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내 말에 호응해 주는 대신녀님을 보며 난 눈만 깜빡였다.
‘굳이 인형 안에 씨앗을 넣은 건…… 찾기 어렵게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안에 있어야만 가능했던 거야. 그래야만 싹이 트고…… 성장이 더딜 테니까.’
아이가 안고 있어서 항상 따뜻했던 물건.
솜으로 가득 차 있고, 두터운 천이 겉을 두르고 있어 한번 수분이 들어가면 밖으로 잘 빠져나오지 않는 구조.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도 필요하지만 빛도 필요하다. 그걸로 합성을 하여 결국은 자라게 되니까. 하지만 인형 안은 더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싹이 트면…… 문제가 되는 게 뭐예요? 혹시 싹에서 더 이상 성장하면 안 되는 건가요?”
“맞아요. 오히려 꽃이 된 이후에는 문제가 없죠.”
“하지만 싹이 오래되면…… 썩지 않나요?”
“아뇨. 썩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이 식물을 유지시킬 때에는 일부러 더 자라지 않게 어둠 속에서 기른다는 말이 있어요.”
그렇구나. 그래서 인형 속에 넣은 거구나. 참 완벽한 상황이었겠네.
“그건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씨앗이 된 이후부터 강한 마취 성분이 나와요. 잘 가공하면 수면제가 될 수 있지만, 날것은 마취 효과가 있어요. 아주 위험한 물건이죠. 보통의 경우라면…… 이미 목숨을 잃었어도 무방할 만한 성분이에요. 그리고 이건, 수입이 완전히 금지된 것이죠.”
“수입이 금지되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찾기 쉬울 수도 있다는 거죠.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해요. 이 씨앗의 경우 발아 조건이 쉬우면서도 어려워요. 그렇다는 건 아주 오래 전에 수입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아주 잠깐 희망이 보였었다. 수입해 오기 어려운 거라면 누가 수입했는지 정도는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특이한 습성 때문에 도리어 더 힘든 거구나.
“하지만 이 씨앗을 금지시킨 지가 10년이 넘어요.”
“아아. 그러면 셋 중에 하나겠네요. 10년이 넘은 씨앗이거나, 수입이 어려운데도 수입해 왔다든가, 혹은…… 수입해 온 씨앗으로 계속 꽃을 피워 냈고 그걸로 다시 씨앗을 만드는 걸로 혼자 수급하고 있었다든가. 그중 하나일 거 같네요.”
“아이샤는 확실히 똑똑하네요.”
대신녀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 아무것도 밝힐 수 없다는 게…… 답답하네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결국 길은 하나로 이어졌을 테니. 어렵게 생각하고 절망할수록, 원하는 결말에 도달하지 못할 거예요. 나도 그랬어요. 아이샤. 너무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에 도취되어서는 내가 잘하고 있다 착각을 했죠. 그게 나의 패배의 원인이었죠.”
“네…….”
“그러니 조금은 내려놓고 가볍게 생각해요. 그럴 때일수록 좋은 생각이 날 수 있으니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다 대신녀님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대답도 함께했다.
“네!”
“참 귀여운 아이예요. 아이샤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진짜인걸요. 어찌 되었든 아이샤. 이 꽃에 대한 정보 자체를 찾기 힘들 거예요. 꽃의 이름은 루즈엘라. 꽃말은 영원한 꿈이죠. 마취제 성분은 고통 없이 잠에 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성분이에요. 아주 과거에는 이걸로 죽음을 원하는 자에게 고통 없는 죽음을 안겨 줬다 해요. 낫지 못하는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던 이들이 애용했다고는 하나…… 결국 악용되었죠.”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고통 없이 잠에 들어 깨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너무나 슬프게 들었다. 억지로 죽음을 선사하는 거 같아서.
“그래도 취해 있는 동안에는 행복한 꿈을 꾼다 해요. 하지만…… 보통은 깨어난 이후의 삶이 행복하지 못하기에…… 사람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걸 라리는 계속해서 당하고 있었던 거네요.”
“네.”
그래서 우리가 잘 때에는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않았던 걸까. 대공비는 이걸 통해 라리뿐만 아니라 라리와 함께 자는 로헨과 내게도 효과가 있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헨은 라리보다 더 강하기에 졸린 정도로 끝났고, 나는 내 몸이 스스로 치유했기에 괜찮았던 거겠지.
‘그래서 대공비는 내가 아이들의 방에서 자는 것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그러고 나니 더 소름 끼친다.
“다른 것들은 아이샤가 조사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생김새라든지, 자라나는 환경이라든지. 그것에 취하면 나타나는 증상들이라든지.”
“네!”
이후의 정보들은 내가 혼자 조사해도 어렵지 않다는 뜻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녀님의 손을 꼭잡았다.
“항상 감사해요. 리렌도 보내 주시고…….”
“나는 아이샤가 나같이 불행하지 않았으면 해요. 계속 계속 행복했으면 해요.”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럼 다행이지만요. 그러면 이제 다른 이들을 들어오라 할까요?”
“네!”
대신녀님이 손을 들자,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신녀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도 갇혀 지내거나 그러시진 않으신가 봐요.”
“내가 혹여나 다른 이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갇혀 지낼까 봐 걱정한 거예요?”
“네. 보통…….”
나쁜 소설들 보면, 대신녀님을 가둬 두고 자신들의 뜻대로 하려는 사람들 많으니까. 그래서 한 말인데 그녀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우리의 신은 강력하니까요. 그렇기에 가끔 기적을 지상에 내려 주고, 그로 인해 꾸준히 신을 따르는 자들은 늘어나고 있어요. 그들의 믿음은 굳건하죠.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떤 불순분자가 생긴다 한들, 결국 그들은 진짜 신의 힘을 이길 수 없죠.”
그 말에 문득 소설 속 여주인공이 떠올랐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성녀 후보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소설 속 대신녀님은 성녀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며 거부한다. 대신녀님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낫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대신녀님이 아니라고 한 순간 그녀는 성녀 후보에서 탈락한다.
‘그때 그렇게 단호했던 게, 다른 이들이 신녀님의 말에 따른 게 모두 이것 때문인 거겠지?’
“물론 신을 믿는다 하고, 다른 생각으로 신전에 있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큰 힘을 쓰지 못한답니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나를 계속해서 걱정하는 건지 신녀님은 알아듣기 편한 말들로 나를 달랬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결국 소설 속 주인공인 여주인공을 위해, 황태자가 나섰지. 오히려 황태자는 이런 힘을 가진 이가 대신녀가 되지 않으면 누가 되냐며 난리를 쳤고, 결국 대신녀님의 힘을 빼앗았다 했어. 대신녀님을 사이비 취급 하면서.’
그때는 소설이 대신녀님에게 불리하게 흘러갔으니까, 소설 안에 들어와 보니 전혀 그게 아니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아.’
아직 만나지도 않은 여주가, 내 쌍둥이들을 자신의 불행 서사에 이용만 하고…… 대신녀님을 그렇게 만든 여주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이샤.”
“네, 네?”
“아이샤의 친구들이 온 거 같아요. 아이샤가 안내해 주겠어요?”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대공과 로헨이 보였다. 라리는 여전히 대공의 품에 안겨서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네!”
이제는 조금 대공자 같아진 건지, 로헨은 막 달려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거리를 두고선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뿐. 난 그들에게 다가갔다.
“대신녀님이 와도 된대요!”
그 말에 로헨이 대공의 품에 안겨 있는 라리를 바라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한참 동안이나. 대공이 라리를 안은 채 대신녀에게 다가가는 그 순간에도. 그리고 로헨이 입을 연 건 대신녀 앞에 섰을 때였다.
“동생…… 깨워 주실 수 있어요……?”
왜 이렇게 얌전한가 했더니, 이거였구나.
“응?”
“계속 잠만…… 자요. 대신녀님이라면…… 해주실 수 있을까 하고요…… 영원히 못 깨어날까 봐 무서워요. 나는 라리와 뛰어놀고 싶고…… 같이 이야기하고 그러고 싶은데…… 대신녀님은 하실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자주 뵈러 올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부탁드려요.”
이렇게 얌전히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로헨은 처음이다. 로헨은 무서웠나 보다. 나를 믿는다고 해놓고, 그래도 무서웠나 보다. 정말 제 동생을 영영 보지 못할까 봐.
난 로헨에게 다가가 로헨의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해. 아이샤.”
“미안할 거 아니야.”
“라리의 볼이 따뜻해지니까…… 깨어날 거 같은 느낌이 드니까…… 마음이 조급해져. 얼른 보고 싶어서.”
“응. 알아. 내가 더 미안해.”
내 말뜻이 뭔지 로헨은 알 것이다.
그래서 로헨은 더 고개를 바닥으로 툭 떨궜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했던 자신의 반쪽. 자신의 모든 것. 괜찮은 척했던 로헨에게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대공녀는 참 행복한 사람인 거 같네요. 이렇게 걱정해 주는 오빠와 언니도 있고. 아빠도 있고.”
싱긋 웃은 대신녀님은 대공을 바라봤다.
“대공님도 걱정하셨어요?”
“그래. 아주 지겨울 정도로 편지를 해 왔단다. 혹시나 제 딸을 깨워 주실 수 있냐고. 그러면 원하시는 모든 걸 해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 오셨단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도 로헨도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대신녀님! 그건…….”
“비밀로 해달라고 하지 않았으니,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카시미르.”
“정말…… 그런 건…….”
피식 웃은 대신녀님은 어느새 다가와 휠체어를 끌고 있는 신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휠체어를 밀어서는 라리를 안고 있는 대공에게 바짝 다가갔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죠. 그리고 그 때가 온 거 같네요. 이제 일어나야죠. 귀여운 아가씨.”
대신녀님은 라리의 손을 꼭 잡고 웃었다. 대신녀님 몸에서 흘러나온 따뜻하고 찬란한 빛은 잉크를 흡수하는 종이처럼 빠르게 라리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