뭐라 하세요?”
마차는 우리가 착석하자마자 바로 출발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재촉했다. 지금이야 로헨도 있으니까 물을 자격이 되겠지만, 지금 이 시간을 벗어나면 난 그가 멜로디아 신녀와 한 이야기를 물어볼 자격이 조금 애매해진다.
그래서 물은 말이었는데 대공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음 이 시간에.”
“네?”
“마치 다음에 나를 또 보려는 것처럼 명확치 않은 정보만 알려 주더군.”
“뭐라 하는데요?”
“비슷한 사람을 찾긴 했으나,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확실치 않다. 그래서 어디서 발견한 건지 알려 달라 했더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거는 아닌 거 같다며 좀 기다리라 하더군.”
묘하다. 정말 알고 그러는 건가.
“그래서 비슷한 사람을 보고 연락을 하는 거라면 하지 말라 했지. 그랬더니…… 그녀의 특징을 하나 알려 주더군. 아이들의 모친의 팔뚝에는 깊은 화상 자국이 있다. 그래서 항상 긴소매 옷만 입었는데 그걸 언급하더군.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저렇게 이야기하니 내가 생각해도 맞는거 같은데, 시기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원래 시기는 대공이 쌍둥이들의 모친을 조사하고 조사하다가, 대공비 쪽까지 파고든 뒤에야…… 모친은 신전으로 도망을 치게 되는 걸 텐데.’
지금은 그렇게까지 조사하는 상황도 아닌지라, 모친이 신전으로 흘러들었을 리는 없는데.
신전으로 모친이 도망쳤다면 멜로디아 신녀가 알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최근에 쌍둥이들의 엄마를 찾기 시작하셨어요?”
“찾은 건 아주 오래전부터였지. 아이들이 살아 있음을 알았을때부터.”
소설 속에서도 대공은 쌍둥이들이 등장한 순간부터 쌍둥이들의 모친을 찾는다. 그 점은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소설 속과 달라질 게 있나.’
나라는 존재의 등장?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바뀔 리는 없을 거 같다.
“어찌 되었든 다음번에 또 정보가 있으면 알려 준다 했으니 기다려 봐야지.”
순간 가정 하나가 포르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