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차가운 대공의 목소리가 방 안 공기를 더 차갑게 만들었다.
“내가 너무 조용히 얌전히 있었던 모양이야.”
“대공…… 전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거든지, 이렇게 하라고 누군가 시킨 거든지, 둘 중에 하나겠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를 리 없다. 누가 그들의 배후에 있는지.
“그동안 잘 돌아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마치 숨만 겨우겨우 쉬던 물고기에게 물을 넣어 준 것처럼, 대공의 눈에 조금은 생기가 돌았다. 그동안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들. 이미 대공가는 대공비의 손아귀에 있었고, 이곳에 일하는 모든 자들은 그녀의 눈과 귀가 되었다.
꼭두각시 대공. 자신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생각했지만, 그는 눈이 가려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녀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곤 했다.
하지만 꼭두각시 인형인 줄 알았던 그가, 드디어 눈을 뜬 것이다.
생각을 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였다면 대공비의 말만 들었겠지.’
왜 대공이 이렇게까지 아이들을 생각하는데,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데 과거에 그와 아이들의 사이가 데면데면했는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대공이 아이들에게 잘해 주지 못했구나, 이 정도를 생각하고 왔던 나로서는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아이들을 신경 쓰는 모습들이 의아했다. 하지만 이제야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은 느낌이다.
대공과 아이들의 사이가 좋아지지 못했던 건, 대공비가 시키는 대로 해서였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이런 게 좋을 거 같다, 아이들은 그저 귀한 물건을 사주기만 해도 사랑받는다 느낀다. 이런 말들로 그를 현혹시켰다.
아이들이 바란 건 자주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고, 천천히 마음을 여는 건데 그는 그저 그런 것들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했을 것이다.
‘좋아해 줄 거라 생각하고.’
분명 그랬을 거다. 하지만 이제 그는 생각이라는 걸 시작했다.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자신이 모르는 것들투성이라는 걸.
“나 빼고 모든 게 돌아가고 있더군. 대공가의 주인은 나인데 말이지. 그러니 저런 것들이 내게 반항을 하지.”
“바, 반항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건…… 오해였다는 걸 말씀…….”
“그걸 반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내 말을 듣고 납작 엎드리면 될 일. 오해? 내가 오해를 하든 말든 너 같은 것들이 왜 내 생각을 바꾸려 들려는 거지?”
“아…….”
저런 사람이었구나. 처음 대공을 만났을 때,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유추하긴 했지만 그는 예상보다 훨씬 재수가 없었다.
“발치에 차이는 돌만도 못한 것들이.”
“…….”
죄송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그들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쓸모없는 것들투성이로군. 내가 보낸 렉스에게 이럴 정도면, 아이샤가 계속해서 저런 마음을 느낄 정도였으면 얼마나 눈치를 주고 저희들이 잘났다는 듯 행동했는지 뻔히 알겠군.”
“전하, 그게 아니라…….”
“닥치도록. 귀가 없나? 말을 못 알아듣나? 머리통은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나?”
“…….”
“안 되겠군. 이딴 것들을 이 방에 두었다는 게 끔찍할 정도야.”
혀를 끌끌 찬 그는 시녀들에게로 다가갔다.
“꺼지도록.”
“네?”
“이 방에서 모두 꺼지라고 했다. 그리고 너희들 주인인 대공비에게 전하도록 해. 이제부터 쌍둥이들의 시녀는 내가 뽑고 관리하겠다고.”
순간 시녀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 저, 전하. 그것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내 말이…… 우습나?”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소, 송구합니다. 전하. 저희가 그동안 한 일들은…….”
대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많이 우습지?”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 저희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데다가 갑자기 저희가 사라지면 부, 불편하시지 않을까 하고…….”
“하는 것들도 없으면서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한 번 더 말하기 전에 꺼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예 대공가에 발도 못 붙이게 해줄까?”
“…….”
우물쭈물하던 시녀들은 저희들끼리 눈치를 보다가 빠르게 물러났다.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은 별수 없다는 듯 쑥덕거리다가 빠르게 방 밖으로 나갔다.
“쓸데없는 것들이 별짓을 다 하는군.”
“송구합니다. 저 때문에 대공 전하께서…….”
“그대 잘못이 아니다. 저런 것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게끔 그냥 둔 자의 문제겠지.”
대공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그는 우물거리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다.”
“네?”
“너를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면 말하도록 해. 그래도 내 시험을 통과해 이곳에 있게 된 손님이니.”
“네! 아! 안에 안 들어가 보세요? 로헨이랑 라리가 기다려요.”
유난히도 큰 손이었다. 내 머리가 그의 손 하나에 다 감싸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건 간질간질한 것이었다.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나였다.
‘과거에 나는 어떻게 살았지.’
딱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뭔가…… 잊혀 가는 기분이 점점 든다. 한국에 살았고, 소설 읽는 걸 취미로 삼았던 사람. 그리고 이곳은 소설 속.
‘아무래도 더 많이 기록해 놔야겠어.’
왜인지 모르게 나는 하루가 다르게 기억이 사라져 간다.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이곳에만 있는 것처럼. 그래서 최근에 기록을 해놓긴 했는데 그게 점점 더 심해졌다.
그저 나는 과거에 딱히 사랑이란 걸 받아 본 적 없었고, 소설 속의 부모에게 사랑받는 아이들을 참 부러워했다는 것. 그래서 대공의 손길에 마음 어딘가가 이상했다.
“아…… 아이들이 날 기다리긴 하나?”
“말은 하지 않아도, 보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요. 대공 전하는 아빠인걸요.”
아이들이라서, 상처가 많은 아이들이라서 아직은 표현이 어려울 거다.
“지금 당장 뭘 안 해도 괜찮으세요. 그냥 자주 보러 오면 좋을 거예요.”
“음…….”
“사실 이건 제 생각이에요. 제게도 아빠가 있었으면, 그냥 자주 와주는 것만으로도 좋겠다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들도 같을 거예요. 말은 없긴 해도.”
순간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대공과 렉스의 표정이 미묘하다.
“어…… 그,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고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껴들었죠.”
“아니다.”
대공은 렉스와 눈을 맞췄다. 뭔가 무언의 대화가 오가는 듯했다.
그리고 서로 대화가 끝난 듯 대공은 침실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들어가 볼까.”
두려움이 있는 건지, 주저하던 대공은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난 나를 바라보는 렉스 앞에서 슬쩍 주머니를 떨어뜨렸다.
다행히 렉스는 보지 못한 듯싶었다.
“아! 렉스. 시녀들이 이거 놓고 간 거 같아요!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같이…….”
“이것만 주고 바로 올게요!”
렉스가 따라오려 했지만,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따라오지 않길 원한다는 걸 알아차린 듯 렉스는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손톱을 이로 깨물거나 불안감을 말로 표출하는 시녀들이 불안한 듯 모여 있었다.
난 그들에게로 향했다.
“……네가 왜……!”
“할 말이 있어서요.”
“뭐? 왜. 아까 그딴 식으로 말해 놓고, 우리를 약 올리려고?”
마리는 흉흉한 기세를 내비치며 나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난 렉스를 따라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떨구었다 주운 작은 주머니를 품에 넣고선 씩 웃었다.
“글쎄요. 있잖아요. 귀한 물건을 팔고, 좋은 물건이 넘쳐나는 곳에서 일한다고, 본인들도 그런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급의 사람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본인들은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죠.”
“……지금 무슨 소리를…….”
“정신 차리라는 소리예요. 당신들은 그래 봤자…… 시녀나 하는 사람들일 뿐인걸요.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일회용품으로 쓰다 버려질 운명이란 거예요. 그러니까…… 괜한 기대감 같은 거 가지지 말아요. 대공 전하뿐만 아니라 ‘그분’한테도. 좀 정신 차리셔야죠.”
황당하다는 듯 시녀들이 일제히 나를 보며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지금…… 지금…… 우리를……!”
“저라면 이렇게 안 있어요. 어서 그분께 달려가서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대공 전하의 노여움을 사 왔다고. 그게 먼저예요.”
“이게……! 어디 주워 먹다 버린 뼈다귀처럼 생긴 게! 우리한테 감히, 감히! 고아 주제에!”
“네. 나는 고아예요. 나는 기대도 하지 않아요. 당신들처럼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요. 주제 파악은 참 잘하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정신 차려요. 아. 여기서 쫓겨나면 더 이상 쓸모 없어서 버려질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몸을 돌렸다.
‘부디 내가 자신들을 무시한 걸 당신들의 그분, 대공비한테 가서 잘 전달하도록 해요.’
당장이라도 나를 잡을 듯 그들이 왔지만, 난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렉스가 보였다.
“아이샤 님.”
“네?”
“따로 나가셔서 시녀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아! 그건 두고 간 게 있어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작은 주머니를 시녀들이 가지고 다닐 리 없지요. 그들은 귀족 출신이라 귀하고 좋은 물건만 쓰는 게 보통이니까요. 아이샤 님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