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냥요.”
“그냥이라.”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의 그였지만,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 보육원장은 자신의 자식을 학대한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녔다. 죽여버려도 할 말 없는 사람일 테니까.
“궁금해하면 안 되는 건가요?”
“안 될 건 없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너도 너만의 생각이 있는거겠지.”
“네.”
“그런데 이상하군. 보통의 아이라면 함께 자랐던 아이들을 궁금해할 거 같은데. 아니면 보육원장이 너를 특별히 대하기라도 한 건가.”
“보육원장님은 모두에게 똑같았어요.”
그제야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똑같은 사람. 그 뜻은 쌍둥이에게 하는 짓이나 다른 이들에게 하는 짓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걸 은연중에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번 삶에서 보육원장은 내게 하는 짓이나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짓이 똑같았다. 쌍둥이들에게는 더 다르게 대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공평하게 학대를 받아왔다. 하지만 아마…… 과거의 삶에선 그러지 않았을 거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내 과거.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
‘그 삶에서 나는 보육원장에게 예쁨받았을거야. 아마도…….’
나는 지금의 삶을, 소설 속의 이야기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미 보육원에서, 기억을 되찾은 그 순간부터 난 과거와 달리 행동했다. 보육원장을 증오했고, 그녀가 하는 일들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말을 잘 듣지도 않았고, 아이들을 돕기에 바빴다. 그리 하지 않았더라면 과거처럼 보육원장이 나를 예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랬더라면…….
‘과거와 똑같이 흘러갔겠지. 그랬더라면…… 그녀와 연관 관계가 생겼을 텐데.’
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오해한 건지, 그가 입술만 비죽거렸다.
“똑같았다라.”
“네.”
“그런 것치곤 이해할 수가 없어. 같이 자란 친구들이나 선생들은 묻지도 않고 보육원장을 짚어 이야기하는 게.”
“그냥…….”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뭐. 되었다. 나도 그자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면 민감해지는군.”
“아.”
“차라리 죽였더라면, 이렇게 예민하지 않았을 텐데.”
“설마…….”
“도망쳤다.”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기분이었다. 도망쳤다는 그 말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이 느껴졌다.
“참 대단한 인간이야. 불타는 보육원에서 살아남다니.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고, 우리는 방심했지. 혹시 몰라 그곳에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던 이들에 의해 그녀가 발견되었다.”
“아…….”
“불 때문에 인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지. 정말 신이 억지로 그녀를 살린 것처럼, 겨우겨우 목숨줄은 붙어 있었다고 보고 받았다. 결국 뒤늦게 그녀를 데려오라 했지.”
“거기서 못 데려온 거예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한 일이지. 도저히 못 살 것 같던 인간이 살아난 것도 모자라, 도망까지 쳤다니. 누군가 도와주지 않고서야 도망칠 수도 없었을 텐데.”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또 거기에 도와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미 우리가 다 정리를 한 상태였으니.”
그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정말이지. 갈기갈기 찢어갈겨도 시원찮을 것을 놓치다니. 그 후로 찾으라 명했지만, 찾지 못했다. 현재까지.”
“아…….”
“그 꼴로 도대체 어딜 도망간 건지. 참 신기한 일이지.”
혀를 끌끌 차는 그를 보며 대신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래를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고. 난 내가 미래를 알아서, 조금씩 바꿔와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녀와는 다를 거라고. 이미 쌍둥이들에 대해서도 바꾸지 않았냐고.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 이후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녀가 도망친 건…… 그녀가 살아 있는 건 과거와 똑같아.’
과거에도, 소설 속에서도 그녀는 살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같다면…… 결국 보육원장은 이쪽에 연락을 해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완벽하게 절망적인 상황은 아닐지 모른다.
꿈속에서 보육원장은 대공가로 어떻게서든 들어가게 하려 했다. 하녀로서. 하지만 난 이미 이곳에 와 있고, 어느 정도 신임을 얻은 상태다.
보육원장이 왜, 어떤 이유에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려 한 건지 알수는 없지만, 적어도 원하는 게 있다면 이번에도 연락할 것이다.
“그렇구나…….”
“네가 보기에는, 누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을 거 같나?”
“네?”
“그런 몰골로, 겨우 목숨줄만 붙인 상태로는 이렇게 완벽하게 숨어 있을 수 없다. 죽었을 것도 염두해 봤지만, 그 근처에 있는 마을 어디에서도 그런 사람의 존재는커녕 시체도 찾을 수 없었지.”
그 말에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지 대략적으로 생각이 드는 곳이 있긴 하다. 하지만 꿈에서 본 곳인 데다가 워낙 단편적이기에 확실하게 어디라고 말할 순 없었다.
머리가 닿을 듯 낮은 천장. 알 수 없는 지독한 냄새가 가득한 곳. 허름한 움막.
꿈에서 본 곳. 밖에 풍경이 보였던가. 자세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산속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묘했던 거 같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던 거 같은데. 딱히 떠오르질 않는다.
“혹 생각나는 곳이 있나?”
“네?”
“심각한 표정을 짓길래.”
“아…… 음……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보육원장님이 몇몇 귀족들에게 뒷돈을 찔러준다는 건 알고 있어요. 아마도…… 그 사람들중 하나 아닐까요?”
하지만 그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그쪽에 대해서는 모두 조사를 끝낸 듯싶다.
하긴 내가 한 말이 무슨 도움이 될까. 솔직히 말해서 대공비와 관련된 게 아닐까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쉽사리 나오질 않는다.
아무 증거 없이 몰고 가는 걸 테니까. 그나마 대공비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대공비를 구석으로 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는 안 될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혹시 뭔가 떠오르면…… 이야기해볼게요.”
“그래.”
“보육원장님에 대해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감사할 거까지 있나.”
“그래도요. 그럼 가볼게요.”
할 말은 모두 끝났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왜 아까는 그런 행동들을 보인 거지? 친한 척하려고 했다던 그 말.”
갑작스런 물음에 난 몸을 돌렸다가 다시금 그를 바라봤다.
“아. 그냥……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공 전하께서 저를 꽤 신경 쓰고 있다는 모습을요. 그래서…… 그래봤어요.”
“아.”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놀라셨죠.”
그는 고개를 아주 살짝 비틀었다.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라.”
“네…….”
“혹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나?”
“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아니다.”
그는 무언가 더 물어보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대공의 시선은 자신의 뒤편에 있는 렉스에게로 향했다. 아마도 그에게 물어보려는 거겠지. 어차피 대공이 렉스를 내게 붙여놓은 이유가 그런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나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 대공 전하.”
“응?”
“또 와도 괜찮을까요?”
“…….”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요.”
적어도 대공비에게 불편감을 안겨줘야 하거든요. 제가 계속해서 이곳에 드나든다는 걸 알면, 그녀는 더 조급해질 거거든요.
“상관없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거지?”
“그냥…… 이라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뭐. 알겠다. 너 편한 대로 하거라.”
이전에는 칼날 같았다면, 이제 대공은 목검 같다. 상대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고, 피해를 입힐 수 있지만, 그래도 그전보단 무뎌졌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또 뭐지.”
“감사합니다. 도서관 이용할 수 있게 해주셔서요.”
“아.”
“대공 전하. 그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그래.”
“그럼 저는 나가볼게요.”
두 사람만의 할 말이 있는 듯하기에, 난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마도 렉스는 대공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는 거겠지.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딱히 거부감도 없었다.
폴짝거리며 난 밖으로 나갔다.
“렉스 기다릴게요!”
“금방 가겠습니다. 아이샤님.”
“네!”
그 말을 끝으로 손수 문까지 닫았다. 그러고 나자 유난스럽게 고요한 주변이 느껴졌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종. 그들을 제외하면 복도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척 하면서 방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누가 봐도 대공비쪽 사람들의 시선이.
뭘 보는 걸까. 대공을 감시하는 걸까. 나를 감시하는 걸까. 아니면 그의 방에 들어가는 이들을 감시하는 걸까. 대공은 저런 이들을 알면서도 냅두는 걸까.
‘그래도 이번에 내가 한 짓은 대공비가 알아차리긴 하겠네.’
렉스와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있어서 일부러 더 보란 듯이 그러긴 했었는데, 굳이 안 그래도 대공비의 귀에 들어갔겠네.
내일 바로 연락이 오려나. 대공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물어보기 위해. 아니면 또 다른 감시를 붙이거나 하녀들을 통해 이것저것 물어오려나.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오래 기다리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