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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76)화 (76/99)

-76화- 

대공이 불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벌인이라고 하면, 내가 마치 문제라도 있는 것같이 들리는데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대단하다고 칭찬이라도 해야 할 판이야. 내가 한 과거의 짓들을 하나하나 꼬집으며 맹렬히 비난하고, 나 같은 인간은 대공가를 제대로 꾸리지 못한다기에 그대에게 모든 걸 위임했는데…… 이건,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맡긴 것만도 못해.”

“하.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건가요?”

“글쎄.”

왜 갑자기 대공의 시선이 내게 닿았는지 도저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모략을 꾸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상쩍은 표정이었다.

“모욕이라기보단 비난이지. 순간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지 뭔가.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한번 맡겨 보는 거지. 그리고 여덟 살짜리 아이가 비보다 더 잘한다면, 그대는 여덟 살만도 못한 거고, 여덟 살짜리 아이가 비보다 못한다면 내가 한 비난은 사과하도록 하지.”

“하…… 지금…….”

사과한다고 했지만, 비교 대상이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이기에 그녀에게 이득 되는 건 단 하나도 없다. 무어가 되든 결국 어린애만도 못한 인간이거나, 어린애보단 조금 나은 정도의 인간이거나.

“내가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요! 나에게 이득 될 게 하나 없는데!”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통보한 것뿐. ”

“당신 정말…… 미쳤어요? 요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쌍둥이들을 데려온 것 자체만으로도 내게 미안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나는 다 이해해 주고 내 자식으로 생각하고 품었어요. 그런데 내 뒤통수를 이렇게 친다고요?”

“그대가 아이들을 자식으로 생각하고 품었다고?”

“네.”

대공비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도리어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 붉게 충혈된 눈으로 대공을 바라봤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내가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한다는 거예요?”

“부디 그 말을 잘 지켜 주면 좋겠네.”

명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대공을 보며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는 없을 거 같군. 참 쓸모없는 시간이라 느껴져서 말이지. 누구와 달리 나는 쓸데없는 시간을 싫어하거든.”

“당신.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한 거예요?”

“글쎄.”

“글쎄라니!”

“난 최대의 배려를 해줬는데, 여전히 소리 지르고 내 말을 부정하는 것 말고 그대가 할 줄 아는 건 없나 보군. 여전히 대공인 내 말을 무시하고.”

“무시가 아니라……! 우선 이럴 게 아니라 내 정원으로 가서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요.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요.”

딱히 대공비를 지능형 캐릭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리어 그녀보다 그녀의 부친이 더 지능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딸이 대공가에 시집가자마자 공개적으로 모든 연락을 끊었지만, 뒤로는 제 딸을 제 뜻대로 조종했다.

소설에서도 언제나 그녀가 구석에 몰리면, 항상 그가 수를 마련해 새로운 일을 마련하곤 했으니까. 상대하기 걸끄러운 건 그쪽이다. 아마도 대공비답지 않게, 대공가의 모든 의사권을 가져온 건 그녀가 아닌 그녀의 부친이 만들어 낸 모략들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대공의 말에 제대로 말려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가문 것들이 누굴 닮아 오만방자하게 구나 했더니 딱 그대를 닮았어.”

“지금 나를…….”

“남들이 보면 그대가 대공인 줄 알겠어. 대공비. 아무리 부부 사이라고는 하나, 그대가 내게 오라 가라 할 위치가 된다 생각하나?”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이제까지는 그대가 바라는 대로 했지만 의문이 들더군.”

“의문이라니.”

“항상 말이야. 그대는 나를 자신의 정원으로 불러야만 했지. 거기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든 거지.”

대공은 턱을 쓰다듬었다.

“거기에만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 남들이 보면 참 오해하겠어. 그곳에 가면 그대가 무슨 짓을 한 게 아닐까 하고. 매번 만나는 곳은 방도 아닌 정원이고, 차도 항상 정해져 있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드리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나요? 예전부터 당신은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못마땅해했죠. 지금처럼.”

“글쎄. 그때는 못마땅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참 못마땅하군. 나에게만 맨날 오라고 하고 그대는 오지 않길래 그대가 다리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지.”

꽈배기처럼 배배 꼬며 말하는 대공의 모습에 대공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지금……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무시한 거예요?”

“맞다.”

“……뭐라구요? 당신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왜, 또 그 소리 하려고?”

대공은 머리가 아픈 듯 고개를 저었다.

“하…… 지금…….”

“언제까지 피해자 행세를 할 것인가. 그대가 원하는 걸 다 해줬지. 내가 못한 게 뭐지? 대공가의 대부분을 다 맡기고 물러나기까지 했어. 그래서 가지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면서 이제 와 또 피해자 행세를 하는 건가? 우선 오늘은 외출해야 하니 그만하도록 해. 아이들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그는 대공비를 무시하고 나를 바라봤다.

“당신……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피해자 행세는 그만하도록 해. 어쨌든 모든 건 결정했다. 그대에게 맡겼던 일들은 여덟 살짜리에게 맡겨서, 대공비라는 자가 얼마나 한심스럽게 이곳을 운영했는지를 보여 줄 것이며, 오늘 외출은 그대가 막는다 해도 그대가 보낸 의원을 데리고 갈 것이다. 또한, 쌍둥이들의 방은 아이샤에게 모든 걸 위임했으니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신경도 쓰지 말도록. 쌍둥이들에 대한 것도 아이샤가 모두 알아서 할 것이다. 아이들이 이곳에 있는 한 말이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대공이 빠르게 이야기했다. 흡사 랩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거기에 그는 대공비가 찍소리도 못 하게 못을 박았다.

“그리고 하나 더, 한 마디라도 더 말을 붙이면 화날 거 같으니, 입을 다물도록.”

“…….”

“외출하기 전에 내가 모든 걸 다 뒤엎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대가 이렇게 해봤자 손해를 보는 건 그대의 아들인 론이다. 알겠는가.”

대공비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그를 노려봤다.

“알겠으면 이만 나가 보도록. 우리는 외출해야 해서 말이지. 주인이 없는 방에 손님이 계속 있는 건…… 예법에 크게 벗어나는 일일 테니까 말이지. 대공비는 부디 예법을 지킬 줄 아는 인간이길 바라네. 그럼 우린 가도록 하지.”

대공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자신은 준비가 끝났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침실로 향했다.

“로헨. 이제 나가도 될 거 같아.”

“응!”

로헨은 라리를 쓰다듬었다.

“라리야. 신전에 가자.”

한발 늦게 대공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색하게 로헨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아니…… 잘 잤나. 아니…… 좋은 아침. 흠…… 이것도 별로군.”

무언가 인사를 준비한 듯 대공은 로헨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했다. 평소 같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했을 로헨이 입을 삐죽거렸다.

“안녕. 이게 좋아.”

“응……?”

“잘 잤나는, 일어나자마자 바로 들어야 하는 소리 같고. 좋은 아침은 오후에는 못 쓸 거니까. 안녕이 좋다고.”

“아! 그래. 안녕. 로헨.”

로헨이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밖에서 대공비랑 한바탕 한 걸 들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기분이 좋은 건지 로헨이 어쩐 일로 대공을 받아 주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대공의 기분도 평소보다 더 좋아 보였다.

“응. 라리 데려갈 거지?”

“당연히.”

“어서 들어.”

대공은 성큼 다가가 라리를 안아 들었다. 빠르게 다가온 리렌이 라리의 몸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흠.”

그런데 라리를 안아 든 대공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왜 그래?”

“문제 있어요?”

“아니. 어쩐지 라리의 몸이 따뜻해진 거 같아서.”

“그렇지? 아이샤 말을 듣고 그대로 하고 나니까 정말 따뜻해졌어.”

“그렇구나.”

“곧 깨어날 거 같아.”

로헨은 잔뜩 들뜬 것처럼 방방 뛰었다. 라리에 대해서는 과거나 현재나 동생 바보인 건 똑같았다. 그게 또 좋았던 건지 대공은 로헨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이행하면서.

“깨어날 거 같구나.”

“어어. 그렇다니까. 정말 다행이야…… 못 일어날까 봐 걱정했는데.”

“걱정 많았니?”

“응. 많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라리와 항상 함께했으니까. 그래서…… 잘못 될까 봐 너무 두려웠어.”

평소라면 진작에 끝났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로헨은 자신의 말을 대공이 잘 들어 준다 생각한 건지 조잘조잘 아이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며 앞서 나갔고, 난 두 사람을 쫄래쫄래 따라나갔다.

‘조금씩…… 보통 사람들처럼 변화하는 건가.’

미래를 바꾸기 힘들다던 대신녀님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대공과 로헨의 관계는 조금씩 변화하는 게 보였다.

‘이건 소설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전개가 바뀔까 봐…… 대공비가 나타난 걸까.’

이제는 모든 게 의심스럽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려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기에, 조금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제야 두 사람 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건지 지독한 고요가 찾아왔다.

실컷 이야기하고 나서 부끄러움이 몰려온 건지, 조용해진 둘을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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