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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75)화 (75/99)

-75화- 

이런 내용은 미리 안내받지 못했다는 것처럼, 의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공을 바라봤다.

“문제 있나?”

“아…… 그…… 그러니까 진료가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 아주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아니. 그곳에서 진료를 보고 싶다.”

사실 이건 나의 고집이긴 했다. 어차피 신전에 간다 해도 의원이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어차피 대공비에게 매수된 의원일 테니까.

하지만 대공비에게 불안감을 주고 싶었다. 

“왜. 싫은가?”

“아, 아닙니다…….”

“그럼 준비하도록 하지. 나도 준비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도록.”

그 말과 함께 대공은 밖으로 나섰다. 이곳에서 진료를 보고 싶은지 의원은 대공이 나가자마자 리렌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대공이 오기 전까지 소파에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기다렸다.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날 때쯤.

“대공 전하께서 마무리할 일이 많으신가 봐요.”

“나는 괜찮아. 렉스.”

내가 퍽 걱정이 된 건지, 렉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공을 대변해 주었다. 어차피 오래 걸릴 거라는 생각은 했다. 우리가 외출하려면 병사들도 준비되어야 하고, 마차도 준비되어야 하고. 

“신전에는 미리 안 알려도 되나?”

“네. 새벽이든 밤이든 아무 때나 언제든지 오셔도 된다 하셨습니다. 대신녀님께서요. 그러니 말없이 가셔도 괜찮으세요.”

싱긋 웃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늦는 덕분에 대공가 내부에도 소식이 한참 전해졌겠네.’

결국 그 후로 30분이 더 지날 때까지 대공은 오지 않았다. 이제 슬슬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마저 들던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고 대공이 아닌 다른 방문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기 바빴던 대공비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하게 우리의 방을 찾아온 그녀는 조금의 주저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내려다봤다.

“아이샤.”

“대공비 마마. 오셨어요?”

대공이 오기 전까지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맑게 웃었다.

여기서도 일어나지 않으면 한 소리 들을까 싶어서 빠르게 한 행동인데, 그녀는 그 행동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 같았다.

나를 비난하러 온 듯 말을 하기 바빴다.

“……내가 오라고 해도 오지 않고, 거기에 의원을 불러 달라 하여 기껏 불러 주었더니 이게 무슨 짓이지?” 

잔뜩 성이 난 표정의 그녀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오라고 해도 가지 않은 이유는 시녀들에게 설명한걸요? 설마 전달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 것도 전달하지 않다니…… 너무하네요.”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공비를 바라봤다. 정말 해맑게, 정말 나는 나쁜 뜻 하나도 없었다는 것처럼. 오히려 그게 그녀를 더 화나게 만든 듯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소설 속 대공비는 언제나 잔잔한 물 같은 사람이었다. 대공과 마찰이 있을 때면 원래의 성격이 나오지만, 그 외에는 어떠한 일에도 쉽게 모습을 드러내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여유로웠던 거고, 그만큼 모든 게 대공비의 뜻대로 이루어졌단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변수 때문에 그녀는 원래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모든 게 제 뜻대로 되지 않을까 봐 조급해하고 짜증이 많은 모습이. 사람이 조급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이걸 위해 나는 부단히도 노력해 왔다. 

“말대답하는 거니?”

“말대답이라니요. 전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겪은 일을 말하는 것뿐이에요. 믿어 주세요.”

“하…… 정말……!”

“그런데 대공비 마마. 갑자기 이렇게 오신 건 의원 때문이에요? 제가 대공비 마마의 부름에 오지 않은 것 때문에 화가 나신 거라면 그때 오셨을 텐데…… 지금 오신 거 보면 의원 때문인 것 같아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애로운 대공비의 얼굴이 일그러지니 꽤나 볼만하다.

“혹시 의원을 신전으로 데려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뭐?”

“진료는 어디서 보든 상관없을 거라 생각해서 함께 가자 한 건데, 대공비 마마께서 이렇게 달려오신 거 보면…… 꼭 이곳에서 봐야 하는 이유가 있나 해서요.”

“그런 거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나셨어요? 언제나 다정하셨잖아요?”

원래의 성격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녀는 나를 가만히 노려봤다.

“……내가 언제나 다정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니? 거기에 너는 내 말을 잘 듣기로 해놓고 듣지도 않는데, 내가 왜?”

“그러게요. 왜일까요.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요. 대공비 마마. 저는 말을 잘 듣기로 한 적이 없는걸요…… 제가 한 말을 오해라도 하신 걸까요?”

“뭐? 분명 지난번에……!”

황당하다는 듯 입술을 바르르 떨던 그녀는 뒤늦게 나와 한 말이 떠오른 듯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이래서 출신이 비천한 것들은 들이면 안 되는 건데……! 사사건건 말대답이나 하고.”

“죄송해요. 저는 그냥 말한 것뿐인데 말대답이라고 느끼셨다면 조심하도록 할게요!”

누가 봐도 험해지는 분위기에 렉스가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난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그녀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대공비는 다시금 분노를 표출했다. 나 때문에 화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닌 사람처럼.

“그래, 그냥 너는 대답을 안 하는 게 좋겠구나. 알았니?”

“네!”

“또. 방을 네 맘대로 바꿨더구나.”

“네!”

“네라니? 내가 분명 말대답하지 말라 했을 텐데.”

“이건 그냥 대답한 건데요?”

정말 어지간히 궁지로 몰렸나 보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이렇게 꼬투리를 잡고 싶은 거 보면. 그래서 나는 해맑게 웃었다.

“혹시……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당연한 소릴!”

무언가 제 맘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대공비는 꽤나 당황한 듯했다. 그러니 방에 인형들이 사라진 것까지 언급하지.

나라면 이렇게 화 안 낼 텐데. 어차피 이제 와서 인형들을 다시 들여놓을 수도 없는 거고, 내가 그걸 다 뺐다는 건 뭔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텐데.

‘하긴. 내 머릿속은 아이가 아니니까 이런 생각들을 하는 거고, 대공비는 좀 다르지.’

단 한 번도 제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없는 사람. 그러니 이런 상황들이 너무나 싫은 사람. 그래서 이게 얼마나 자신에게 나쁜 상황인지 모르고 말을 막 하는 거겠지.

“왜 안 돼요?”

“그건 내가 해준 거니까. 내가 라리를 위해 특별하게 준비한 곳이니까. 당연히 안 되는 거지!”

“아아, 그렇구나.”

난 큰 깨달음을 얻은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은 뭐지?”

“대공비 마마께서 준비해 주신 방이라는 거죠?”

“그래.”

“그래서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구요.”

“왜 자꾸 그렇게 묻는 거지?”

이제야 이상한 걸 느낀 건지 그녀가 표정을 굳혔다

“라리가 일어나지 못하는 게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닌가 해서요. 그래서 다 치웠거든요.”

숨길 생각은 없었던지라 보란 듯이 입을 열었는데, 그녀의 안색이 조금은 질려 버렸다.

“그 방 안에 있던 게 문제였다는 것이냐?”

“네! 그런데 그 방을 준비해 주신 게 대공비 마마시면…… 대공비 마마를 의심하면 되는 거예요?”

그때였다.

누군가 슬쩍 안으로 들어왔다. 난리를 치던 대공비는 그걸 알지 못했고, 그녀에게 이야기하려던 대공비의 시녀들은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 의해 제지당했다.

“네가 정말……!”

“아이샤가 이상하다 느낄 정도로 방에 집착하는 거 같군. 대공비.”

“아……!”

뒤늦게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당신…….”

“원래 그런 사소한 것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대공비가, 아이의 방을 정리했다고 이리 난리를 칠 줄이야. 정말 의심스러워.”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대공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의심이라니…… 그냥…… 한 이야기일 뿐인걸요. 대공비인 내가 한 일을 망쳤으니까.”

“한 일이라고 하니까 더 의심스럽다는 거야. 그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라면 조금 망가졌다 해도 이렇게까지 화날 일은 아닐 거 같은데? 정말 뭐가 있나?”

“그런 거 없어요!”

그녀는 혹여나 의심을 살까 두려웠던 건지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그보다 대공비. 왜 그대가 이곳에 있지?”

대공의 등장 이후 나름대로 차분해지려고 했던 대공비는 애써 표정을 굳혔다.

“아. 그냥 아이와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만. 누가 봐도 화난 모습으로 왔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화 안 났는데요?”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그런 어른이 아니라면, 참 다행이겠지만.”

사랑하는 감정은 조금도 없는 부부 사이 같았다.

이제 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듯 대공비는 대공을 바라봤다.

“겸사겸사 잘되었네요.”

“무엇이 말이지?”

“당신에게 할 말 있어요.”

“할 말? 아, 나는 외출해야 해서 말이지.”

하지만 그 말을 대공은 보기 좋게 무시했다. 

“또 피하는 거예요? 도대체 당신 왜 요새 나를 슬슬 피하는 거예요?”

“피했나. 잘 모르겠는데?”

꽤 심각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난 없는 사람인 척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하……? 내가 몇 번이나 연락을 보냈잖아요.”

“할 말이 있으면 오면 될 일을, 한집에 사는데 뭘 그리 연락을 하나. 그대가 그동안 벌인 일 때문에 가뜩이나 할 일이 넘쳐나는 사람에게.”

“내가 벌인 일?”

“그래. 그대에게 모두 위임했던 일들. 모두 다 엉망이더군? 그걸 처리하느라 너무 바빠서 만날 틈이 없었어.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지금처럼 오면 될걸. 왜 맨날 자신에게 오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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