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때, 밑도 끝도 없이 나온 말에 눈만 동그랗게 떴다.
“네?”
“아이들과 같이 자도 된다고 허락했다.”
“갑자기요? 하지만 제 출신 때문에…… 싫어하셨잖아요.”
“출신이 뭐가 중요한가 싶어. 대공가의 사용인들은 신분은 하나같이 좋은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한 짓을 보니…… 신분이 중요한가 싶긴 해. 물론, 아직 너에 대해 온전히 다 믿는 건 아니다.”
대공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알아요.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하다못해 평민 부모님의 밑에서 자랐더라면, 그것만이라도 어느 정도 보증이 되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가지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없다. 누군지도 모른다.
범죄자의 자식일 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니 가까이 있어도 상관없다 생각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자식들과 어울리게 하기에는 걱정이 많은 듯하다.
“욕심이라…….”
“저는 제 분수를 알아요. 넘어도 되는 선과 넘지 말아야 하는 선도 잘 알구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그냥 평소처럼 말한 것뿐인데, 대공과 렉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이 남자들 오늘 왜 이러지.
나름대로 내 분수를 잘 알아서 하는 말인데. 절대 선 넘지 않기. 쌍둥이들과 친구이나 언제나 그 밑에 있는 사람인 걸 알고 있기.
대공은 손을 내 쪽으로 내밀다가 다시금 그 손을 거둬 갔다.
“그래. 다행이구나. 시녀가 정해질 때까지 아이들 곁에서 자도록 해. 뭐, 네 덕분에…… 내 아들과 조금은 친해진 거 같으니.”
“네! 금방이겠네요.”
“내가 인정한 시녀가 정해질 때까지다.”
“네?”
시녀면 그냥 시녀지, 인정한 시녀는 무슨 소리람.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대공은 본인 할 말이 끝난 건지 문 쪽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그럼 당분간 불편하더라도 함께 지내도록 해. 지내다 불편한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고. 또…… 그런 무시하는 자가 있으면 말해도 된다. 내가 직접 나설 테니. 이제부턴 간과하고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로헨하고 이야기해서였을까. 대공은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다정했다. 사람 자체가 좀 나아진 거 같다.
‘이대로라면 쌍둥이들과도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
난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이샤.”
“네!”
“……아이들에 대해서는 네 말을 듣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런가요?”
“그래서 말인데. 하루에 한 번씩 날 찾아오도록.”
“네! 네?”
선대답 후 물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본인을 찾아오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람. 하지만 공작은 꽤 단호해 보였다.
“아이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네게 묻는 게 나은 것 같군. 언제나 오답인 거 같았는데, 이번엔 정답인 거 같아.”
“아.”
“내가 어른도 아닌 어린아이에게 이런 걸 부탁하는 것도 웃기지만, 하루에 한 번씩 와서 이야기해 다오.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떻게 하면 더 친해질 수 있는 건지.”
얼굴에 자연히 미소가 번졌다. 그는 정말 아이들하고 잘 지내고 싶은 거구나. 정말, 그런 마음인 거구나. 혹여나 아닐까 봐 걱정했는데 이로써 너무나 확실해졌다. 대공은 누구보다 아이들하고 잘 지내고 싶어한다는 게.
‘과거에는 대공비 때문에 아이들과 사이에서 많이 틀어진 거야. 이번에도…… 아마 그녀의 말을 듣고 행동했을 확률이 높겠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가도록 하지.”
“네. 매일 갈게요!”
그게 마지막이었다. 몇 시에 어디로 오라는 말도 없이 대공은 그렇게 나갔다. 퍽 당황하는 사람처럼.
나조차 조금 당황했던지라, 물어보는 걸 깜빡 잊어버렸다.
“정말 좋은 일이네요.”
렉스는 그 어느 때보다 기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응. 좋은 일인데…… 언제 어디로 오라는 말은 못 들었네요.”
“아아……!! 음. 아마도 아이샤 님이 편한 어느 시간이든 괜찮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러면 다행일 텐데.”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서 아이샤 님을 많이 신경 쓰고 계세요.”
“으응…… 어, 어쨌든! 이거 잘 부탁해요!”
나는 어색하게 렉스의 품에 안겨 있는 인형을 바라봤다. 그제야 자신이 인형을 들고 있단 걸 알아차린 듯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네!”
사실 그에게 전달하면서 몇 개의 씨앗을 이미 챙겼다. 만약에 그가 알아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정체를 알아낸다면, 이건 그와 대신녀의 진짜 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겠지.
내가 찾는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그거……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막 입에 넣거나 그러면 안 돼요!”
혹여나 착하디착한 그가 피해를 입을까 봐 당부의 말도 놓치지 않았다.
“아이샤 님.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그런 일이 있을 거 같으면 항상 저를 데려가셔야 합니다.”
참 좋은 사람. 소설 속에서도 명시된 사람.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 주변에 휘둘리긴 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누구보다 아이같이 깨끗했다.
“네.”
“그럼 저는 잠깐 나갔다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로헨에게로 다시금 돌아갔다. 뭐가 불만스러운지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던 로헨은 내가 들어오자 입을 빼죽 내밀었다.
“안 오는 줄 알았네. 잠깐 나간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안 와.”
“어. 아. 이야기가 조금 길어져서…… 너는 대공 전하와 이야기 잘한 거 같던데?”
“어…… 뭐 잘할 거까지 있나. 그냥 이야기 좀 했어.”
무언가 쑥스러워하던 로헨은 창문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저기 있던 건 어디 갔어. 또 그사이를 못 참고 만진 거지!”
“어. 그 믿을 만한 사람한테 맡기고 오느라고. 아. 렉스한테 맡겼어.”
“믿을 만한 사람이야?”
“응.”
“네가 믿을 만하다면 그런 거지. 그런데 그거 한다고 또 만지거나 그래서…… 아픈 건 아니지?”
걱정하는 로헨을 보며 손에 있던 걸 주머니에 슬쩍 넣었다.
“당연하지!”
“그래…….”
그 후로 나는 손을 깨끗이 씻고 와서 라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확실히 안색이 좋아진 거 같긴 해. 내 착각일까?”
“몸도 조금 따뜻해졌어. 그거 말하려구 얼마나 기다렸는데.”
로헨은 얼른 라리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로헨을 따라 나도 손을 대니 정말 볼이 따뜻하다.
“정말…… 벌써 변화가 있어……!”
“당장 깨어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이의 얼굴이 천천히 밝아졌다. 정말 기쁜 듯, 정말 행복한 듯. 그걸 보며 나도 함께 웃었다.
“다른 쪽에 의뢰할 인형을 더 찾아 놓으면 될 거 같아. 아마도 더 있겠지.”
그 말과 함께 로헨과 라리 근처에 있던 인형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보니까 좀 이상한 애들이 있어. 원래 인형 마감이랑 다르게 어설픈 애들. 걔네들이 따로 뭔가 넣은 애들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헨이 인형들을 몇 개 더 가지고 왔다. 정말 로헨의 말대로 인형들의 목은 어설프게 바느질되어 있는 게 보였다.
한두 개가 아닌 그것들을 모두 다 구별하고 있던 때였다.
똑똑.
“네?”
렉스인가.
벌써 돌아온 건가.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로헨과 문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곳을 통해 들어온 건 시녀였다.
“아이샤 님과 대공자, 대공녀님을 뵈옵니다.”
꽤나 깍듯하게 말하던 시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 방에서 쫓겨난 시녀들과 또 다른 사람.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은 인사가 끝난 뒤 나를 빤히 응시했다.
“대공비 마마께서 찾으십니다.”
“누굴.”
“대공자님. 대공비 마마께서 아이샤 님을 찾으십니다.”
대공비가 찾는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로헨은 더욱더 짜증 섞인 표정을 했다. 난 로헨이 말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힘들 거 같아요.”
“네?”
“오늘은 조금 바빠서요.”
“아…… 그래도, 대공비 마마께서 찾으시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인지 시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로헨 또한 내가 이리 반응할 줄은 몰랐던 건지 눈만 깜빡였다.
“대공비 마마께서 찾으신다고 제가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
“아…… 그렇지만…… 바쁘신 일이 있으시면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쉽게 넘어갈 생각 따윈 없는 듯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글쎄요. 오늘은 라리를 돌볼 거라서요.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끝남이라는 게 있을까요?”
오늘 쫓겨난 시녀들을 비꼬아 말함과 동시에, 내 의사를 명백히 전했다.
“하지만 대공비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라리가 우선인데요.”
“…….”
그녀의 시선은 누워 있는 라리에게로 향했다.
“잠시라도 다녀오심이 어떠실까요.”
“싫어요.”
나는 시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고, 로헨이 내 말에 같이 호응해 줬다.
“싫다는데 왜 자꾸 집착적으로 구는 거지? 나가도록 해.”
“아…….”
그제야 눈치를 보던 시녀가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결국 그녀는 방에서 나갔다. 그녀를 보며 난 피식 웃었다.
‘무엇 하나 제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당신은 어떻게 나올까.’
꽤나 애달플 그녀를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다. 우리는 그 이후로 라리의 옆에 꼭붙어서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렉스가 돌아온 건 늦은 밤이 되어서였다.
***
대공비 쪽 사람들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대신 밤늦게 온 렉스가 한 명의 여인을 데리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