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이럴 땐 눈치가 참 좋다니까.
나는 어색하게 그를 바라봤다. 어설프게 속여 봤자, 렉스는 속여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의 눈에는 분명 내가 시녀들을 따라 나간 것 자체가 그저 어린아이가 벌이는 그런 일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따라 나오지 않았던 거고, 이전까지 의도한 건 그런 거긴 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한 말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퍼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숨길 이유는 없다. 그가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면.
“음…… 맞아요. 그냥 정신 차리라고 이야기해 줬어요.”
“네?”
“허튼짓하지 말라고.”
렉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이샤 님, 당신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신 겁니까. 시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다 대공비 마마의 귀에 들어가겠죠. 내 행실을 이상하게 보겠죠.”
하지만 지금은 자극이 필요할 때거든요.
의도치는 않았으나 시녀들이 모두 잘려 버린 지금, 대공비 마마께서는 분명 급하게 몸을 움직이려 하겠죠. 쌍둥이들을 감시할 인원이 적어졌으니.
‘그런 상황에서 내가 자신이 보낸 시녀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걸 알게 되면, 그녀는 나도 함께 처리해 버리려 하겠지.’
그녀가 싫어하는 건 자신이 모르는 것. 모든 걸 제 손 위에 두고 봐야 하는 사람.
그걸 알기에 한 일이었다.
“그걸 바란 거예요.”
“그걸 바라다니…….”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 나를 잠시 보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뜻이 있으신 거겠죠……?”
“네.”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이샤 님을…… 작은 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실 때면…….”
그가 하려는 말들을 이해한다. 보통의 아이라면 시녀들을 자극할 순 있어도 그들을 통해서 대공비를 건드리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어 그런 일을 해서 대공비를 건드리는 거냐고.
“그분께서는…… 정말 다정하면서도 조심해야 하실 분입니다. 괜스레 일을 만들어 봤자…….”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는요.”
“네?”
“매순간 눈치를 보게 돼요. 그리고 매번 선택을 강요당하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이번에도 선택을 한 거예요.”
“선택이요?”
“네. 이 다음에 할 일을 위한 선택이요. 그래서 렉스는 어때요?”
이미 그가 알아차렸기에, 도리어 말은 쉬워졌다. 나는 그를 통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도 내가 준 것을 조사하면 너무나 쉽게 알아차릴 일. 그래서 물은 말에 그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네?”
“렉스는 누구의 사람이에요?”
“저는 아이샤 님의 사람이죠.”
“그런가요.”
“다음 할 일이라는 건 어떤 말씀이세요? 그게 지금 제게 물은 물음과 같은 선상이 있는 말인가요?”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만요.”
대공이 안으로 들어간 이후 문이 살짝 열려 있는 침실을 바라봤다. 어쩐 일로 로헨은 대공과 차분히 이야기 중이었다. 차분히인지, 아니면 소란스럽게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잠시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긴 했다.
나는 그들 몰래 창가에 있던 인형을 꺼내 왔다.
로헨은 보지 못한 듯 잡는 사람은 없었고, 난 후다닥 밖으로 나와서 그걸 로헨에게 내밀었다. 목이 뜯어진 인형.
“이게 뭡니까?”
“그 물건, 대공 전하께 말씀드려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대로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그 솜 안에 있는 거요. 그거 알아봐 주시면 돼요.”
“아. 걱정 마세요. 대공 전하께 말씀을 전할 일은 없으니.”
그 말은 믿지 않는다.
시녀들이 렉스가 매번 다 이른다고 했다. 그들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지만, 그만큼 렉스의 외출은 잦다는 소리다. 그게 대공에게 말을 전하러 가는 건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가 대공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거라는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네.”
전할 일 없다는 그 말은, 조금의 믿음도 가지 않았다. 렉스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공의 사람이었고, 대공의 명을 받고 책 속에서 쌍둥이들을 돌본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돌보고 있는 사람이고. 그의 모든 명령의 시작과 끝은 대공이다.
“아! 그래도 조심해요.”
“위험한 건가요?”
“단독으로 위험할 거 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이샤 님.”
“네?”
그는 아주 조심하게 나를 바라봤다.
“제게 누구의 사람이냐고 물은 건, 이것 때문이군요.”
“네.”
“음…… 저는 솔직히 아이샤 님의 사람이지만, 그래도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난 별다른 감정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른의 손을 잡는 건 어떠실까요?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게, 조금은 쉬운 길로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이샤 님이 너무 고된 길로 가는 게 아닐까, 저는 걱정이 됩니다. 조금 더 아이다우셔도 될 거 같은데.”
나는 그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사람의 손을 잡고 싶겠어요? 라리는 고아원에 있을 때 조금도 아프지 않았던 아이예요. 누구보다 건강했던 아이고. 그런 아이가 이곳에 와서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어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나빠지고 있죠.”
“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아무것도 없이 갑자기 아이가 아플 리 없으니까요.”
“이미 범인을 유추하고 계셨군요. 제 말이 도리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네요.”
그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
“그래서 시녀들을 모두 내쫓은 거고…… 정말 아이샤 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그는 입을 움직이다가 고개를 떨궜다.
“저만 모르는 것투성인가 보네요.”
“아니에요. 내가 그냥 예민하게 굴어서 그래요. 예민하게 생각하다 보니 범인이 누군지는 알겠더라고요. 라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총괄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누구보다 대공가에서 입김이 센 사람.”
난 왜 이 사람에게 이렇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있는걸까. 나도 정말 약해졌나 보다.
조금은 힘이 들긴 한가 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지쳤나 보다. 누구의 도움이든 받고 싶나 보다. 그게 소설 속에서 끝까지 의리를 지켰던 렉스인가 보다.
“차라리 이런 것들을 대공 전하께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이것도…… 뭔가 위험한 거라면…….”
“아무 증거 없이 추측만으로 하는 말들이잖아요. 오히려 말을 꺼내 봤자 대공 전하께서 난처해지실걸요.”
“아. 그러네요.”
“그래서 렉스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부디 제대로 조사해 주세요. 쌍둥이들이 위험할 일이 다시는 없게. 그 후에…… 대공 전하께 말씀드리려 해요. 제 생각들을 정리해서.”
나도 모르게 술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번 로헨에게 이야기해서일까, 아니면 모든 게 내 뜻대로 움직여 주고 있어서였을까. 다른 이에게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음…… 그렇군요.”
“거기에 이거 하나만은 아닐 거예요. 분명 라리를 저렇게 만든 다른 큰 원인이 있을 거예요. 그걸 위해서 시녀들을 조금 자극했던 거예요. 이쪽도 무언가 했으니 저쪽에서도 반응이 올 거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이샤 님의 모든 조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네.”
이걸 통해서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될 거다. 내 마음이 시켜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 본능이 시켜서 그런 건지 확실치는 않지만, 난 그에게 모든 걸 다 이야기했다.
그가 대공비 쪽과는 아무 연관이 없고, 오히려 그쪽을 좋아하지 않기에 할 수 있었던 말. 그것을 통해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확실해질 것이다.
내가 준 인형을 만지작만지작하던 렉스는 어설프게 웃었다.
“정말…… 하. 고아원에서 자라신 분들은 원래 이렇게 똑똑하십니까? 제 동생이랑 동년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네요.”
“그건 제가 조금 더 먼저 어른이 돼본 적이 있어서 그래요.”
“네?”
말 그대로의 뜻이었지만 렉스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조금 빨리 컸나 봐요.”
“아…….”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군요. 하긴. 많이 힘드셨을 거 같아요. 아까도 아빠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 보니. 저나 대공 전하나…….”
그때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는 거지?”
문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대공이 안에서부터 나왔다.
“대공 전하. 이야기는 모두 끝나셨습니까?”
“그래. 로헨을 통해 그동안 시녀들이 얼마나 아이샤를 무시해 왔는지에 대해 들었다. 생전 말이 없던 놈이…… 아이샤에 대해서는 열심히도 이야기하더군.”
피식 코웃음을 친 대공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처음이야. 로헨과 이렇게 길게 둘이 이야기한 것은.”
“축하드립니다.”
“축하까지는. 어찌 되었든 상황은 알겠으니 걱정 말고 있거라. 믿을 만한 자들로 다시 뽑을 테니까. 그 전까지는 불편하더라도 이대로 지내거라. 아이샤.”
“저는 지금 충분히 편해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배려해 주신걸요.”
물론 내게 아이들과 따로 자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너무나 좋은 상황이다. 예전에는 나를 길거리의 돌멩이만도 못하게 취급했지만, 지금은 사람으로 생각해 주고는 있으니.
난 만족한다. 고아원 때보다 훨씬 좋으니까.
“……흠. 그 말이다.”
“네?”
“같이 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