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62)화 (62/99)

-62화-

그러는 사이 렉스가 시녀를 향해 턱짓했다.

“아아…….”

“아이샤 님이 싫으시면 안 가셔도 됩니다. 결국은 아이샤 님을 데려가기 위해 저렇게 구는 거니까요.”

“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함께 가시죠.”

고개를 끄덕이며 렉스를 바라봤다.

자신의 동생에 관한 일 때문에 그렇게 충성을 바치던 대공가를 배신했던 셀렉스. 소설 속에 언급된 그의 모습 때문에 조금은 오해했던 모양이다.

‘이런 모습이라면…… 그의 미래도 확실히 바꿀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당장 그와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선 그의 동생 레지나에 대한 말을 살짝 흘려 놓긴 했지만, 지금은 대공비를 어떻게 하면 내쫓을까 하는 게 우선이니까.

그러는 사이 우리는 방에 도착했다.

어느새 로헨은 라리와 잠든 건지, 침대에 상체를 반 걸친 채 잠들어 있었다. 그나마 이곳이 조금 편해졌구나, 내가 와도 잘 깨지 못하는 로헨의 모습에 안도마저 들었다.

‘그래. 여기가 너의 집이야. 편하게 생각하면 돼. 지금처럼.’

싱긋 웃은 난 급히 몸을 돌렸다.

렉스도 그 모습을 본 건지 아주 조심히 책을 내려 두고 방 밖으로 나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일레인은 우리를 재촉했고, 난 그렇게 대공비에게로 향했다. 만나는 장소는 지난번과 똑같이 정원이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렉스와 함께 온 것 때문에 그곳에 있던 많은 이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무언가 조급한 게 있는 듯 대공비가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곳부터는 함께 가실 수 없으십니다.”

“안전을 위해 함께 가야 합니다.”

가뜩이나 렉스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던 그녀는 짜증 섞인 어투를 냈다.

“대공비 마마가 위험하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건 아니지만…….”

“그게 아니라면 물러나도록 하세요.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위험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이샤 님.”

“난 괜찮아요. 저번에도 별일 없었는걸요.”

걱정이 가득한 렉스는 이번에도 나를 애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리어 괜찮다고 하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여기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거든 바로 말씀해 주세요.”

“응!”

그가 걱정할까 봐 더 밝게 인사한 나는 대공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 나를 대하는 방식에 변화를 준 건지 그녀는 내가 올 때에 맞춰 자리에서 직접 일어났다.

“어서 오려무나.”

혹여나 렉스가 대공에게 말할까 봐 보여 주기식으로 그러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아. 네.”

“기다리고 있었단다. 한참이나 기다렸어.”

바로 옆에서 시녀 하나가 부채질을 하고 있고, 티테이블 위에는 그늘막이 존재했음에도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정말 나를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은 모습에 난 급히 의자에 앉았다.

“좀 바빴어요!”

“그랬구나.”

“다음부터는 미리 말씀해 주시면 그 시간에 오도록 할게요. 갑자기 오라고 하니까 저도 놀랐어요.”

“그래.”

물론 그녀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다린 것만 해도 충분히 짜증 난 상황에서 내가 저리 말하니 대공비의 안색이 굳어졌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척, 자애로운 척하는 게 그녀의 특징이라는 말에 딱 걸맞게 대공비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혹시 몰라 초코를 넣은 우유를 준비했단다. 이런 거 먹어 본 적 없지?”

“네.”

“입에 맞을 거다. 아이들은 초콜릿을 좋아하거든.”

그렇게 획일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우선은 아이 같아 보이기 위해 해맑게 초코우유를 먹었다. 난 초코우유보다 딸기우유가 좋은데. 심지어 제대로 된 조합법 없이 우유에다 그냥 초코를 넣은 건 맛이 좀 묘했다.

식기까지 해서 초코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이런 걸 좋아한단 걸 보여 주려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그렇지? 나와 손을 잡으면 언제든지 이런 걸 먹을 수 있단다. 나는 아주 자애롭거든.”

“그렇구나.”

“이번에 대공의 눈에 들었다지?”

처음 시작은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이미 다 알면서도 그녀는 내게 물어 왔다.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셨어요.”

“그이의 마음을 돌리다니. 너도 참 대단한 아이야.”

“대공 전하께서 너른 마음으로 해주신걸요! 그런데 저 좀 대단한 거 맞는 거 같아요.”

뜬금없는 내 자랑질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네!”

“무엇이?”

“여러모로요! 생각보다 다들 저를 예뻐해 주시는 거 같아요!”

지난번에는 과할 정도로 똑똑한 아이인 것처럼 굴었으니, 이번에는 철없는 아이인 척 웃었다. 이렇게 해야 그녀가 나에 대해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할 테니까.

“그, 그래? 누가 너를 예뻐하는데?”

“대공 전하도 예뻐하시고 대신녀님도 예뻐하시고, 대공비 마마도 예뻐하시잖아요!”

“내, 내가?”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네. 아니에요?”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가 억지로 웃었다.

“아니다. 예뻐하고말고. 예뻐하니까 나와 손잡자는 이야기를 하지. 쌍둥이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안 하고 네게만 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알겠지?”

“네!”

“그래. 예뻐하고말고. 그래. 대공은 너를 예뻐하는 거 같으니 그렇다 쳐도…….”

말끝을 흐리는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럴 만하지. 어지간해선 누군가를 이리 챙기지도 않는 남자가 갑자기 너를 챙기겠다고 기사도 만들고…….”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그녀는 애써 말을 감추는 듯했다.

대공이 뭔가 하고 있는데, 말을 안 하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래. 뭐. 어쨌든 대신녀가 널 예뻐한다는 건 무슨 이야기니?”

“대신녀님이 축복을 주신다고 자주 찾아오라고 하셨거든요.”

“축복을 준다고 자주 찾아오라 했다고?”

“그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구는 그녀에게 도리어 떠봤다. 우리에게 붙여 놓은 시녀들을 통해 이미 들었을 텐데, 그녀는 아닌 척 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니, 듣긴 했단다. 그랬구나. 그런데 정말 축복을 준다 했니? 그 대신녀가? 어지간해서는 사람도 만나지 않는 대신녀가, 직접 만난 것도 모자라 그런 말을 했다니.”

그조차 충격인 듯 대공비는 어색하게 웃었다.

“혹여 네가 만난 사람이 대신녀가 아닐 확률은…… 아니다. 네가 본 대신녀는 어땠지?”

“어…… 되게 젊어 보이셨어요. 눈은 무언가로 가리고 계셨고, 걷지 못하셨어요. 그런데 되게 신기했어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랬구나. 거기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궁금한 게 많은 듯 대공비는 계속해서 물어 왔다.

“네. 그저 축복을 해주고 싶다는 거랑…….”

그녀가 그랬듯이 나도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대공비님께만 말씀드리는 건데요…….”

“나에게만 말하는 거?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한 거니?”

“어…… 그건 아닌데. 손잡을 생각을 해야 말할 수 있어요?”

“아니! 아니란다. 그래, 말해 보렴.”

어른들은 보통 아이를 얕잡아 보는 게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들이 잘만 구슬리면 뜻대로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니까.

똑똑한 아이라 봤자, 어른만은 못할 거라고. 대공비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그냥 자랑하고 싶어서 말하는 건데 대공비 마마가 너무 무서워서 말 못 하겠어요! 초코우유 잘 먹었습니다!”

“자랑해도 돼. 해도 되고말고!”

“그래도 돼요? 저 진짜 다른 생각 있어서 말하는 거 아닌데…… 오해하시면 안 돼요?”

“그러마. 무슨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는 거지?”

“저를 되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축복은 사실 저에게 주시려는 거 같은데, 제가 혼자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쌍둥이들에게도 주고 싶으신 거 같아요.”

그녀의 안색이 조금씩 변했다.

“너 때문이라고? 그러면 네가 없으면 축복도 없겠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아, 걱정하시는 거구나.”

“걱정?”

“제가 혹여나 혼자 가는 걸까 봐. 쌍둥이들이 축복을 못 받을까 봐 그러시는 거죠?”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흔들려는 그녀를 보며, 난 걱정 말라는 것처럼 머리를 세차게 끄덕였다.

“저는 라리가 건강해질 때까지 꼭 같이 갈 거예요. 누가 말려도 함께 갈 거니까 걱정 마세요!”

“아니, 그건…….”

“대공비 마마께서 쌍둥이들을 아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신경 쓸게요.”

좋은 수가 났는데 그걸 금세 잃어버린 사람처럼 대공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뭐…… 그래야지. 신경 써야지.”

나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려나. 그럼 나를 내쫓으려나. 하지만 대공이 나를 손님으로 이곳에 두겠다고 말한 시점에서 그녀는 나를 절대 내쫓을 수 없을 거다.

진작에 내쫓지 못한 걸 지금도 후회하겠지.

그렇다면 대공비는 내가 내 발로 나가는 방도를 찾을 거다. 그리고 어떻게든 라리가 대신녀에게 나와 함께 가지 못하게끔, 대신녀가 축복을 통해 아이를 낫게 하지 못하게끔.

“라리가 얼른 나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아픈 게 얼른 나아야 할 텐데.”

“역시 대공비 마마가 보기에도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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