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대…… 대공자님…….”
“왜. 나와 라리의 방인데, 내 뜻대로도 하면 안 되는 거야?”
“아뇨. 그것이 아니라…….”
“아니라면 물러나. 계속 말하는 거 지겨우니까. 말 걸지 마. 내 말을 무시할 거면 너네들이 대공자 하든가.”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 곱게 말이 나가지 않는 로헨이었다.
우선적으로 인간 자체를 혐오하는 로헨이었다. 자신이 당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인간 혐오 자체도 조금 나아져야 하는데. 좋은 꼴을 못 보네.’
그래도 대신녀님이나 렉스에 대해서는 경계심이 덜한 거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듯싶다.
‘대공에게도 경계를 가지지 않으니.’
아무래도 아이의 촉은 꽤나 예리한 듯싶다. 정확히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사람들에게는 경계를 조금이나마 풀고 있으니.
‘그런데 왜 멜로디아 신녀에 대해서는 그리도 예민하게 구는 거지.’
잘 모르겠다. 멜로디아 신녀는 우리에게 도움이 돼준 사람인데. 그냥 보육원 시절이 떠올라 그러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는 사이 시녀들이 물러섰다.
“그러면 모두 나가도록 하죠. 두 분의 말씀 잘 들었죠? 다른 이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겠노라고. 만에 하나 이에 따르지 않으면 대공 전하께 직접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렉스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굴며 그들을 내보냈다. 최후의 최후까지 밀려난 이들은 그렇게 방 밖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저들이 가져온 음식들은 믿을 만한 것일까. 우선은 잘 모르겠지만, 굶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리렌이 가져다줄 수 있어요?”
“네. 걱정 마세요.”
리렌은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공 전하께 다시 말해야 하는 건지…….”
“아니에요. 로헨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했으면 알아들었겠죠.”
나는 로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디 가서 기죽지 마. 너는 우리고 우리는 너야. 알았어?”
“응!”
“하여튼…… 나는 가끔 생각해.”
“뭐를?”
“……네가 이곳에 있는 게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우리는…… 이곳이 집이지만 너는 아니잖아. 그래도…… 너를 내보낼 생각은 없어. 그냥 그렇다고. 그러니까…… 그쪽 기사가 아이샤 잘 보살펴야 돼.”
로헨은 렉스를 향해 명령 아닌 명령을 해 보였다.
“네!”
난 로헨에게 다가가 로헨을 품에 꼭 껴안았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내가 이곳에 있는 게 힘들까 봐 걱정해 주는 모습이라니.
“고마워. 로헨.”
“뭐가 고마워.”
그게 싫어서 뿌리칠 만한데, 로헨은 가만히 멈춰서는 내 토닥거림을 받고 있었다.
꼭 지켜 줄게.
‘그래도 대공비의 민낯이 곧 드러날 거니까. 그렇게 되면 그 여자를 무너뜨릴 수 있어.’
의원이 아니면 방에도 못 들어오게 했으니, 곧 의원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어쩐지 곧 원하는 모든 걸 알아낼 것 같은 그런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그사이 리렌은 음식들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 시녀들이 가져온 음식들은 모두 대공비 마마의 궁에서 조달된 거라 하더군요. 그래서 그 음식들과는 조금 다른 음식들밖에 없더라고요.”
“대공비 마마의 궁에서 온 거라고?”
“네.”
어쩐지 퀄리티가 너무 좋더라. 쟁반 안에 있어도 화려했고,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했더니 다 그 이유였구나.
“그 음식들을 드시고 싶으신 거라면…….”
“아니야. 우리는 이걸로 충분해.”
나는 리렌이 가져온 음식들을 보며 로헨을 잡아끌었다. 굶었던 과거 때문에 음식에 대한 욕구가 심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로헨은 딱히 음식에 대한 욕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리렌이 가져온 음식을 별 감정 없이 먹었다.
나도 그 앞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잠시 상념에 젖었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이참에 다 해치워 버리죠.”
“무엇을요?”
물을 따라 주던 리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렉스. 방에 있는 인형들을 모두 치워 줄 수 있어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우리 옆에 서 있던 렉스가 화들짝 놀랐다.
“네? 하는 건 상관이 없습니다만…… 식사 후에는 도서관 가실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도서관 가기 전에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때, 리렌이 먼저 나섰다.
“그건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녀오실 때까지 싹 치워 놓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외출할 때에는 꼭 따라야 한다는 깊은 사명을 가진 것처럼 렉스는 난처해하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로 티 나게 해주세요.”
“네.”
“또 도서관 가?”
“응! 오늘은 좀 필요한 책이 있어서.”
두 사람 모두에게 씨앗 같은 그것에 대한 정체를 알아봐 달라 했다. 그리고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내 조사로 그리 쉽게 밝혀질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만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방 갔다 올게!”
“뭐…… 알았어.”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 식사를 모두 끝낸 후, 나는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저번에 빌려 온 책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은 식물들에 대해 적혀 있는 책들과 로헨이 읽을 만한 책들을 함께 집었다.
“저, 렉스.”
“네.”
“대공 전하께는 오늘 안 가도 괜찮아요? 나 책 보고 있을 테니까 물어봐 주실래요?”
“아……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여기 계시면 얼른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간 김에, 신전에 내일쯤 갈 수 있는지도 함께 물어봐 주세요.”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동화책들이 놓인 구역 한편에서 작은 책을 꺼냈다. 안에 내용이 없는 책. 도서관 이곳저곳에 구비되어 있는 펜으로 글자들을 적어 내려갔다.
기억이 점점 흐려진다.
신전에 와서 대신녀를 만나기 전에도 흐려졌던 기억들인데, 지금은 더더욱 심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일들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래서 난 도서관에 올 때마다 내 이야기를 적어 갔다. 다른 이들이 읽을 수 없는, 내가 살았던 한국의 글자로.
내가 기억하는 것들, 신전에서 겪은 일들, 꿈속의 이야기. 현실의 이야기들까지.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나의 이야기는 그곳에 적혀 아무도 모르는 도서관 구석의 책 속에 껴두었다.
혹시 몰라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쓴 글자들을 보여 줬지만, 그걸 알아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갈 때마다 다시 본다. 또렷이 새기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어떻게 하려는 건지.
“이러다가는…… 정말 아이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만 남고 다 잊어버리겠네.”
이것조차 신이 원하는 걸까.
그건 모르겠지만, 우선 목적이 없어지면 안 된다.
내가 왜 이다지도 아이들에게 목을 메는 건지, 왜 이렇게 맹목적이 된 건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그렇게 적어 내려간 책은 동화책 가운데 껴 넣었다.
그리고 식물에 대한 책은 이곳에서 읽기 위해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생각보다 잘 나오진 않네.”
씨앗. 특이한 씨앗. 아무리 보아도 식물의 씨앗은 거기서 거기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원하는 모양을 찾는 건 어려웠다.
‘하긴 이렇게 쉽게 찾아질 리가 없지.’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쉽게 쉽게 흘러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솔직히 어린아이가 책 몇 번 뒤적거린다고 밝혀질 존재였으면, 대공비가 그렇게 인형의 솜 속에 넣어서 넣어서 둘 리도 없었을 거다.
‘그런데 왜 솜 안에 넣은 걸까.’
굳이 인형에. 아이가 항상 안고 다니는 인형에. 꼭 그 솜 안에 넣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제일 근접해 있어서? 아니면…….
그때였다.
“저 왔습니다. 아이샤 님.”
그사이 렉스가 돌아왔다. 난 보던 책을 급히 닫아서 책장에 넣었다.
이건 방으로 들고 가지 않는 게 나을 거 같다. 렉스와 리렌이 정보를 찾아오기 전에 내가 그 씨앗의 존재를 알았다는 게 밝혀지는 건 좋지 않을 거 같고, 우리가 내일 신전에 가게 된다면 그들은 필시 방을 뒤질 게 뻔하니까.
그러면 내가 뭘 보는지도 다 볼 것이다.
그래서 빠르게 정리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렉스는 내 옆까지 다가왔다.
“네. 마침 나도 다 봤어요. 대공 전하는 혹시 뭐라 하셔요?”
“오늘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바쁜 일이 있다면 내일쯤 와도 괜찮다 하셨습니다. 또한 신전에 내일 가는 것도 괜찮다 하셨습니다.”
“네! 그러면 방으로 가죠.”
기다리고 있을 로헨을 만나기 위해. 나는 렉스와 함께 그렇게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곧장 라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잘 갔다 왔어?”
“응.”
“도서관에 뭐가 있길래 맨날 거기에 가.”
“책은 재미있으니까.”
“재밌기는.”
뭐가 재밌냐고 하면서 로헨은 내가 가져온 책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동안 배움이 없어서 그렇지, 로헨은 누구보다 배우는 걸 좋아하는 아이임은 틀림없다. 내가 가져온 책들을 빠짐없이 보고 있으니까.
“나중에 함께 가자. 라리가 일어나면.”
“어…… 곧 일어나겠지. 인형도 다 가져다 버렸으니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뭐가 휑하다 했더니, 정말 인형이 하나도 없었다.
“라리. 언니 갔다 왔어.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난 라리를 바라보다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주 미세하기는 하나 라리의 몸의 온도가 올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한 게 있었어.”
“이상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