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 빛이 너무나 따뜻해서, 그 힘이 너무나 성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입이 다물어졌다. 지난번에 했던 축복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주변이 찬란해지는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을 정도의 빛이었으니까.
어둠속에서 흩뿌려지는 빛처럼 분사해나갔던 빛은 이내 하나로 모여들어서는 사그라들었다.
“이제 되었네요.”
대신녀님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렸음에도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녀님의 휠체어를 끌어 주는 신녀와 조금 거리를 두고 이곳을 지키는 기사들은 신의 강림이라도 본 듯 황망한 얼굴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나와 대공, 로헨은 그저 아무말 없이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지금 당장 눈을 뜨거나 하진 않을거랍니다.”
“아……!”
그 말이 들린 뒤에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곧 일어나는거죠?”
“맞아요. 아이샤. 대신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잤기 때문에, 조금은 정신없어할 수 있어요. 그때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대해 주세요. 영원한 꿈을 깨고 일어난 거니까.”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다.
영원한 꿈. 라리를 저렇게 만든 씨앗, 아니 꽃의 이름이다.
그리고 대신녀님은 걱정하고 있었다. 그 마취제인지 수면제인지에 취해 행복한 꿈을 꾸는 사람들. 대부분 목숨을 잃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가 행복하지 못해서 무너진다고 했다.
라리도 그렇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소리였다.
“네! 라리가 일어나면.. 예전보다 더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래요.”
난 살짝 대공을 바라봤다. 리렌에게 맡겼던 씨앗에 대한 성분조사는 이미 다 끝났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 렉스에게 맡긴 씨앗에 대한 조사도 끝났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대공은 그 꽃의 애칭인 ‘영원한 꿈’을 들었을 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렉스가 대공에게는 아무말 하지 않은 것처럼 너무나 조용하다.
‘렉스는…… 조사를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조사를 하고 있는데 밝히지 못한 걸까. 또 그게 아니라면…… 렉스는 대공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나는 쉬어야 겠네요. 이 힘은 참 오랜만에 쓴거라 피곤하네요.”
“감사합니다. 대신녀님. 이일에 대해서는 제가 꼭 보답을…….”
“나에게 보답할 필요는 없어요. 친구를 구해 달라 애절히 부탁한 건 아이샤였으니. 보답은 아이샤에게 하면 돼요. 나는 이미 아이샤에게 보답을 받았으니까.”
“어떤 보답을 받은 겁니까?”
대공은 의아함에 대신녀님을 바라봤다. 그제야 나도 정신이 들었다.
세상에는 무조건적인 선의는 없다. 대신녀님이 내 편이 되어준 건, 리렌을 보내주고 내 편에 서주고, 라리를 구해준 건, 내가 다음 대신녀 후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신전에 들어와 대신녀님을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실 수 있게 해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들만의 비밀이랍니다.”
대신녀님은 날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나도 그걸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미 예상한 일이다. 오히려 대신녀님이 하염없이 나를 기다려주고 계신다. 그리고 이렇게 외부적으로 이 말을 한 건, 잊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카시미르.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에는 뜻이 있죠. 카시미르가 아이들을 찾은것도,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아이샤가 온것도. 또 아이샤를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것도. 그 모든 것들이 다 뜻이 있답니다.”
“네. 아무것도 묻지 말란 말씀이시죠.”
“맞아요. 카시미르는 어릴적부터 천방지축이긴 했지만 말은 참 잘알아듣곤 했어요.”
“대신녀님!”
“어찌나 그 모습이 귀엽던지…….”
씩 웃은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음에 또 보기로해요. 대공녀가 눈을 뜨게되면 그때 와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대신녀님은 그곳에서 천천히 멀어져갔다.
“우리도 돌아가도록 하지.”
하지만 로헨은 뒤돌아가는 대공의 옷자락을 잡았다.
“라리……된 거야? 확인해야 하는 거 아냐?”
“우선은 지켜봐야 하겠지만, 대신녀님의 말은 믿어도 된다. 그분이 허튼 말을 하실 분은 아니니까.”
“정말…… 정말 괜찮은거지? 라리 이제 안아픈거지……?”
라리가 정말 로헨에게 있어 아픈손가락이라는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로헨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만져 보거라.”
“응?”
“확실히 좋아진 거 같으니까. 그게 바로 느껴지니까.”
그 말에 로헨은 바닥으로 축 쳐져 있는 라리의 손을 잡았다.
“따뜻해. 정말…… 따뜻해.”
“그래. 그러니까 걱정하지않아도 된다. 만약에 라리가 일어나지 못하면 아빠가…… 음…… 흠…… 그러니까 내가 대신녀님께 다시 말할 테니까.”
“응……!”
그제야 로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아빠라고 지칭하는게 조금 부끄러웠던 대공의 볼은 붉어져 있었고, 로헨의 얼굴도 다른 의미로 붉어져 있었다.
둘을 지켜보던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대신녀와 함께 있던 곳에서 벗어나 마차로 돌아가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듯 멜로디아 신녀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대공 전하를 뵈옵니다.”
“아. 멜로디아 신녀.”
“안녕하세요. 멜로디아 신녀님.”
“오랜만이구나. 아이샤. 그리고 로헨 대공자님.”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로 웃어주던 멜로디아 신녀는 차례로 인사를 하고선 대공을 바라봤다.
“제가 보낸 연락 받으셨는지요? 대공 전하.”
“그래. 봤다. 멜로디아 신녀. 나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아이들은 잠시 두고 둘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왜 그래야하지?”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저희들끼리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차분히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난 로헨의 손을 잡았다. 정말 쌍둥이들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면, 혹여나 그녀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라면 우리가 지금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히 로헨 앞에서는.
“저희는 걱정 마세요. 로헨 우리 저 앞에 정원에 가서 놀자.”
“아. 그래 뭐. 아이샤가 함께라면…… 그런데 라리는?”
“일어나지 못한 아이니 데려가도 상관없겠지. 멜로디아 신녀?”
“아…… 네.”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듯 멜로디아 신녀는 우물거리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아이샤. 로헨. 금방 올 테니 놀고 있거라.”
“네!”
나는 로헨의 손을 잡고 어느때보다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신전안은 전체적으로 담도 낮고, 나무들도 다 낮은 나무였기에 주변 풍경이 훤히 보였다.
난 대공과 멜로디아 신녀의 이야기가 방해되지 않는 거리의 꽃밭에 주저앉았다.
“이리와봐. 로헨 예쁜꽃이 많아.”
“난 꽃이 별론데.”
“그래도. 예쁜 꽃을 따다가 라리가 일어나면 선물로 주자.”
“어 그건 좋아.”
그제야 로헨은 자리에 주저앉아 이런저런 꽃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그런데 난 저 여자가 싫어.”
“응? 멜로디아 신녀님?”
“어. 처음봤을 때부터…… 그냥 본능적으로 싫었어. 그 대공비라는 여자보다 더더욱.”
“그래?”
참 이상했다. 지난번부터 로헨이 멜로디아 신녀를 이상하리만큼 싫어한다는 게 느껴졌다. 마치 본능적으로. 짐승의 감각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로헨과 라리는 감각에 예민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될 이야기인가.’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또 그러는 거 보면.
“뭐…… 아이샤가 좋다고 하면…… 그래도 참아 보겠지만, 정말…… 그냥…… 싫어.”
“알겠어. 따로 만나는 일은 없도록 할게.”
“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던 로헨은 한참 꽃을 따서는 그것들을 내게 안겨 주고선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렸다.
“그런데.”
“응?”
“대신녀가…… 너에게 받았다는 보답은 뭐야. 아이샤?”
“아.”
“물어봐도 대답, 안해주겠지?”
로헨은 자신이 묻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선 나뭇가지로 흙바닥만 열심히 파기 시작했다. 난 그런 로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헨.”
“숨겨도 돼. 아이샤가 숨겨야하는 거라면 묻지 않겠어. 그래도 내가 묻는 건, 걱정이 되어서야. 혹시 우리 때문에…… 무언가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는 걸까봐. 혹시나 너가 불합리한 일을 겪게 되는 걸까 봐…….”
“로헨.”
“응?”
“알고 보니까 나 대단한 사람이래.”
나는 로헨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대신녀님이 하는 거 봤지? 번쩍번쩍 하는 거.”
로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고민했었다.
진실을 말하는 게 맞을까. 혹여나 내가 말한 진실 때문에 로헨이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더 나이가 먹은 후에 내가 이해가 될 때쯤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괜히 벌써 이야기해서, 아직 온전치 않은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했다.
하지만 그냥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응…… 그게 왜?”
“나 그거 할 수 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