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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74)화 (74/99)

-74화- 

내가 라리를 가만히 보고 있자, 로헨이 입을 열었다.

“응. 라리랑 함께 있으면 나도 잠이 늘어난 거 같았어. 네가 없을 때마다 자꾸 잠에 들었으니까.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는데, 오늘 인형 버리고 라리 옆에 앉아 있는데 안 졸린 거 같았어. 물론 그냥 내가 잠이 많은 걸 수도 있지만.”

“으음…….”

그럼 인형에 들어 있던 건 수면 성분이 있는 무언가이려나.

“별 도움 안 되지?”

“아니야. 도움이 되었어.”

도움이 되었다는 말에 로헨은 아이처럼 신이 나서는 입을 열었다.

“그동안은 딱히 잠이 많아졌다고 생각 안 했는데, 인형 다 치우고 나서 라리 옆에 앉아 있는데 확실히 느껴졌어.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그 인형을 치웠을 때에도…….”

“라리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이었지, 그거.”

“응.”

인형. 솜. 씨앗. 새싹. 그런 생각들을 하던 나는 라리가 베고 있는 베개를 살폈다.

혹시나 이 안에도 그런 것들이 있으려나?

내 행동을 보며 로헨도 단번에 알아차린 건지 이불까지 살폈다. 하지만 그걸 열어 보고 솜을 봤지만, 그것들은 별다른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인형에만 그런 거네.”

“응.”

인형에는 가능하나 이불과 베개에는 하지 않았다. 왜일까.

‘인형은 자주 빨지 않지만 이불과 베개는 자주 바꿔서인가. 거기에까지 넣기에는 씨앗이 귀한 거라든가…… 구하기 어려운 거라든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나는 라리 옆에 드러누웠다.

“우선…… 렉스랑 리렌이 정보를 가져오면 그때 보자.”

“응.”

로헨도 어느새 내 옆에 누웠다.

“아이샤.”

“응?”

“이러고 있으니까 보육원 때 생각난다. 내가 라리인 줄 알고 아이샤가 꼭 껴안고 자고 그랬는데.”

“……아.”

순간 부끄러워졌다.

“아니, 그때 말을 했어야지.”

“아이샤가 원하는 건 나를 보내는 것이었으니까. 말하면 보내 버릴 거 같았어.”

“그래도…….”

“나는 그때가 조금 그립긴 해.”

“왜? 여기서 생활하는 거 별로야?”

어쩐 일로 로헨은 찬찬히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별로라는 것보단…… 그냥. 그때의 너는 조금 편안해 보였거든.”

“아.”

“물론 끔찍하긴 했지만. 그 보육원장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깰 정도야.”

로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만하지.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풀었으니까. 아이들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그래도 된다 해서, 보육원장은 맘껏 애들을 괴롭혔다. 조금의 미안한 마음도 가지지 않고선.

“시간이 지나면, 나도 나아지겠지만…… 어찌 되었든…… 마음이 오락가락해. 그곳에서가 좋았구나 싶다가도, 네 생각 하면 이곳에 있는 게 좋구나 이런 생각 하게 돼. 자꾸.”

“여기 있는 게 맞아. 그러니까 날 믿어.”

“……그런 말…….”

“응?”

“해준 사람이 없었어. 믿으라는 말. 결국 믿음에는 책임이 따르잖아. 우리를 책임져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그런데 너는…… 아이샤는 달라.”

로헨이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못 본 사이 로헨의 키가 갑자기 쑥 커버린 느낌이다. 난 키도 몸도 그대로인데, 로헨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

“그래도 여기 있으면…… 아이샤. 네가 살아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그래서 아이샤.”

“응?”

“나는 뭘 하면 좋을까.”

“그냥…… 너답게 자라면 돼.”

“그거 말고. 아이샤는 내가 뭘 했으면 좋겠어? 그냥 여기에만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결국 대공이 되든지, 아니면 때 맞춰 이곳에서 나가든지 해야 하는 거잖아. 뭘 할까. 뭘 하는 게 도움이 될까.”

“대공이 되어 줘.”

그 말에는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그래?”

“응”

대공비는 결국 쫓겨나든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론은 남아 있게 될 거다. 씨앗이 남은 상태에서, 그 씨앗이 대공의 자리까지 탐내게 만들면 또 이런 일이 생길 거다.

‘어찌 되었든 대공은 쌍둥이들에게 대공 자리를 줄 테지만…….’

어설픈 자리는 원치 않는다. 어설프게 억지로 올라가는 건 원치 않는다.

“당장은 아니지만 많이 공부하고, 많이 노력해서 대공 자리에 올라갔으면 해. 물론 라리가 일어난 후의 이야기지만.”

“그렇게 되면…… 누나.”

“어……?”

어지간해선 로헨이 내게 누나라고 하는 일은 없던지라 순간 놀라고 말았다.

“내가 누나를 지켜 줄 수 있게 되는 거야? 지금처럼 지켜지는 사람 말고?”

“그렇지?”

“똑똑해지고 강해지면…… 되는구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와 달리 로헨의 눈동자가 조금은 달라 보였다.

“그럴게. 내가 다 지킬 수 있도록 강해질게.”

“응. 예쁘다.”

난 로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 행동이 좋았던 건지 로헨이 눈을 감았다.

순간 여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보육원에 있을 때 우리가 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먼 훗날, 너와 라리가 보통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떠나야겠지.’

과거에 이미 너희를 배신한 사람이고, 이미 신전에 의탁하기로 이야기가 끝났으니까. 나는…… 떠나야겠지.

그래도 그 전까지는 행복했으면 좋겠다.

예전처럼…… 내가 너희를 지켜 주겠다던 그 어린아이 같은 마음 하나로 노력하던 그때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

다음 날.

대공은 이른 아침부터 우릴 찾아왔다. 전날에 오지 못한 것 때문인지, 그는 일부러 볼 것들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로헨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 거실로 나왔던 나는 줄지어 들어오는 서류들의 향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방으로 다 가져오셔도 괜찮으신 거예요? 저희 때문이면…….”

“상관없다. 큰 일들은 다 끝냈고 자잘한 일들만 남았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이 많은 건지 그는 바쁘게 서류들을 넘겼다.

“그보다 앉거라.”

“네?”

“나와 하루에 한 번씩 이야기하기로 했으니까.”

“아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해요?”

“음…… 뭐가 좋을까. 로헨과 라리는…… 처음 봤을 때 어떤 모습이었지?”

아이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궁금한 것처럼,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게 궁금한 거예요?”

“많은 것들이 궁금한데……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모르겠군. 네가 아는 것들을 말해 다오.”

“짐승 같았어요.”

“처음 모습이?”

“네. 슬프시겠지만, 생각만으로도 마음 아프시겠지만…… 제가 처음 본 아이들은 그랬어요. 길이를 알 수 없게 긴 머리칼, 제 손을 찌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긴 손톱. 꼬질꼬질한 얼굴에 허름한 옷.”

“…….”

“그리고…… 맞은 자국까지.”

진실을 마주했을 때,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안타깝군…….”

“그래서예요. 날 서 있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 건 그리 살아왔으니까. 그러니 급하게 다가가려 하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세요. 좋은 거, 비싼 것보단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물을 주세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물은 어떤 거지?”

“문득 있다 보면, 이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들 있잖아요. 아이가 배가 고파 보이면 탈 나지 않게 적당한 음식을 줘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해요. 비싸고 과한 거 먹이면 탈 날 뿐이에요. 쌍둥이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자신의 옆에서 나불나불 이야기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거군. 한번 더 생각하라는 거군.”

“오히려 반대예요. 그냥 더 편하게 생각하셔도 돼요. 아이들이 가지고 싶은 건 좋고, 비싸고 귀한 게 아니예요.”

“나보다…… 네가 나은 것 같구나. 네 덕분에 나도…… 너와 쌍둥이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어.”

듣던 중 참 반가운 소리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내게 날 서 있었던 그의 모습이 훨씬 나아졌다.

오히려 다정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쌍둥이들이 이렇게까지 소중한 걸까.’

신기하기만 하다.

이야기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작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를 준비해 준다고 일어나자마자 나갔던 리렌인가 싶어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네.”

역시나 들어온 건 리렌이었다. 하지만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대공비 마마께서 보내신 의원이 마침 도착해서요. 들어오라 할까요?”

때맞춰 왔구나. 난 소파에서 일어났다.

“대공 전하.”

“응?”

“이제 신전으로 가요.”

“갑자기?”

“네. 지금 바로요.”

“하지만 의원이 왔다고 하는데?”

“신전에서 진료받아도 괜찮지 않아요?”

그 말에 대공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보증받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렇게 많은 의원이 별일 아니라고 했음에도?”

“네.”

단번에 내 말을 알아들은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면 믿을 수 있겠느냐. 어떤 결과가 나오든?”

“네. 설마 대신녀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죠.”

“그래. 네가 원하면 가자꾸나. 리렌. 의원에게 들어오라 하도록.”

그 말에 리렌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행색이 조금 남루해 보이는 의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어쩐지 눈치를 잔뜩 보는 남자. 대공이 여기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듯 그의 몸은 아까보다 더 떨렸다.

“저, 저는 의원 메르켄입니다.”

“그래. 온 김에 내 딸의 진료를 보도록.”

“네, 네…….”

“하지만 이곳에서 말고 신전으로 가도록 하지.”

“네? 시, 신전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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