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잠시 저와 함께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를 부르는 건지, 렉스를 부르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말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시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조금 짜증 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가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방해에 셀렉스의 안색이 먼저 굳어졌다.
“대공 전하께서는 아이샤 님을 손님으로 극진히 모시라 했습니다. 그런데 소속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가야 한다는 그쪽들은 누구죠?”
그가 이 가문에서 일하는 자를 모를 리 없다.
그러기에 알면서도 그는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셀렉스가 대공의 최측근 기사이기에 시녀의 반응은 내게 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건 내가 아닌 아이샤 님에게여야겠죠.”
“…….”
“다시 사과하세요.”
의외였다. 이곳에 온 이후 언제나 저런 취급을 받았기에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저 평소랑 같구나 할 뿐. 하지만 렉스는 화난 사람처럼 시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시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저 사람이 누구 쪽 사람일지는 뻔하다. 나를 손님으로도 취급 안 하는 쪽은 뻔하니까.
“말하지 않을 겁니까? 이 일에 대해 대공 전하께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시녀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손님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죠?”
대공가에 들어와 있는 시녀들은 귀족 중에서도 신분이 꽤 높은 자들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실세인 대공비의 수족들이니 얼마나 콧대가 높을까.
비싼 것을 판다고, 본인들이 그 비싼 물건이라도 되는 줄 아는 사람들처럼 시녀들의 행태도 비슷했다. 그나마 쌍둥이들 방에 있는 시녀들은 그나마 달랐지만, 그 외의 시녀들은 우리를 깔보기 일쑤였다.
물론 쌍둥이들에게 그걸 티 낼 수가 없으니, 내게 대놓고 불편함을 토로하는 게 보통의 경우였다. 그렇기에 앞에 있는 시녀의 반응이 조금도 의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누구인지 소속과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 기사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같다고 생각하다니. 대공 전하께서 특별히 모시라고 한 손님에게조차 제대로 인사하지 않는 사람을 같은 사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소개를 제대로 할 이유조차 없다 생각하는데요?”
“…….”
렉스의 가문이 미천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여전히 시녀는 렉스를 불만스럽게 바라봤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도록 하죠. 아이샤 님.”
“아…… 그, 그래도 돼요?”
“괜찮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런 식으로 아이샤 님을 데려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아…….”
난 렉스와 시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지금 무슨 말을!”
시녀는 당황해 입만 어물거렸지만, 렉스는 우리 앞을 막고 있는 시녀를 지나쳤다. 내가 혹시 그 사람 때문에 오지 못하는 걸까 봐 걱정하는 듯 그는 그녀의 시선 자체를 가려 버렸다.
그 덕분에 난 편하게 렉스의 옆을 졸레졸레 따라 걸었다.
“잠깐! 지금…… 지금 대공비 마마의 명을 무시하겠다는 겁니까!”
“아아, 대공비 마마께서 부르셨나 보군요.”
끝.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감탄사를 내뱉은 렉스는 내 보폭에 맞춰 걸을 뿐이었다. 대공비의 시녀를 저렇게까지 무시하는 렉스의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 누구도 저렇게까지 하지 못했을 텐데. 대공의 기사들도 눈치를 봤을 텐데.
‘이런 것 때문에 대공이 그를 내게 붙여 준 걸까. 아니야. 그냥 자신이 믿을 만한 최측근을 통해 나를 감시하려 한 거겠지.’
설사 그렇다 해도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다. 음흉하게 날 감시하는 대공비보단 훨씬 나으니까. 도리어 렉스는 날 생각보다 많이 아낀다는 느낌을 주었으니, 난 그가 마음에 들었다.
결국 우물쭈물하던 시녀가 후다닥 우리 쪽으로 달려와 다시금 앞을 막았다.
“뭐죠.”
“……제가 아직 입에 붙지 않아서 그래요.”
“뭐가요?”
“……그…… 아이샤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 네.”
아이나 자신의 동생에 대해서는 한없이 다정하면서, 또 다른 이들에게는 세상 단호한 모습은 조금 통쾌한 기분이 든다.
‘나도 힘을 기르면 꼭 저리 말하고 싶다.’
그런 생각에 동경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가 혹 무언가 잘못했나요?”
“아니요, 그냥 좋아서요.”
“좋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무시해 왔으니까요. 그런데 렉스가 옆에 있으니 이제 그럴 일이 없을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아…… 죄송합니다.”
그는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사과를 건넸다.
“아니에요! 오히려 렉스가 있어서 좋은걸요.”
“앞으로는 제가 지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아이샤 님이 그런 마음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좋아요! 대신에 제가 이런 말 한 건 대공 전하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비밀이요……?”
“네. 다른 건 말해도 되는데 이런 건 조금 부끄러워서요.”
나는 우물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날 바라보는 렉스의 표정이 조금 의아했다.
“제가…… 전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응?”
렉스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던 그때, 시녀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요?”
“아! 있는지 몰랐습니다.”
“하, 지금…… 대공비 마마의 시녀인 나를 이리도 무시하는 겁니까?”
“대공비 마마의 시녀가 아니었어도 무시했을 겁니다. 대공가의 사용인이면서 제대로 된 예의도 없는 자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단호한 렉스의 모습에 그녀가 결국 꼬리를 내렸다.
“송구합니다.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랬던 겁니다. 아…… 아이샤 님.”
“아…… 네…… 뭐.”
“다름이 아니라 대공비 마마께서 아이샤 님을 보길 바라고 계세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겠어요?”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그 말에 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원래도 대공비를 보려고 했던 거니, 보자고 하는 지금이 도리어 반가울 따름이었다.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네.”
“손님을 그렇게 바로 부르는 경우는 없다 생각합니다만, 아이샤 님이 원하신다면 바로 가도 괜찮을 것 같긴 하군요. 하지만 이후에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내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건지 렉스는 특별히 기회를 주는 거라는 느낌을 풍겼다. 또한 다음번에는 이런 식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부를 땐 부르고 내쫓을 땐 내쫓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정말 든든한 내 편이 하나 생겼다.
“없다는 게 무슨 말이죠?”
“정식으로 약속을 잡지 않으면 아이샤 님과 누구든 보기 힘들 거라는 말입니다. 그게 설사 대공 전하라고 할지라도요.”
“하…… 정말…… 뭐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 말을…….”
“뭐라도 되는 것 맞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친히 신경 써라 말씀하신, 대공가의 특별한 손님이요. 아시겠습니까.”
흠흠거리던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도록 하시죠.”
“그쪽 소개를 먼저 하시죠.”
“하. 네. 대공비 마마의 측근 시녀인 일레인 데르피아입니다.”
“네. 대공 전하의 1기사단 소속 기사인 셀렉스입니다. 그럼 아이샤 님. 함께 방에 들러서 짐을 놓고 가시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짐은 기사님께서 알아서 가져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가씨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일레인 데르피아 시녀님. 아이샤 님의 모든 순간에는 제가 곁에 있을 겁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아이샤 님을 모시고 갔다 모시고 올 건가요?”
렉스의 대답에 그녀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걸요.”
“그렇죠. 당연한 거죠.”
“그러니 쓸데없는 말로 시간은 그만 쓰고, 바로 모시고 갈 수 있게…….”
“그 당연한 걸 지난번에는 하지 않았더군요. 아이샤 님은 대공비 마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데려다주지 않아서 길을 헤매셨다 들었습니다. 그 당연한 걸 하지 않아서 말이죠.”
“그럴…… 리가요.”
그녀는 입술을 들썩거리며 어깨까지 올렸다 내렸다 했다.
“제가 없는 말을 지어낸다고 생각하십니까.”
순간 일레인 시녀의 눈동자에서 불온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거 하나하나 다 이르고 다니냐는,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닌 거냐는 그런 표정으로.
이건 좀 억울한데.
“아이샤 님은 아무에게도 말 안 하셨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직접 발견하신 것뿐. 그러니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건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
“언제 그러긴요. 방금 그랬죠.”
“허…….”
“거기에 대공비 마마께서 대공자님과 대공녀님을 비롯해 아이샤 님까지 아끼신다 들었는데 아닌 모양입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철석같이 그렇게 믿고 계신데, 대공비 마마의 시녀들이 하는 짓들을 보니 틀렸다 말씀드려야겠군요.”
렉스의 단호한 말에 시녀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손사래를 쳤다.
“오해입니다, 오해. 대공비 마마께서 얼마나 아이샤 님을 아끼시는데요. 쌍둥이님들만큼이나 아끼신답니다. 제 표정은…… 제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어서 그리 보였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자신을 통해 대공비의 평가가 절하될까 봐, 혹은 그런 이야기들이 흘러가는 걸 원치 않는 듯 바뀌는 모습에 난 대공비의 성격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시녀들은 언제든 바꿀 수 있는 도구. 쓸모있을 때는 예뻐해 주다가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일이 생기면 바로 내쳐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다.
‘대공비가 대공의 눈치를 딱히 살피는 거 같지 않으니…… 그게 맞는 거겠지.’
대공의 힘이 얼마나 약해졌으면 대공비가 그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 걸까.
조금은 안쓰러우면서도 답답했다.
“이 정도로 말하는데 용서해 줄까요, 아이샤 님?”