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네?”
“렉스. 렉스는 더러운 핏줄 소생이에요?”
“네??”
시녀들보다 더 당황한 건 렉스였다. 내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와서인지 렉스는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저 시녀가 그랬어요.”
순간 렉스의 시선이 시녀에게로 향했다.
“……아이샤 님께 무슨 말을 하고 다니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됐어. 네가 기죽을 필요가 뭐 있어.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사실이잖아.”
그때였다.
제일 크게 웃던 시녀가 주눅이 든 시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제일 크게 웃는 시녀의 이름은 마리. 주눅이 든 시녀의 이름은 셀피.
“하지만…….”
“우릴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요? 억울하면 반론이라도 해보든가요?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문제 될 게 있나요?”
마리는 당당할 따름이었다. 대공가에 있는 시녀들은 모두 귀족 출신이다. 그렇기에 남작가 출신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현재는 남작가 출신인 렉스와 말함에 있어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예의라고는 조금도 없으신 분들이네요.”
“예의요? 그저 솔직한 거죠.”
솔직함을 무기 삼아 상대를 짓밟는 이들. 아니, 저들은 일부러 렉스를 깔보고 있었다. 마치 네가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라는 표정이다.
사실상 저들이 싸우든 말든 아무 상관 없기는 하다. 원래도 사용인들끼리 기싸움은 늘상 있는 일이고, 그게 쌍둥이들이 돌보는 데에 문제가 되진 않으니 딱히 내가 껴들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꼴 못 본다.
“렉스.”
나는 렉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냥 들어가시죠. 아이샤 님. 저런 사람들하고는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할 말 없으니 저러는 거 봐. 솔직히 가문도 미천한 데다가, 출생까지 그런 사람이 대공가에 있는 것 자체가 격을 떨어뜨리는 거라고.”
“그러니 쌍둥이분들의 호위가 아닌…… 그런…… 뭐…… 그런 사람의 호위나 하는 거겠지.”
이제는 그들의 무시가 내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동안 봐온 내가 제정신이란 걸 잘 알았는지 나에게는 말을 하다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말로는 하지 못했으나, ‘그런 사람’이라는 단어를 쓸 때 나를 봤다는 게 그 마음을 알려 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신들은 대공가의 시녀라는 사람들이…….”
난 렉스의 팔을 다시 한번 잡아당겼다.
“하…… 아닙니다. 아이샤 님. 목소리를 높여 죄송합니다. 이만 들어가도록 하시죠. 제가 흥분을…….”
“아뇨. 대공 전하께 가요. 렉스.”
“네?”
“렉스가 다 이른다고 하더라구요. 이참에 또 일러요. 저렇게 예의 없는 사람들을 이곳에 둘 순 없잖아요.”
나는 시녀들을 바라보다가 렉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가 대공 전하께 다 이른다고 해요?”
“네. 그러니 같이 가서 말해요.”
그제야 조금 심각성을 깨달은 건지 시녀들이 앞다투어 나를 불렀다.
“아이샤 님?”
“저희가 한 말을 이르시려구요? 하지만 딱히 이를 것은 못 될 텐데요.”
당당하게 구는 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를 거예요.”
“시녀들이 렉스를 괴롭혔어요~ 혼내 주세요~ 이런 말이나 하시려고요?”
아무래도 저번에 나 때문에 욕먹은 시녀가 마리와 친구 사이라도 되나 보다. 나에게 저렇게까지 날 서게 대하는 거 보면.
“아니요. 대공 전하께서 보내신 기사에게조차 예의 없이 구는데, 애들한테는 어떻겠어요. 그걸 말하러 가야겠어요.”
“저, 그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렉스는 주저주저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라면 바로 갔을 렉스가 오늘따라 우물거리는 게 이상하다 느껴질 찰나, 다른 시녀들이 그의 공백을 대신했다.
“뭐, 뭘 그런 거까지 말하세요. 저 기사에게 한 것은, 그저 저희들끼리 하는 이야기였을 뿐인데요.”
뒤늦게 다른 시녀들이 나섰지만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몰라도 저희 애들한테도 그럴까 봐, 전 그 꼴은 못 보거든요. 싹을 미리 잘라 버려야죠.”
“자르다니……!”
“마리. 지금이라도 사과해. ‘그분’께서 문제일으키지 말고 잘 있으라 했잖아!”
“몰라. 내가 왜 사과를 해.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이런 게 문제 될 리 전혀 없어.”
“마리!”
마리 말이 맞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이런 건 절대 문제 될 수가 없다. 시녀들끼리 하는 수다. 그것도 맞는 말이고. 하지만 지금 여기는 보통의 상황이 아니다.
“저렇다고 하니 어서 가요.”
난 렉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굳이 가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네?”
왜. 우유부단하게 이대로 일을 넘기려고 하는 건가? 내 뜻대로 해주지 않으면 조금 실망일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문제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갑작스러운 남자의 목소리. 그건 대공의 목소리었다. 기가 막힌 순간에 대공이 들어왔다.
“대, 대공 전하.”
시녀들이 제일 먼저 그를 발견하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도 시끄러워 듣고 있자니, 별별 소리를 다 하는 것 같더군.”
“아…… 그것이…… 그저 저희들끼리 잠시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그래. 그렇군.”
대공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뭐야, 이렇게 넘어가는 거야?
“대공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매일 같은 시간에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시녀라는 자들이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날이 선 그의 말에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보기에 바빴다.
“아…… 압니다. 하지만 평소보다는 조금 이르게 오신 듯하여.”
“대공인 나조차, 올 때 보고를 하고 오라는 건가. 시녀 주제에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괜스레 말을 꺼냈던 시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다음부터는 꼭 보고하고 오도록 하지. 대공은 나인데, 이 가문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군. 한낱 사용인 주제에 내게 저딴 말을 지껄일 수 있다니.”
다 보고한다면서 그는 비비 꼬인 꽈배기처럼 그들의 말을 열심히 비꼬았다.
그제야 시녀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뭐가 아니란 거지? 아, 가문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그대들이 한낱 사용인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그게 아니라, 저희들이 한 말을 오해하신 듯하여…….”
“아아. 내가 속이 배배 꼬여 오해까지 했단 말인가?”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시녀들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나를 무시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딱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대로 두었지. 하지만 이제는 안 되겠어. 한낱 사용인 주제에 대공을 무시하고.”
대공의 성정이 그리 다정하거나 보드라운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
감정 따윈 사막처럼 메말랐고, 제 뜻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쌍둥이를 찾기 전까지는 세상에 무료함을 느껴서인지 그는 딱히 다른 일을 하진 않았다. 대공비가 무엇을 하든 그냥 방치했던 것, 대공비가 대공가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건 다 그런 복합적인 일 때문이었다.
이참에 대공비는 대공의 약점을 잡아 그의 날개를 모두 찢어 버리려 한 것이었고, 책 속에서는 실제 이게 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네.’
쌍둥이가 와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심경의 변화 때문일까. 대공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지?”
시녀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자, 대공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렉스를 무시했어요! 더러운 핏줄 소생이니, 가문이 미천하다느니. 그런 사람이 대공가에 있는 것은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말을 했어요.”
“사실인가?”
“네. 전하.”
내내 말이 없던 렉스는 내 말에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
“나는 안 괜찮아요!”
이대로 더 이야기해 봤자 변하는 게 없다는 걸 알기에, 렉스는 이야기를 이쯤에서 끝내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렉스는 언제나 자신의 출생에 대한 말을 들어 왔고, 그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사람이니까. 도리어 이 일 때문에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그는 꽤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저한테 하는 소리 같았어요. 저한테 이곳에 있으라고 해주신 건 대공 전하인데, 저 같은 사람이 대공가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말하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렉스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저는 속상했어요.”
아이처럼 그에게 징징거려 봤다.
어차피 대공은 이자들에게 제대로 처벌을 내릴 생각인 게 분명하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방 안으로 들어온 거겠지.
평소의 그였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대공은 무기력했으니까. 아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가이드를 주지 않았으니까. 그런 행동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리 말했다는 건가?”
“저, 저희는 아이샤 님께 그런 게 아니에요! 전혀 그런 의도로 한 것도 아니고요!”
“아. 아이샤한테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직접 호위를 맡긴 렉스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